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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태웅 Mar 11. 2022

국제맹(國際盲), 외교맹(外交盲)

한국 언론은 왜 국제뉴스를 잘 다루지 않을까?


단파방송밀청사건 


  성기석은 어릴 적부터 손재주가 좋았다. 1937년 스물두살때 경성방송국 기술부에 입사했다. 방송국에 들어간 뒤 조립도를 구해다 집에서 단파수신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단파는 전리층에서 반사돼 지구로 돌아와 지평선 너머 아주 먼 곳까지 방송을 실어 보낼 수 있다. 

 완성한 수신기 주파수를 이리저리 맞추던 성기석은 우연히 한국어로 나오는 방송을 듣고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경험을 하게 된다. 당시 중국의 임시수도였던 충칭(중경)의 충칭방송에서 내보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우리 말 방송이 잡힌 것이다. 우리 독립군의 항전과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잇단 패배를 알리는 독립투사들의 목소리였다. 그는 가슴이 말할 수 없이 울렁거렸다고 고백했다. 몇달동안 혼자 해외소식을 접하던 그는 기술부의 동료 이이덕에게 이 소식을 전했고, 방송국에 있던 단파수신기로 임정의 방송뿐 아니라 미국의 소리(VOA) 한국어 방송까지 함께 듣게 된다. 바로 곁에 있던 일본인 동료들의 눈을 피해가며 듣는 일은 몹시 위험했지만, 그들은 복음과도 같은 이 듣기를 멈출 수 없었다. 머지 않아 아나운서들과 편성원 등 방송국의 한국인 동료들 사이에 이 소식들이 퍼져나갔고, 이윽고 조직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했다. 편성PD 양재현, 방송작가 송남헌을 거쳐 동아일보 기자 출신 홍익범에 의해 이 해외 소식이 김병로, 송진우, 여운형, 허헌, 한설야 등 좌와 우의 지도자들에게로 전달됐다. 이것이 1942년말 단파방송밀청사건의 시말이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3684 

 불령한 해외 뉴스가 끊임없이 유통된다는 것을 눈치 챈 일제 경찰은 추적끝에 성기석, 이이덕 등이 단파방송을 몰래 듣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일경은 3백여명을 체포해 그중 75명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수신 내용을 독립운동가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던 홍익범은 끝까지 그들의 존재를 숨기다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결국 감옥에서 숨졌다. 이들에게 적용된 법령은 1941년 12월 26일에 제정 공포된 <조선 임시보안령>을 비롯하여 <사설 무선전신전화법>, <사설 방송용전화법>, <육군형법>, <해군형법>, <보안법 및 치안유지법> 등 무려 여섯 가지에 달했다. 

 제국주의 일본에게 있어 식민지의 해외 뉴스는 본질적으로 불령한 것이었다. 검열은 일상적으로 이뤄져 신문들은 납활자를 뒤집어 벽돌신문을 만들거나, 시간이 급하면 삭제된 기사를 비운 채로 발행했다.    

  

 

여전히 불령한 국제뉴스  


 성기석은 형기가 몇달 남은 1945년 8월15일 갑자기 석방된다. 감옥을 나와서야 그는 이유를 알게 된다. 일제가 패망했던 것이다. 이제 드디어 국제뉴스에 봄이 온 것일까? 불행히도 그렇지 못했다. 한국전쟁이후 들어선 군사정권 역시 국제뉴스를 몹시도 싫어했다. 집권의 정당성이 취약한 그만큼 통제되지 않은 자유로운 소식이 확산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던 것이다.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 보관된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에서 1979~1980년 한국 관련 기사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회도서관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도서관인 국립중앙도서관도 마찬가지다. 군사정권이 검열로 모조리 오려내거나 검정 칠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https://m.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1811010600075#c2b 


 국내신문도 마찬가지. 일제시대때와 구분하기 어려웠다. 검열의 칼날은 몹시도 매서웠고, 기관원은 신문사에 상주하며 지면을 도려냈다.  

 해외토픽  


 대신에 국제뉴스의 빈 자리를 채운 것은 ‘해외토픽’이었다. 해외 각국의 타블로이드 신문들이 올린 믿기 어려운 얘기들이 ‘해외 토픽’이란 이름으로 지면에 올랐다. 이런 식이었다. 


69년 해외토픽 베스트10 (조선일보 1969.12.21)

한날 결혼한 형제가 신방 바꿔들어 첫밤

23세의 아가씨가 손녀를 봐 할머니 되고

남편이 너무 사랑해준다고 이혼소송도

잉글랜드 여자 축구팀과 스코틀랜드 여자 축구팀은 런던에서 친선경기를 가졌는데…   


데일리메일 


 그리고 2022년. 일제도, 군사독재도 오래전에 사라진 대한민국에서 국제 뉴스는 마침내 제 자리를 찾았을까? 

