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월간 신문과 방송에 기고한 글입니다.
<듣똑라(듣다 보면 똑똑해지는 라이프>)는 중앙일보 20~30대 기자들이 직접 기획·제작·진행하는 팟캐스트다. 기자들이 ‘사이드 프로젝트’로 시작했던 이 방송은, 청취자가 늘면서 올해 초 회사 내에서 정식 서비스가 됐다. 전체 청취자의 80%가 밀레니얼 세대이며, 콘텐츠도 밀레니얼 세대가 관심 있는 시사뉴스, 커리어, 라이프 스타일에 초점을 맞춰 제작하고 있다. 정식 론칭 후 두 달 만에 애플 팟캐스트 1위를 달성했고, 현재는 뉴스레터, 유튜브 등으로 채널을 확장 중이다.
좋아서 시작한 프로젝트
“<듣똑라>는 왜 ‘팟캐스트’로 시작했나?”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듣똑라>의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처음 시작은 2015년 <청춘 라디오>였다. 중앙일보 장기 기획으로 2030 세대의 삶에 주목한 <청춘리포트>라는 코너가 있었다. 당시 이 기획을 주도했던 정강현 기자(현 JTBC 정치부 기자)는 <청춘리포트>를 쓴 기자들과 취재 후일담을 나누는 팟캐스트를 제작했고, 그게 <듣똑라>의 전신인 <청춘 라디오>다. 2년 가까이 이어진 <청춘리포트>는 기자들의 인사이동으로 막을 내렸지만, 팟캐스트는 계속됐다.
팟캐스트라는 뉴미디어에 흥미가 있던 몇몇 기자들이 ‘사이드 프로젝트’로 방송을 이어간 것이다. 회사 일이 아니기 때문에 쉬는 날인 토요일에 나와서 방송을 만들었는데, 나는 채윤경, 정선언 기자가 이어오던 방송에 2017년 초 합류했다. 2년 넘게 쉬는 날에 출근하며 이 프로젝트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어떤 갈증 때문이었다. 현장에서 취재하다 보면 취재한 내용을 기사에 다 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정해진 분량이 있다 보니 아쉽게 취재 수첩 속에 묵혀 두거나, 현장에서 느꼈던 감정이나 의견을 자유롭게 담아내기에는 ‘기사’라는 형식이 발목을 잡았다. 이때 팟캐스트가 숨통을 터줬다.
팟캐스트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오디오 콘텐츠를 만드는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취재 경력은 10년 차 내외인 프로였다. 기사에 담지 못한 취재 내용을 방송에서 충분히 풀어내면서 만족감과 보람을 느꼈다. 무엇보다 팟캐스트는 제작이 쉬웠다. 초기에는 편집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녹음하고 업로드하면 완성이었다. 스튜디오 사용료만 들어가니 제작비 부담도 덜했다. 목소리만 나오는 오디오 콘텐츠는 방송에 익숙하지 않은 기자가 시도하기에 큰 장벽이 없을 만큼 제작이 간단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2년 넘게 방송을 이어올 수 있었다.
밀레니얼이 듣는 콘텐츠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지만, 홍보 한 번 한 적 없는데 조금씩 청취자가 늘기 시작했다. 취재 뒷이야기가 궁금한 사람들, 무의미한 수다보다 시사 정보가 꽉 찬 방송을 듣고 싶은 사람들, 기존 뉴스보다 자유로운 형식의 뉴스를 원하는 사람들, 특히 기자들과 동년배인 밀레니얼 세대, 2030 세대가 방송을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때 방송명도 <듣똑라>로 바꿨다. 2017년 하반기였다. 오디오 콘텐츠는 묘한 매력이 있다. 제작자와 독자의 거리가 굉장히 가깝다. 오랫동안 애청한 라디오 프로그램의 DJ를 심정적으로 친밀하게 느끼듯, 팟캐스트 진행자와 청취자의 관계도 비슷하다. 진행자의 목소리가 이어폰을 통해 귀에 바로 꽂히니, 더욱 긴밀하게 청취자와 연결된다.
무엇보다 라디오와 달리 정해진 분량이나 형식, 지켜야 할 규칙이 없다. 날 것의 매력이 있다고 할까. 요즘 유튜브에서 주목받는 브이로그 콘텐츠들이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처럼 팟캐스트는 오디오로 그것을 구현할 수 있었다. 20~30대 청취자들이 <듣똑라>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은 경계가 없는 자유로운 형식의 역할이 컸다.
