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합의하는 게 어때?”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하지만 후배 성철은 단호했다.
“선배님. 제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그리고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인데, 제가 마치 가해자인 것처럼 합의를 해야만 할까요? 사회정의에 반한다고 봅니다.”
“음... 자네 마음은 알겠는데. 일단 상대방이 상처를 입었다고 진단서를 제출한 마당이니 우리에게 불리하다고 봐야 하거든.”
“전후 맥락을 따져보면 오히려 저쪽이 가해자잖아요!”
사회에서 알게 된 후배 이성철(가명 ; 32세)은 중소기업 자금부에서 근무하고 있는 아주 성실한 친구다.
아파트 5층에 거주하는 성철에게는 5살과 3살 된 두 아들이 있었다. 어느 일요일 저녁, 성철 부부는 애들만 남겨두고 시장에 다녀왔다. 집으로 들어서는데 대문이 열려있었고, 4층에 사는 김형래씨(45세; 가명)가 성철의 집에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닌가. 성철의 두 아들은 손을 들고 무릎을 꿇은 채 벌을 서고 있었다.
평소 4층에 사는 이가 정신적으로 문제있다고 해서 아파트 입주민들끼리 말이 많았는데 바로 그 사람이 자기 집에 들어와 있으니 성철은 가슴이 철렁했다. 성철이 김형래씨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지자 그는 “그냥 초인종 눌러보니 아이들이 문을 열어줘서 들어왔어요. 물 한잔 달라고 하는데 애들이 말을 안 들어서 야단 좀 치고 있었어요.”라면서 횡설수설하는 것이었다.
너무도 놀란 성철은 “어른도 없는 집에 왜 함부로 들어오세요?”라고 말하자 김형래씨는 “너도 나를 무시하는 거냐!”면서 주먹으로 성철을 때리려고 했다. 성철은 주먹을 피하려고 몸을 숙이면서 김형래씨를 밀쳤는데, 김형래씨는 밀려 넘어지면서 머리를 바닥에 부딪혔다.
김형래씨는 병원에서 전치 3주의 뇌진탕 진단서를 발급받은 다음 성철을 상해죄로 고소했고, 성철도 김형래씨를 상대로 주거침입죄로 맞고소를 했다,.
경찰 수사과정에서 경찰이 보더라도 김형래씨의 정신상태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을 했던지 성철에게 서로 원만히 합의하고, 쌍방 고소를 취하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을 것을 권유했고 성철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게 물어왔던 것이다. 나는 서로 합의하고 고소취하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줬다.
하지만 독실한 크리스쳔이면서 원칙주의자인 성철은 그런 식의 타협은 옳지 않다며 합의에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성철아. 네 마음은 알겠는데, 살다보면 말야, 그냥 피해가는 것이 좋은 경우도 있어. 꼭 무서워서 피하는 건 아니잖아.”
나는 성철을 달래보려 했지만 성철은 도저히 김형래씨와 적당히 합의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국 성철은 상해죄로 벌금 70만 원, 김형래씨는 주거침입죄로 벌금 100만 원의 형을 받고 사건은 마무리 되었다.
그로부터 1년쯤 지난 어느날 성철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선배님. 저 어떻게 하면 좋죠? 눈 앞이 캄캄합니다.”
성철이 다니던 회사는 대표이사의 무리한 투자로 인해 자금난에 시달렸고 결국 6개월 전에 부도처리 되었다. 성철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직장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던 끝에 어느 헤드헌터를 통해 독일계 회사인 Z사에서 자금부 담당 직원을 뽑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입사지원을 했다.
꽤나 경쟁률이 치열했지만 워낙 성실한 성철이었기에 서류심사를 무사히 통과하고 3차까지 이어진 면접도 마쳤다. Z사는 연봉도 예전 회사에 비해 거의 2배에 육박했고, 성철의 장기인 외국어 실력을 뽐낼 수 있는 곳이어서 여러 면에서 성철에게는 매력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터진 것은 제일 마지막 신원조회 단계.
회사는 성철에게 몇 가지를 확인하는 서류를 제출할 것을 요구했는데, 그 중에는 ‘형사적으로 처벌받은 사실이 있는지’를 물어보는 항목이 있었다. 사실 일반 사기업으로서는 어떤 사람이 형사처벌 받았는지 여부를 파악하기 어렵다. 따라서 성철은 거짓으로 대답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워낙 ‘바른생활 사나이’인 성철은 자신이 상해죄로 벌금 70만 원을 부과 받은 사실을 숨기기 싫었다. 성철은 자신이 벌금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전후 사정을 잘 설명하면 충분히 인사담당자를 납득시킬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하지만 막상 성철로부터 벌금 전과 사실을 통보받은 인사담당이사는 성철을 불러서 ‘우리 회사는 폭행이나 상해 전과자를 취업시킬 수는 없다. 미안하다.’고 통보했다는 것이다.
“선배님, 그 때 그냥 선배님 말씀대로 합의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정말 후회가 됩니다. 회사 측에 설명을 해서 취업이 되도록 할 방법이 없을까요? 면접까지 다 통과한 마당에 이렇게 되니 정말 억울합니다.”
가장(家長)이 6개월 째 월급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울 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도대체 이 난관을 어떻게 뚫어보나.
나는 일단 부딪혀 보기로 했다.
성철로부터 Z사 인사담당이사 전화번호를 넘겨 받은 다음 통화를 시도했다.
