맹자께서 말씀하셨다. 공자가 동산에 올라 노나라를 작게 여기고, 태산에 올라 천하를 작게 여겼다고. 그러므로 바다를 본 사람은 웬만한 물은 물로 여기기 어렵고, 성인의 문하에서 배운 사람은 웬만한 말은 말이라 하기 어렵다고. '관어해자난위수(觀於海者難爲水)'. 이 고색창연한 일곱 글자가 오늘, 우리의 일상으로 걸어 들어온다면 어떤 모습일까?
바다를 본 사람? 그렇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바다'를 보고 살아간다. 어떤 이에게 바다는 망망대해의 푸른 수평선이겠지만, 다른 이에게는 평생 천착해 온 학문의 깊이일 수도, 혹은 필생의 과업으로 이룬 예술의 경지일 수도 있다. 그 '바다'를 한번이라도 제대로, 온몸으로 겪어낸 사람은 이전과 같을 수 없으리라. 그의 눈빛은 깊어지고, 그의 걸음걸이는 신중해지며, 그의 언어는 달라진다.
그 변화의 핵심에 바로 '爲水'라는 두 글자가 놓여 있다. '위수'. 이를 어떻게 읽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이 고전의 의미는 무궁무진하게 갈라지고 또 합쳐진다. 신영복 선생님은 이 '爲'를 '말하다(謂)'로 읽어,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물이라고 말하기 어려워한다"고 풀이하셨다. 아, 이 얼마나 겸손하고 깊은 통찰인가. 거대한 실체를 접한 자는 감히 그 앞에서는 하찮아 보이는 다른 것들에 대해 섣불리 이름 붙이거나 재단하려 하지 않는다. 이미 그 웅장함에 압도되어, 이전에 '물'이라 불렀던 것들이 더 이상 그 이름값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언어의 한계를 절감하고 침묵하거나, 혹은 전에 없던 새로운 언어를 모색하게 되는 경지. 바로 그것이 '난위수', 즉 '물이라고 말하기 어려움' 속에 담긴 겸양과 성찰의 의미일 터이다.
하지만 '爲'를 '여기다(謂)'로 읽는 일반적인 해석, 즉 "바다를 본 사람은 다른 물을 물로 여기기 어렵다"는 풀이 또한 그 자체로 큰 울림이 있다. 이것은 겸손보다는 '안목'의 변화를 강조한다. 시야가 넓어지고 기준이 높아졌기에, 이전에는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하찮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밖 세상을 보았을 때, 우물 안의 물은 더 이상 '세상의 전부인 물'이 아니라 그저 '좁은 웅덩이의 물'일 뿐이다. 거대한 경험은 기존의 가치 판단 기준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위계를 세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가지 해석이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다를 본 경험은 안목을 높여 (물로 여기기 어렵게 만들고), 높아진 안목은 함부로 이름을 붙이거나 단정 짓지 않는 겸손함(물을 말하기 어렵게 만드는)으로 이어진다. 인식의 변화는 언어의 신중함으로, 언어의 신중함은 다시 사유의 깊이로 연결되는 순환이다. '위수'라는 짧은 말 속에 '경험', '인식', '언어', '겸손', '안목'이라는 인문학의 거의 모든 화두가 압축되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날 어떤 '바다'를 보고 있으며, 어떤 '물'을 '물로 여기기 어렵다'거나 '물이라고 말하기 어려워하고' 있는가? 정보의 바다 속에서 단편적인 지식을 '앎'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시대? 무한 경쟁의 바다 속에서 작은 성취를 '성공'이라고 여기기 어려운 세상? 어쩌면 '관어해자난위수'는 끝없이 더 넓은 세상, 더 높은 경지를 향해 나아가되, 그 과정에서 마주하는 모든 '물'들에 대해 겸손함과 깊은 성찰의 시선을 잃지 말라는 오래된 지혜의 속삭임인지도 모른다.
바다를 보지 않고도 바다를 상상할 수 있다면, 작은 물 한 방울 속에서도 우주를 볼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또 다른 의미의 '관어해자'일 터. '난위수'는 어쩌면 타인을 향한 엄격한 잣대가 아니라, 나 자신의 '앎'과 '경험'과 '언어'에 대한 끝없는 성찰을 요구하는 질문인지도 모른다. 당신의 '바다'는 무엇이며, 오늘 당신이 '물로 여기기 어려운' 혹은 '물이라 말하기 어려운' 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