 데일리메일은 지난해 한국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해외 매체다. 매일 평균 다섯 건의 데일리메일 인용기사가 한국의 매체 어딘가에 올랐다. 데일리메일은 표지에 헐벗은 여인의 사진이 자주 올라오는, 영국의 대표적인 타블로이드, 즉 옐로 페이퍼다. 데일리메일로 검색을 해보면 별다른 수고없이 이런 기사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조선일보

英데일리메일 "브렉시트 신경 쓰지 말자, 누구 다리가 더 예쁜가!"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3/29/2017032902243.html

'거부할 수 없는 기회였다' 전직 플레이보이 모델, 왜 란제리 찢고 심판 유니폼 입었나

https://www.chosun.com/sports/sports_photo/2022/02/08/LNEUSUQM2C67HN6LCQE5RRZ56Y/

“분위기가 중요하니까”…원숭이 짝짓기 도우려 가수 부른 英동물원

https://www.chosun.com/international/topic/2022/02/12/N6CW76CVBNGTHCUCNALPLJQ2DY/

 

중앙일보

스테이크 한 조각 때문에…美뷔페서 40명 뒤엉켜 난투극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45040

"코로나 무서워요" 이 스트레스로 대머리 된 8살 여아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11965

 

동아일보

“사랑해” 여친 신장 떼줘 살려놨더니…총각파티서 바람난 남친

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220125/111430613/1

키스하는 커플 건드렸다가 반격에 기억상실…法 “정당방위”

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210429/106677191/2 


최근의 압권은 아마도 이 기사일 것이다.  

태권도 前챔피언, AZ 맞은 후 다리 절단… “붓더니 다리 폭발”

https://www.chosun.com/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2021/05/09/VWUPYOTJ5BFN7CVNYEWYSEKZCQ/ 

 전 태권도 챔피언이 백신을 맞은 뒤 다리가 폭발을 했다는 내용이다. 데일리스타, 데일리메일 등을 인용했다. 데일리스타 역시 타블로이드, 이렇게 생긴 옐로페이퍼다. 

그런데 이 기사는 데일리스타나 데일리메일이 직접 취재한 내용이 아니다. 영국의 스탬퍼드라는 지방의 스탬퍼드머큐리(https://www.stamfordmercury.co.uk)라는 지방지를 인용한 것이다. 스탬퍼드는 런던과 맨체스터 사이의 작은 면쯤 되는 곳이다.  

스탬퍼드머큐리를 찾아가 원래 글을 보면 내용이 사뭇 다르다. 우리 동네에 사는 전 태권도 선수가 당뇨병을 앓고 있다가 백신을 맞은 뒤 당뇨가 악화돼 다리를 절단하게 됐으니 이 사람을 돕자는 취지의 기사다. 기사가 나간 뒤 몇백만 원을 모금해 전달했다. 이것이 데일리스타와 데일리메일이라는 선정적인 매체를 거쳐 과장되더니 급기야 한국에 있는 조선일보에 와서는 ‘폭발사고’로 둔갑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뉴스도 있다. 지난해 6월 한국경제, 중앙일보, 매일경제, 머니투데이 등 최소한 12개 언론사가 크게 보도했다.  

SBS가 현지 취재를 했다.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https://factchecker.or.kr/fc_subjects/100

SBS는 한국 언론이 인용한 가나 매체가 공신력이 떨어지고 주로 ‘가십’을 다루는 인터넷 매체라는 점을 조명했다. 그 매체가 쓴 사진도 다른 사건의 사진이었다. 150억이라는 숫자도 터무니 없다. 현지 인터넷 매체는 ‘계좌에 돈이 있었다’고만 적었다. 한국 언론이 이를 ‘8년동안 인육 케밥으로 번 돈’이라고 옮겼다. “8년간 인육으로 케밥 만들어 150억번 녀... 경악”(스포츠경향) “인육으로 케밥 만들어 판 30대녀... 8년간 150만원 벌어”(MBN) “남성 아이 살해해 그릴 위에...인육으로 케밥 만들어 150억번 30대녀”(세계일보)…  

 인육기사가 처음도 아니다. 2015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오보가 알려진 뒤 지우는 일도 하지 않는다. 지금도 검색해보면 줄줄이 나타난다.   


