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베를린에서>

인간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다

by 김현정

노래도, 춤도, 심지어 배움마저 금지된 세계가 있다. 결혼식이 끝나면 곧장 머리를 밀고, 머리카락은 평생 감춰야 한다. 외간 남자의 눈길을 끌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결혼한 여자는 남편을 하늘처럼 섬기고, 아이는 되도록 많이, 적어도 다섯은 낳아야 한다.


믿기 어렵지만, 지금 현재, 뉴욕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그리고, 베를린에서>는 하시디즘 공동체(초정통파 유대교 집단)의 일상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총 네 편으로 구성된 이 드라마를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욕망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나는 정말로 나의 욕망대로 살고 있는 건지, 아니면 이 사회가 제안한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착각하며 살아가는 건지.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이 드라마의 배경은 브루클린의 윌리엄스버그다. 뉴욕의 심장이라 불리는 맨해튼의 마천루에서 지하철로 불과 30분 떨어진 곳이지만, 그곳의 시계는 거꾸로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남자들은 머리에 손바닥만 한 동그란 모자 카파를 쓴 채 유대교 경전과 탈무드 공부에 일생을 바친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여자들은 홀로코스트로 희생된 육백만 유대인을 복원한다는 사명 아래 오직 임신과 출산에 사활을 건다.


현대를 살아가는 시청자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들의 욕망은 상당히 이질적이다. 그러나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는 폐쇄적인 세계에서 나고 자란 그들은, 오직 공동체가 허락한 것들만을 욕망하도록 길들어 있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언어를 빌리자면, ‘하시디즘 공동체’라는 하나의 상징계가 인정하는 욕망이 곧 ‘대타자의 욕망’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 욕망이 그곳에서 살아가는 구성원들의 삶 전체를 통제한다.


image.png 여주인공 에스티의 결혼식 장면.


주인공 에스티 역시 사회의 요구에 자신을 끼워 맞추기 위해 애쓴다. 억압적인 환경이 부담스러운 듯 그녀의 눈길은 내내 불안하게 흔들리지만, ‘이상적인 여성’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십 대의 나이에 가족이 정해준 남자와 결혼하고, 아이를 갖기 위해 몰래 배우던 피아노도 포기한다.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결혼한 즉시 임신하고 출산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적 압박 속에서 그녀는 좌절한다.


마침내 임신을 확인한 순간, 남편은 임신 사실을 모른 채 이혼을 통보한다. 그녀가 다른 여자들과 달리 쉽게 임신하지 못한다는 게 이유였다. 공동체가 요구하는 욕망에 부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결국 버림받고 말았던 셈이다. 에스티는 결국 무너진다. 모두가 고대 율법이라는 공통된 규범에 따라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갈 것을 강요하는 사회에 진절머리가 난 에스티는 베를린으로 탈출한다.


물론 베를린에도 규칙은 있다. 그러나 그 규칙은 모두에게 똑같이 살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기혼 여성도 머리카락을 드러낼 수 있고, 동성 커플은 거리에서 자유롭게 키스한다.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옷을 벗고 호수에서 즐겁게 수영한다. 그곳에서는, 그 누구도 에스티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명령하지 않는다. 그곳 베를린에서는, 열아홉 해 동안 에스티의 삶을 옥죄었던 상징계가 위력을 잃고 말았다.


에스티는 그곳에서 그동안 자신을 옭아맸던 공포의 실체를 확인한다. 율법에 따라 금지된 음식인 햄을 한 입 베어 문 에스티는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가게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 순간, 그녀는 깨닫는다. 자신이 믿어 온 절대 규칙이 어쩌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베를린에서 만난 한 친구가 에스티에게 묻는다. “왜 공동체를 떠났어?” 에스티는 짧게 답한다. “하느님이 너무 많은 걸 기대하셔서.” 이 짧은 대답 속에 ‘하느님’의 이름으로 모두를 통제하는 하시디즘 공동체에서 에스티가 감당했던 고통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람들은 대개 사회가 인정하는 욕망에 기꺼이 동조하며 살아간다. 반대로,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은 부적응자로 낙인찍힌다. 하시디즘 공동체 안에서 에스티는 실패자이자 낙오자였다. 그러나 베를린에서 그녀는 온몸을 가리는 답답한 옷과 가발을 벗어 던지고, 원하는 사람과 어울리고 낯선 사람들 앞에서 마음껏 노래한다. 주어진 세계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어울리는 새로운 세상을 선택한 셈이다.


<그리고, 베를린에서>는 특정 종교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이 드라마가 던지는 질문은 결국 우리 모두에게 적용된다. 우리는 각자의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며, 그 안에서 무엇을 원해도 되는지 끊임없이 배우고 익힌다. 좋은 직장, 안정된 삶 같은 기준 역시 대개 정해져 있다. 우리는 사회가 허락한 욕망이 내 것이라고 맹신하며 살아갈 뿐 좀처럼 묻지 않는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이 정말 나의 선택인지, 아니면 세상이 옳다고 하는 답을 따르는 것인지.


에스티는 그 질문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욕망을 벗어던지는 쪽을 택했다. 어쩌면 우리에게도 그런 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대타자에 의해 강요된 욕망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욕망을 좇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베를린에서 #하디시즘 #넷플릭스 #라캉 #대타자

매거진의 이전글고통과 죄책감의 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