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00% 의존이라는 감옥
을은 갑에게 묶여 있다. 매출의 80%가 한 곳에서 나온다. 계약이 끊기면 회사가 문을 닫는다. 이 사실을 갑도 안다.
협상 테이블에서 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단가 인하 요구에도, 납기 단축 압박에도, 부당한 조건 변경에도. 거절할 수 없다.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협상은 선택의 게임이다. 그런데 을에게는 선택지가 하나뿐이다. 수용하거나, 수용하거나. 이것은 협상이 아니다. 항복이다. 갑은 을의 약점을 정확히 안다. "다른 데 가봐야 소용없어"라는 말 한마디면 끝이다. 을의 모든 저항이 무력화된다.
BATNA. Best Alternative To a Negotiated Agreement. 협상 결렬 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 이것이 없으면 을은 협상 테이블에 앉을 자격조차 없다. 대안은 떠날 용기를 만들고, 떠날 용기는 협상력을 만든다.
2. BATNA, 힘의 원천
BATNA의 본질은 자유다. 이 거래가 결렬되어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확신. 그 확신이 을의 목소리를 바꾼다.
갑의 부당한 요구 앞에서 을은 처음으로 "검토가 필요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 한마디가 가능한 이유는 단 하나다. 떠날 곳이 있기 때문이다.
100% 의존은 을을 인질로 만든다. 갑은 협상하지 않는다. 통보한다. 을은 저항하지 못한다. 수용한다. 이 구조에서 을의 전문성도, 품질도, 신뢰도 무의미하다. 갑이 "싫으면 나가"라고 말하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진다.
반대로 대안이 있는 을은 다르다. 갑의 제안이 BATNA보다 나쁘면 거절할 수 있다. 이 거절 가능성이 협상의 출발점이다. 갑도 안다. 이 을은 다르다는 것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것을. 대안의 존재 자체가 을의 위치를 바꾼다.
3. 대안 만들기의 3단계
대안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만들어야 한다. 그것도 전략적으로.
먼저 현재 상황을 진단한다. 냉정하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어느 정도 의존하고 있는가? 주요 거래처가 떠나면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 6개월인가, 3개월인가, 아니면 당장 다음 달 월급도 위태로운가? 숫자로 확인해야 한다. 감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 매출 구조, 수익 구조, 현금 흐름을 펼쳐놓고 봐야 한다. 의존도가 높을수록 협상력은 낮다. 이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첫 걸음이다.
그다음 대안 후보를 탐색한다. 떠날 곳을 찾아야 한다. 기존 거래처 외에 접촉 가능한 잠재 고객은 누구인가? 우리 제품이나 서비스가 필요한 다른 산업은 없는가? 규모를 줄이거나 방향을 바꿔서라도 살아남을 방법은 무엇인가? 완벽한 대안을 찾으려 하면 안 된다. 최악의 대안이라도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다. 월 매출 1억이 5천만 원으로 줄어도 회사가 유지된다면, 그것도 대안이다. 자존심을 버려야 한다. 생존이 먼저다.
마지막으로 대안을 구체화하고 실행한다. 후보를 찾았으면 움직여야 한다. 잠재 고객에게 연락한다. 샘플을 보낸다. 미팅을 잡는다. 소규모 테스트 계약이라도 따낸다. 대안은 머릿속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는 옵션이어야 한다. B사가 우리 제품에 관심이 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B사와 3개월 후 계약 체결을 목표로 협의 중이라는 '사실'이 필요하다. 이 사실이 을의 등을 펴게 한다.
4. 실전 로드맵: 지금 당장 시작하라
대안 구축은 시간이 걸린다. 위기가 터지고 나서 시작하면 늦다. 갑이 칼을 들이대는 순간, 을은 이미 선택지를 잃었다. 평시에 준비해야 한다.
고객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라. 한 곳에서 나오는 매출 비중을 60% 이하로 낮춰야 한다. 이상적으로는 40% 이하다. 주요 거래처 3곳이 각각 30%씩 차지하는 구조가 100% 의존보다 훨씬 안전하다.
정기적으로 시장을 탐색하라. 분기마다 새로운 잠재 고객 10곳 이상을 리스트업한다. 그중 3곳과는 실제로 접촉한다. 거래가 성사되지 않아도 괜찮다. 관계를 만들어두는 것 자체가 자산이다.
최악의 시나리오 플랜을 문서화하라. 주요 거래처가 내일 당장 계약을 파기한다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비용을 어디서 줄일 것인가? 어느 고객에게 먼저 연락할 것인가? 현금은 얼마나 버티는가? A4 용지 한 장에 정리해둔다. 이 문서가 있으면, 위기가 와도 패닉에 빠지지 않는다.
5. 이번 달부터 시작하라
대안 구축의 첫 과제는 간단하다. 이번 달 안에 잠재 고객 5곳의 연락처를 확보하고, 그중 1곳에 소개 이메일을 보내라. 계약을 따내려고 애쓸 필요 없다. "이런 회사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
떠날 수 없는 자는 협상할 수 없다. 대안이 없으면 을은 인질이다. 최악의 대안이라도 존재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 대안이 을에게 자유를 주고, 자유가 협상력을 만든다. 대안은 갑을 배신하는 도구가 아니다. 을이 당당하게 협상할 수 있게 만드는 방패다. 지금 당장 시작하라. 다음 달을 기다리지 마라. 위기가 터지기 전에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떠날 용기를 장착한 을만이 협상 테이블에서 살아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