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진진한 Hi Fi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의 산문집에는 삿포로 맥주와 굴튀김을 먹으면서 Coleman Hawkins의 음악을 듣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길지 않은 문장이지만 여기에 일본 보통 사람의 삶이 녹아있지 않나 싶습니다. 당장 가까운 편의점에만 가도 알 수 있듯이 일본에는 기린, 아사히, 그리고 산토리라는 브랜드에서 각각 자기 브랜드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맥주가 있죠. 그러면서 우리나라와는 달리 정말 재즈를 많이 듣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소설가로 유명해지기 전에 재즈 바를 운영했던 적이 있었죠. 그 재즈 바의 문 앞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1960년대 이전의 재즈만 틉니다."
글ㅣ한지훈 (오디오 칼럼니스트)
이러다 보니 재미있는 일도 벌어지고 있는데요. 일본에는 에소테릭과 아큐페이즈라는 유명 오디오 전문 기업이 있습니다. 아큐페이즈는 앰프와 CD 플레이어, 심지어는 이퀄라이저까지 만드는 오디오의 백화점 같은 기업이라면 에소테릭은 일본의 정밀 기술을 바탕으로 스위스의 CH Precision이나 영국의 dCS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CD 플레이어를 제조하는 기업인데요. 이렇듯 전세계적으로 각자 자기 분야에서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기업이지만 정작 일본에서는 그리 많이 판매되지 않습니다. 바로 재즈를 좋아하는 일본인의 성향 때문입니다.
이어령 박사는 "축소 지향의 일본인"이라는 책을 썼지만 저는 "과거 지향의 일본인"이라는 말도 어울리지 않나 생각하는데요. 일본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교토는 지금도 천 년 전의 모습을 간직한 듯 하고, 재작년에 제가 갔던 호텔에선 우리나라에선 인사동에서 골동품으로 팔릴 만한 기계식 다이얼 전화기가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는 오디오 분야도 마찬가지인데요. 일본의 버블 경제 시절에 전 세계 웨스턴 일렉트릭 오디오의 95%가 일본에 흘러 들어갔다는 말이 있었고(지금은 그 오디오들이 우리나라를 거쳐 중국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습니다. 필자 주), 지금도 상태 좋은 빈티지 오디오를 구하려면 미국이나 영국, 독일이 아니라 일본에 가야 합니다. 제 지인 중에는 방금 박스를 뜯은 것 같은 마란츠 1과 마란츠 2, 그리고 탄노이 실버 12인치 스피커를 가지고 계신 분이 있으신데요. 50년이 넘는 세월을 타임 워프한 듯한 그 물건들은 미국과 영국이 아니라 일본에서 건너온 물건이었습니다.
그럼 일본사람들은 왜 빈티지 오디오를 좋아하는 것일까요? 간단합니다. 그 빈티지 오디오의 리즈 시절에 유행했던 음악, 즉 재즈를 재즈답게 듣기 위해서입니다. 요즘의 스피커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대구경 우퍼와 대구경 혼에서 만들어지는 소리는 아무리 비싼 하이엔드 오디오 시스템이라고 해도 만들 수 없는 소리이기 때문이죠. 소리의 해상도? 정위감? 밀도감? 스테이징? 이런 오디오 평가 항목으로 접근하자면 1억 원이 우습게 넘는 빈티지 스피커조차 요즘의 50만 원짜리 블루투스 스피커만도 못합니다. 하지만 재즈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듣는 음악이 아닙니다. 가슴으로 느끼는 음악이죠. 그렇기에 지금도 일본의 재즈바에선 JBL 스피커나 알텍 스피커가 대세입니다.
소프트웨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퓨전 재즈의 양대 산맥으로 카시오페아와 티 스퀘어가 건재하지만 이들 이전에도 츠요시 야마모토를 비롯하여 아야코 호소가와, 마사루 이마다, 이사오 스즈키, 쇼지 요코우치, 이시하라 에리코 등의 재즈 뮤지션들이 있었죠. 이들은 1970~1980년대 뮤지션 아니냐고요?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현역이 있습니다. 바로 비너스 레코드의 소속 뮤지션들입니다.
하라 테츠오가 토드 바칸을 만나며 만든 재즈 전문 레이블인 비너스 레코드의 앨범은 두 가지 때문에 놀라게 되는데요. 흑백 사진에 헐벗은 여성, 심지어는 여성의 누드 사진을 전면에 내세우기도 한 앨범 커버는 앨범 커버라기보다는 선데이 서울에 들어있던 브로마이드 사진에 가까울 정도로 야해서 한 번 놀라게 되고 그렇게 야한 커버를 내세우며 만든 앨범이라 하기에는 연주나 편곡이 너무 좋고, 음질은 음질의 상징인 ECM 레이블 부럽지 않은 수준이기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됩니다. 특히 SACD 음반에 소극적인 ECM에 비해 300종이 넘는 타이틀을 발표할 정도로 SACD에 적극적인 점도 비너스 레코드의 장점이죠.