“저, 안00이사님 되시죠? 안녕하십니까. 저는 조우성 변호사라고 합니다. 이성철 군 문제와 관련해서 제가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안 이사는 차분하게 전화를 받았다. 나는 성철이 아주 억울하게 사건에 연루된 것이라는 점을 한참동안 설명했다. 내 설명을 다 듣고 난 안 이사는 이렇게 질문했다.
“실례지만 조 변호사님은 이성철씨와 어떤 사이신가요? 변호사와 의뢰인의 관계인가요?”
“아, 네. 변호사와 의뢰인의 관계라기 보다는 그냥 사회에서 알게 된 사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그 때 그 사건도 제가 정식으로 의뢰받아서 처리한 건은 아니고 지인으로서 상담을 해 준 것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자세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저희 회사 방침이 그렇다보니 이성철씨 건은 부정적인 답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외국계 회사이다보니 형사 전과 전력에 대해서는 엄격한 입장인 것 같았다. 일말의 기대를 갖고서 옆에서 지켜보던 성철은 이만 저만 낙담한 것이 아니었다. 다시 일자리를 알아보려면 최소한 몇 개월은 더 걸려야 할 텐데.
나는 성철이 건네 준 안 이사 명함에 있던 이메일 주소를 따로 메모했다. 그리고 그 날 밤. 안 이사에게 메일을 썼다.
“안 이사님. 아까 전화로 인사드린 조우성 변호사입니다. 갑자기 연락을 드렸음에도 친절하게 전화를 받아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성철군은 제가 아끼는 후배이기에 한 번만 더 부탁을 드리고자 메일을 씁니다. 번거롭게 해 드리는 것 같아 송구하지만 넓은 마음으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실 제가 사회에서 많은 이들을 만났지만 성철군은 참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 답지 않게 고지식하면서도 원칙을 지킬 줄 아는 중심잡힌 사람입니다.
이번에 문제가 된 형사사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건의 내용을 요약하지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아래층 사람이 성철 부부가 집에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올라와 5살, 3살 아이들을 위협하는 것을 발견한 성철군이 이에 항의하다가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성철군을 가해자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 형사절차상, 원인이야 어떻든 결과적으로 상처를 입은 사람이 피해자로 인정받는 다소 불합리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 사건에서도 아래층 사람이 성철군에게 밀려서 다치게 되자 진단서를 발급받아 고소를 했기 때문에 문제가 커졌습니다. 형사 문제가 비화되자 오히려 경찰에서는 서로 합의를 보고 종결하라고 권유했고, 저 역시 그것을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성철군은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 양심에 반하는 것이라고 했고, 결국은 벌금형을 받게 된 것입니다.
저는 성철군이 참 융통성이 없는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웬만한 사람이면 피해자와 적절히 타협하고 전과(前科)를 만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철군은 옳고 그름에 대한 주관이 뚜렷했기에 비록 자신이 벌금 전과자가 되더라도 부당한 타협은 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입니다.
이사님.
현재 귀사에서 뽑으려는 직원은 자금부 담당 직원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금부 담당 직원은 원칙과 규율을 지키며 오히려 쉽게 타협하지 않는 성격을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5년간 지켜본 성철군은 강력하게 추천해 드릴만한 인품과 실력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철군은 귀사에 취업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성철군과 별다른 이해관계가 없습니다. 제 친인척도 아닙니다. 취업을 도와달라는 위임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성철군의 사회 선배로서, 성철군 앞에 찾아 온 좋은 기회가 날아가 버릴 것을 두려워해서 이렇게 메일을 쓰게 되었습니다.
형사 사건과 관련된 더 자세한 이야기는 언제든지 제게 문의해 주시면 설명 드리겠습니다. 제 휴대폰 번호는 010-5472-xxxx입니다.
긴 메일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성철군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조 우 성 올림“
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이메일을 보냈다.
다음날, 안 이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한 번 만나자고 했다. 나는 그 날 오후 Z사에 가서 안 이사와 2시간 가량 면담을 했다. 나는 형사사건의 내용, 그리고 원인이야 어떻든 결과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형사사건 처리의 문제점, 내가 평소에 봐왔던 성철군의 모습 등을 최대한 담담하게 설명했다.
내 설명을 꼼꼼히 메모하면서 듣고 있던 안 이사는 내게 불쑥 이런 제안을 했다.
“조 변호사님, 그럼 만약 이성철씨가 우리 회사에 입사해서 문제를 일으킨다면 그에 대해서 일체 책임을 지겠다는 각서나 보증서 같은 거 한 장 쓰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신원보증서’ 같은 것을 의미하나 싶었다.
“네, 주십시오. 쓰겠습니다.”
그러자 안 이사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로부터 3일 후 성철이는 Z사에서 최종 입사허락통보를 받았다. 친인척도 아닌 사람이 메일도 보내고 직접 회사까지 찾아와 성철군을 옹호해 준 것을 높이 평가했고, ‘그 정도면 적어도 문제를 일으킬 사람은 아니다’라는 내부 평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야호! 둘은 서로 눈물을 글썽이며 축하했다.
그로부터 2달 후, 나는 안 이사의 전화를 받았다.
“조 변호사님. 이번에 저희 회사가 고문변호사를 한 분 두려고 하는데, 괜찮으시면 조 변호사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고문변호사 계약 조건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제가 지난번에 저희 CEO께 조 변호사님 말씀을 드렸는데, 저희 CEO께서 조 변호사님과 인연을 맺고 싶다고 하시는군요. 저희도 이성철씨처럼 열심히 변호해 주실 수 있죠?”
아. 이렇게도 일이 풀리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