<듣똑라>가 회사의 정식 뉴스 서비스가 된 것은 올해 초다. 회사 내 다양한 뉴스 서비스를 실험하는 ‘디지털뉴스 랩’ 산하에서 우리는 <듣똑라>를 피보팅(pivoting)하기로 결정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남고, 이지상 기자와 홍상지 기자가 새로 합류했다. 이지상 기자는 정치부에, 홍상지 기자는 사회부에, 나는 문화부에서 오래 근무했기 때문에 세 사람은 각자의 전문성을 살려서 <듣똑라>를 발전시켜나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독자의 니즈를 찾다
우리는 젊은 기자의 시각에서 자유분방하게 콘텐츠를 만들었던 초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질적·양적으로 독자들의 지적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뉴스 서비스를 만들고 싶었다. 우리는 먼저 ‘밀레니얼을 위한 시사교양 토크쇼’, ‘밀레니얼의 시사 친구’라는 문장으로 <듣똑라>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기로 했다. 서비스를 본격 론칭하면서 타깃을 조사한 결과 청취자의 80%가 20~30대라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독자가 누구인지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우리는 더 뾰족하게 밀레니얼 세대를 위한 새로운 뉴스 서비스를 만들기로 했다. 이를 위해 우리가 추구했던 것을 다섯 가지 키워드로 정리했다.
1. 뉴스와 지식 사이
밀레니얼 세대는 누구보다 자기 계발과 지적 성장의 욕구가 강한 세대다. 새로운 이슈가 등장하면, 이 사안을 깊이 알고 싶어 하고, 더 나아가 자기만의 관점을 갖고 싶어 한다. 하지만 포털사이트에 단발적으로 쏟아지는 속보 중심의 뉴스는 이런 욕구를 충족시키기 어려웠다. 우리는 독자들의 이런 니즈에 집중했다. 브렉시트가 논란이면, 브렉시트의 역사, 맥락, 의미 등을 총정리한 ‘브렉시트의 거의 모든 것’이라는 방송을 만들었고, 전당대회가 있으면 한국 정당사의 맥락 속에서 전당대회를 조명하는 방송을 만들었다.
시의성 있는 뉴스에, 맥락을 더한 콘텐츠, 그러니까 뉴스와 지식 사이를 지향했다. 제작자 입장에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깊이와 재미를 잡으며 지적 대화를 나누기에 팟캐스트는 매우 좋은 채널이었다. (그리고 이미 <지대넓얕(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얇은 지식)>이라는 매우 성공한 지식 팟캐스트 사례도 있었다.) 실제로 이런 방송들은 청취자들에게 좋은 피드백을 받았다. 지적 욕구를 해갈하고 효능감을 느끼는 데 도움이 됐다는 반응이 많았다.
2. 온디맨드(On-Demand) 뉴스
밀레니얼 세대는 크라우드 펀딩이 익숙한 적극적인 소비자다. 제품이나 서비스의 제작 과정에 참여하는 걸 자연스럽게 여긴다. 우리는 시사 콘텐츠에도 그것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다. 청취자가 요청하는 뉴스를 제작하는 것이다. 일명 온디맨드 뉴스. 우리는 청취자가 제작자에게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다양한 창구를 만들었고, 거기에 올라오는 요청사항에 귀를 기울였다.
청취자의 댓글이 기자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취재의 실마리가 된 셈이다. 예를 들어 “미·중 무역전쟁에 대해서 다뤄주세요”, “홍콩 시위의 배경이 무엇인지 콘텐츠로 만들어주세요”라는 댓글이 달리면, 우리는 해당 주제를 직접 취재하거나, 이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중앙일보·JTBC 동료 기자 혹은 외부 전문가를 섭외한다. 콘텐츠가 나간 후에도 피드백을 유심히 살펴보고, 추가 콘텐츠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또 제작한다. 모든 콘텐츠를 이런 방식으로 제작하는 것은 아니지만, <듣똑라>의 많은 콘텐츠가 이런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진다. 한 사람의 독자를 만족시키는 것에서 독자와의 연결은 시작된다고 믿는다.
3. 임파워링(empowering)이 필요하다
올해 들어 <듣똑라>는 인터뷰 코너를 신설했다. 커리어 고민이 많은 젊은 세대에게 동기부여와 자극이 될 수 있는 롤모델을 초대해 두 시간가량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임팩트 투자사 옐로우독의 제현주 대표, 콘텐츠 플랫폼 퍼블리의 박소령 대표, 인공위성 권위자인 황정아 한국천문연구원 책임연구원, 월드바리스타챔피언십 우승자인 전주연 바리스타, 원밀리언 댄스 스튜디오 리아 킴 안무가 등이 <듣똑라> 스튜디오를 방문했다.