제가 비너스 레코드의 음악을 처음 들은 건 삼성동에 있는 대단히 비싼 호텔의 커피숍에서였습니다. 저 같은 서민에게 그런 호텔 커피숍은 10년에 한 번 갈까 말까 하는 그런 곳이었는데 약속이 있어서 가게 되었죠. 그런데 그 곳에서 현미 선생님의 '밤안개'가 흘러나오는 겁니다. "요즘에 이런 호텔에서 현미 선생님 음악도 나오나?"하며 의아해하고 있었는데 반주만 나오고 노래가 나오지 않는 겁니다. 나중에 지배인에게 물어보니 Eddie Higgins Quartet의 'It's A Lonesome Old Town' 이라고 하더군요. Eddie Higgins는 비너스 레코드의 대표 뮤지션이었습니다.
Eddie Higgins - It's A Lonesome Old Town
이렇듯 비너스 레코드는 창작곡보다는 재즈 스탠더드 넘버의 곡을 아주 편하게 감상할 수 있게 편곡해서 앨범을 만듭니다. 하지만 그 편안한 음악은 일본 특유의 엄청난 음질로 포장되어 많은 사람들을 반하게 하죠. 오디오 전문 기업인 에소테릭은 자신들의 스튜디오가 있어 SACD를 발매하고 있고, 일본의 타워 레코드 역시 마찬가지죠.
이들의 실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Keith Jarrett의 대표 앨범인 [The Koln Concert] 앨범인데요. 키스 재릿의 대표 앨범을 넘어서 ECM을 상징하는 앨범을 한 장만 꼽으라고 해도 수많은 사람들이 꼽을 바로 이 앨범을 리마스터링해서 SACD로 만든 건 ECM의 고향이자 고음질의 상징인 도이치 그라모폰의 나라 독일이 아니라 일본의 타워 레코드였습니다. 물론 음질이라는 게 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달라 제각기 생각이 다를 수 있겠지만 제 생각에 전 세계에서 리마스터링을 가장 잘하는 나라는 미국이나 영국, 독일이 아니라 일본입니다. 그리고 비너스 레코드는 그런 일본을 상징하는 재즈 전문 레이블이죠.
Keith Jarrett [The Koln Concert]
비너스 레코드의 또 다른 장점으로는 신인의 발굴입니다. Eddie Higgins Quartet을 필두로 Enrico Rava, Steve Kuhn Trio, Stefano Bollani Trio, Bill Charlap Trio, Simone Kopmajer, Nicki Parrott, Richie Beirach 등등 Eddie Higgins나 Enrico Rava 정도를 제외하고는 다들 무명에 가까웠던 뮤지션들을 세계적인 아티스트로 키워낸 레이블이 바로 비너스 레코드죠.
물론 비너스 레이블에 관한 비판도 존재합니다. 선정적인 앨범 커버(그래서인지 요즘에는 여자 사진이 안 들어간 앨범 커버가 주를 이룹니다. 필자 주)와 다들 너무 똑같은 음악 스타일이 비판의 이유죠. 실제로 Eddie Higgins의 음악을 예로 들자면 이 앨범에 들어있는 곡을 저 앨범에 넣고, 저 앨범에 들어있는 곡을 이 앨범으로 옮겨도 전혀 위화감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 두 앨범만 듣다 보면 이 앨범이 저 앨범 같고 저 앨범이 이 앨범 같죠. 하지만 어떤 앨범을 들어도 편안하게 들을 수 있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장비에 조금만 돈을 써도 돈 쓴 보람을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레이블이 바로 비너스 레코드이란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스트리밍이 대세인 시대이고 LP가 붐을 이루다 보니 요즘 가수들이 새 앨범을 낼 때에는 CD를 찍을까 말까 고민을 많이 합니다. 심지어 현역 가수인 한 친구는 "요즘 CD 찍는 거는 팔려고 찍는 게 아니라 홍보용으로 돌리기 위해 찍는 거잖아요?"라는 자조 섞인 말도 했었죠. D/A 컨버터의 성능이 좋아지면서 가격은 저렴해지고, 네트워크 환경이 좋아지다 보니 예전부터 음악을 좋아했던 분은 LP를 사고, 그냥 음악이 좋은 분은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해서 음악을 듣다 보니 상대적으로 CD는 외면 받게 된 게 사실입니다. 심지어 지금 세 번째 오디오 책을 쓰고 있고, 몇 년째 멜론에 기고를 하고 있는 저조차도 일 때문이 아닌 편하게 음악을 들을 때에는 스트리밍 서비스로 음악을 들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CD를 사야 한다면 저는 ECM과 비너스 레코드의 CD를 사라고 합니다. 누가 들어도 후회 없을 선택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