외교적 표현  


 '외교적 표현'이란게 있다. 외교는 국가 대 국가간의 일이다. 개인끼리의 대화와는 다르다. 상대를 놀라게 하거나 당혹하게 해선 안되고, 경계심을 갖게 하거나 불편하게 해서도 안된다. 나라를 대표해 하는 말이라 한번 말을 뱉으면 무를 수도 없다. 무엇이든 ‘공식적인’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외교적 표현이다.  


 ‘회담이 솔직하고 정중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면 회담이 결렬됐다는 뜻이다. ‘유익한 회의였다’면 성과가 없었다는 얘기다. ‘관심을 갖고 지켜본다’는 꽤 부드러운 표현처럼 들리지만 그렇지 않다. 결과에 따라 강경한 노선을 취하겠다는 뜻이다. ‘입장을 신중히 재검토하겠다’는 외교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강경한 노선을 취할 수 있다는 의미다. ‘자국 정부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은 국교 단절까지도 선택지에 넣고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강경한 의미를 이런 부드러운 표현에 담는 것은 최대한 후유증을 줄이기 위해서다. 강하기만 한 표현은 스스로 퇴로를 끊는 어리석은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가 아는 표현법으로 속 마음은 전달하되, 언제나 퇴로를 유지하는 것이 외교다.  

 

 Yes or No?  


 올해초 기아차 소하리 공장에서 열린 이재명 후보 기자회견에서 김은중 조선일보 기자는 이 후보에게 “미·중 갈등 관련해서 실용주의 외교 이런 말씀 해주셨는데, 지금 미국 주도로 하는 공급망 재편 관련해 후보님께서는 미국이 주도하는 안보협의체 쿼드나 아니면 통상협의체 인도 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 이런 거에 우리나라가 가입해야 한다고 보시는지. YES or NO로 말씀해주실 수 있는지 부탁드린다”고 질문했다. 이어 “대통령이 되시면 바이든 대통령이나 시진핑 주석 중에 누구를 먼저 만나실 생각이신지?”도 물었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1561

지난해말 주한미상공회의소 간담회에서 윤석열 당시 후보는 “현 정부 들어 중국 편향 정책을 들고 미·중 간 중간자 역할을 한다고 했지만 결과는 나쁜 것으로 끝났다”며 “한국 국민, 특히 청년 대부분은 중국을 싫어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국 사람들, 중국 청년들 대부분이 한국을 싫어한다”며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https://m.khan.co.kr/politics/election/article/202112282056005#c2b

 외교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나오지 못했을 질문이고, 하지 못했을 말이다. 윤 후보쪽에서 나중에 중국대사관쪽에 따로 해명을 했다는 말도 있다. 이런 공개 발언은 적어도 외교적으로는 ‘참사’에 가깝다. 


국제맹, 외교맹 


 대한민국은 세계최고의 후발추격국이다. 맹렬한 속도로 선진국이 됐지만, 그만큼 빠트린 것, 건너뛴 것이 많다. 국제뉴스 그리고 외교에 대한 무지는 그런 빠트린 것중의 하나다. 세계는 전에 없이 연결돼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세계 각국의 증시가 출렁이고, 식량 수입이 많은 나라는 벌써 기근을 걱정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모두 전세계 농업과 식량생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다(우크라이나는 별명부터가 유럽의 빵공장이다), 비료 생산의 핵심 성분인 탄산칼륨과 인산염도 러시아에서 대규모로 생산되기 때문이다. 유럽 식량 생산에 필요한 핵심 비료성분의 1/4이 러시아산이다. 

https://www.bbc.com/korean/international-60643439 


 한국의 주변엔 중국과 일본, 러시아가 있고, 위에는 북한이 있다. 국방력이 전세계 6위라고 하지만, 동네에선 4위, 북한을 빼면 꼴찌다. 우리나라 수출대상국의 1, 2위는 중국과 미국인데, 이 둘은 지금 세계의 패권을 놓고 다투는 앙숙이다. 한국은 외교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다. 수출입이 전체 GDP의 절반이상을 차지하는 전형적인 무역국이기도 하다. 그만큼 국제뉴스를 모르고선 살아가기가 힘들다. 그런 사회가 실제로는 국제맹, 외교맹에 가깝다.  이것이 또 하나의 '경로의 저주'(https://brunch.co.kr/@brunchgpjz/20)일지, 수습기자때부터 '해외토픽'으로만 국제뉴스를 배운 사람들의 한계일지 혹은 그 둘이 합해서 이룬 결과일지 모르겠다. 한국의 언론은 국제뉴스의 재난지역이다. 우리는 더 나은 국제뉴스를 볼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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