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손가락 끝이 스마트폰 화면 위를 스칠 때마다 남는 희미한 지문 자국. 우리는 그것을 닦아내며 익숙한 편리함 속으로 다시 뛰어든다. 하지만 문득 질문이 피어오른다. 이 지문은 단순한 흔적일까, 아니면 이 디지털 세상 속 ‘나’라는 존재의 유일한 증명일까? 그리고 우리는 이 쉼 없이 변화하는 세계 앞에서 과연 어떻게 ‘나’를 새기며 살아가야 할까? 옛 성현들은 이미 답을 주었다.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며, 통하면 오래간다.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변치 않는 지혜라고. 하지만 우리는 정말 ‘궁’해야만 ‘변’하는 걸까? 아니면 변해야 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과연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고 있는 것일까.
사유의 전개
생각해보면, ‘변한다’는 것은 우리 삶의 가장 원초적인 언어인지도 모른다. 아침 해가 지평선 너머로 몸을 숨기고, 계절이 옷을 갈아입듯, 세상 만물은 끊임없이 모습을 바꾼다. 어릴 적, 집안 어른이 들려주던 ‘궁하면 통한다’는 말은 얼핏 이해하기 어려웠다. 궁핍함 속에서 어떻게 ‘통’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제 안다. 주역의 가르침처럼, 궁한 상황이란 고착된 현
실에 균열이 생기는 순간이며, 바로 그 틈을 비집고 변화가 시작된다는 것을.
오늘날 우리의 ‘궁함’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는 막막함일 수도 있고, 빠르게 업데이트되는 기술 앞에서 느끼는 소외감일 수도 있다. 스마트폰의 ‘뒤로 가기’ 버튼처럼, 우리는 잠시 멈추고 싶지만 현실은 오히려 ‘앞으로 가라’고 등 떠민다. 마치 쉴 새 없이 변하는 알고리즘처럼, 우리의 삶 역시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끊임없이 재편되고 있다. 여기서 ‘변한다’는 것은 단순히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덧붙이는 ‘업데이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경계를 넘나들며 삶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디지로그(Digilog)’적인
사유에 가깝다.
우리는 스마트폰 화면에 지문을 남기지만, 동시에 흙먼지 묻은 손으로 식물을 만지며 생명의 기운을 느끼려 한다. 빠른 터치 대신 느린 쓰다듬음으로 관계를 확인하고, 수많은 데이터 속에서 잊힌 옛 노래의 한 구절을 그리워한다. ‘변해야 산다’는 말 앞에서, 우리는 두 가지 길을 마주한다. 하나는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에 빠르게 적응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하는 길. 다른 하나는 오히려 그 변화의 물결 속에서 변하지 않는 가치를 붙잡으려 애쓰는 길이다.
여기 역설이 있다. 가장 빨리 변하는 것을 가장 잘 안다고 자만하는 순간, 우리는 오히려 가장 본질적인 것에서 멀어진다. 반대로,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을 진리, 변하지 않을 사랑을 추구하는 마음이 우리를 ‘궁함’에서 건져내 ‘통함’으로 이끌기도 한다. 변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변하는 세상을 읽어내는 통찰, 그것이야말로 ‘궁즉변’의 또 다른 얼굴이다. 우리가 배달 앱의 ‘별점’과 ‘리뷰’에 울고 웃으며 관계를 맺듯, 수치화되고 객관화된 세상 속에서 우리는 더
욱더 ‘마음으로 통하는’ 방식을 갈망한다.
결론
결국 ‘변해야 산다’는 주역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주어진 절대적 명령이 아니라 영원한 질문이다. 어떻게 변해야 ‘궁함’을 넘어 ‘통함’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변한다’는 것은 과연 우리를 생존하게 하는 유일한 무기일까, 아니면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게 하는 위협일까?
우리가 스마트폰 화면에 남기는 지문처럼, 우리의 삶 또한 순간순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흔적들의 총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흔적들 속에서 ‘나’라는 존재의 고유한 무늬를 발견하고, 그 무늬를 통해 타인과 ‘통’하며, 시대를 ‘넘나드는’ 삶의 지혜를 발견해나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21세기, 변해야 사는 우리에게 던져진 가장 중요한 질문이 아닐까. 우리는 무엇을 닦아내고 무엇을 남기며 살아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