현장에서 자신만의 독보적인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는 분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마음을 움직인다. 많은 청취자가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직접 SNS에 올리고 추천하면서 자연스럽게 바이럴이 됐고, 인터뷰는 <듣똑라>의 대표 콘텐츠가 됐다. 사실 기자들에게 인터뷰는 일상이다. 취재기자로 근무할 때 쌓았던 인터뷰 노하우(인터뷰이에 대한 사전 취재, 질문을 뽑고, 현장에서 순발력 있게 진행하는 법 등)가 발휘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4. 불편하지 않은 뉴스
밀레니얼 세대가 점점 올드 미디어와 멀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단 채널의 문제일까? 나는 청취자들의 피드백을 통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청취자들은 기존의 많은 뉴스가 ‘가르치려 든다’, ‘젠더 감수성이 떨어진다’, ‘차별적인 언어를 문제의식 없이 사용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니까 ‘불편하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의 밀레니얼 세대는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지적 수준, 높은 인권 의식, 성평등 의식이 있고, 다양성을 추구한다. 젠더, 환경, 동물의 권리 등에 관심이 많다.
젊은 세대의 기호나 취향, 의식 수준은 정말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기존의 많은 뉴스가 이런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듣똑라>를 정식 서비스로 내보내면서 우리는 교조적인 태도를 지양하고,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지 않도록, 그러니까 ‘말이 칼이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자고 다짐했다. 물론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공부와 노력이 필요하다. “<듣똑라>는 불편하지 않아서 좋아요”라는 피드백을 들을 때 더욱 감사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5. 다양한 채널로 연결하다
올해 들어 <듣똑라>는 더욱 다양한 채널로 콘텐츠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오디오 콘텐츠가 더 효과적으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여러 보완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매주 금요일엔 한 주의 주요 시사를 정리하고, 방송 이후에 업데이트된 내용을 담아 뉴스레터 <위클리(Weekly) 똑똑>을 이메일로 발행한다. 인스타그램과 트위터에는 방송의 주요 내용을 갈무리해서 올린다. 또 유튜브 채널을 열어 취재 과정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지난달부터는 오프라인 모임을 통해 청취와 직접 만나기도 했다.
이렇게 채널을 확장하는 이유는 타깃 독자가 있는 곳으로 우리가 직접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쏟아지는 뉴스의 틈바구니에서 <듣똑라>가 더 편하고 친근한 매체로 선택받으려면 독자가 있는 곳으로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보다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기자, 일하는 방식을 바꾸다
새로운 뉴스 서비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신문기자의 전통적인 업무수행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듣똑라>가 본업인 지금, 우리 팀 내 기자들은 기자이기도 하고 PD이면서 대본을 쓰는 작가이고, 방송 진행자이자, 편집자, 서비스 기획자, 마케터, 커뮤니티 매니저이기도 하다. 유튜브 콘텐츠를 찍을 때는 크리에이터가 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아시아에서 최초로 열리는 세계적인 개념미술가 바버라 크루거(Barbara Kruger)의 전시를 다루기 위해서, 우리는 사전 취재 내용을 뉴스레터에 쓰고, 현장 취재 과정을 유튜브 브이로그에 담고, 큐레이터를 섭외해 팟캐스트에서 인터뷰 방송을 제작했다. 방송에서 인상적인 멘트는 SNS로 노출했다. 이후 청취자들이 미술관을 함께 투어하는 오프라인 모임을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고민 중이다.
지난 8개월 동안 우리 팀은 이런 방식으로 움직였다. 다양한 종류(오디오, 비디오, 텍스트, 오프라인 모임)의 콘텐츠를 생산해야 하므로, 주어진 일 너머의 새로운 일을 계속 상상하고 움직여야 했다. 팀 내에서 늘 하는 말이 있는데, ‘1일 1 배움’이다. 시행착오를 겪고, 거기서 배움을 얻고 재실행하는 일을 매일 반복한다. 누군가에게 노하우를 전수받을 수 없으니 도전의 연속이지만, 그만큼 창의력을 발휘할 여지가 커서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다.
<듣똑라>를 만들면서 기자로서 또 달라진 점은 ‘독자 중심, 청취자 중심의 사고’가 강화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청취자를 ‘듣똑러(청취자들이 직접 지어준 것이다)’라고 부른다. 콘텐츠를 만들고 서비스를 설계할 때 언제나 1순위는 듣똑러다. 듣똑러에게 얼마나 유익한 콘텐츠인가, 듣똑러가 얼마나 관심 가질 만한 이슈인가를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콘텐츠가 절로 뾰족해진다.
지금 우리는 듣똑러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듣똑라는 듣똑러의 성장을 바라고, 듣똑러는 듣똑라의 성장을 바란다. 서로 신뢰하고 응원하는 관계가 구축되어 있다는 점이, 우리에게 가장 큰 동기 부여가 된다.
지난 8개월간 <듣똑라>는 놀라운 성장을 계속했다. 애플 팟캐스트 인기차트 1위를 했고, 구독자는 연초보다 세 배 이상 늘었다.) 7월부터 시작한 소셜클럽은 빠른 속도로 마감된다. 감사하게도 <듣똑라>를 추천하는 듣똑러들의 자발적인 후기도 지속해서 올라온다. 이제 시작인 것 같다. 더 많은 밀레니얼 세대의 유익한 시사친구가 되기 위한 도전과 실험은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