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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의 창조와 인간의 창조

김홍열의 디지털 카이로스

by 김홍열

생성형 인공지능(AI)의 발전 속도가 너무 빨라 한편으로는 감탄하게 되고 다른 한 편으로는 혼란스러워진다. 감탄하게 되는 경우는 AI가 만든 창작물의 수준이 너무 탁월하기 때문이다. 몇 가지 사례를 찾아보자. 작곡가 김형석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작곡 공모 콘테스트에서 1위로 뽑힌 곡이 AI가 만들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김형석이 누리 소통망 서비스를 통해 “이걸 상을 줘야 되나 말아야 되나, 그리고 이제 난 뭐 먹고 살아야 되나, 허허허“라고 탄식했다. 김형식은 1위로 뽑힌 곡이 AI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주최 측 통보가 있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다. 물론, 이미 AI 작곡 프로그램을 실제로 사용하고 있고 김형석도 그 사실을 충분히 알았겠지만, 이 정도 수준이라고는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탄식이 나온 것이다.


그림의 사례를 보자. 2년 전 미국 ‘콜로라도 주립 박람회 미술대회’의 디지털아트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한 작품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은 AI 프로그램으로 제작한 것이다. 이 대회 디지털아트 부문 규정에는 창작 과정에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는 것을 허용하지만, 허용 범위는 작품 완성 과정에서 기술적 도움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화가가 자신의 생각 또는 의도를 먼저 구상하고, 그 바탕 위에서 어떤 형상을 어떻게 구체화 할지 결정한 다음 실제 작업 과정에서 컴퓨터 프로그램의 도움을 얻는 방식이었다. 다양한 편집 프로그램이 출시된 이후 편집 프로그램들은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활용됐지만, 위 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은 사실상 AI가 그렸다고 해도 될 정도로 인간의 개입이 최소 수준에 그치고 있다. 사람이 한 일은 텍스트로 몇 마디 명령어를 입력한 것뿐이 없다. 이후 모든 과정은 AI가 스스로 알아서 했다.


글쓰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AI가 장편소설을 쓰기도 하고 경연대회에 출품해 당선되기도 한다. 이런 사례는 너무 많다. AI 글쓰기의 대표적 사례 중 하나는 유발 하라리의 베스트셀러 "사피엔스"의 10주년 기념판 서문이다. 하라리는 챗지피티에게 자신의 문체로 10주년 기념판 서문을 써 달라고 요청했고, 챗지피티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바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이를 보고 있던 하라리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라리가 AI 발전 속도에 두려움을 느껴 AI를 규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공지능은 이미 인간과 같은 수준으로 글을 쓰고 음악, 비디오,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는데 인간은 아직 이런 시대를 준비하지 못해 모든 것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단지 하라리만의 문제의식은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어젠다를 던지고 있다. AI가 이 정도로 완성된 예술작품을 창작한다면 과연 창작이란 무엇인가, 창조적 행위란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 질문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 창작은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이었다. 인간이 다른 종보다 우세한 이유는 인간만이 시공간에 대한 이해가 있었고 이런 이해체계를 문자나 그림, 음악으로 풀어낼 수 있는 창조적 행위가 가능했기 때문이라고 믿어 왔다. 인간 아닌 것들은 복사나, 편집, 또는 재생 등 단순 반복적 역할만 수행할 수 있을 뿐, 세상에 없던 것을 새로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어 왔다. 이런 가치관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 앞에 예술작품을 창작하는 새로운 지능이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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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이 그린 천지창조 그림. (이미지 출처 = pixabay)


과연 AI의 결과물을 창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까, 또는 AI의 행위를 창조적 행위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우리에게 창조(Creation)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물음을 던져 준다. 이 질문에 대해 설득력 있는 답을 내어 놓은 사람 중 하나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예술이 현실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가는 실제 세상이나 다른 예술 작품을 관찰하고 그에 대한 모방을 통해 작품을 창작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모방은 단순한 복사가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창조적 행위이며 모방의 결과물들은 인간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 관점에서 보면 예술은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는 현실을 재구성하는 매개였다. 이런 관점에서 예술 창작물들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AI의 결과물들과 인간의 창작물을 차별할 근거가 없어진다.


사실 창조 또는 창조적 행위를 역사적 관점에서 분석하자면 비교적 최근에 활성화한 것을 알 수 있다. 심리학자 김정운의 저서 "창조적 시선"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창조성(Creativity)이라는 단어는 그전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다가 1920년대부터 폭발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때도 창조적이라는 의미는 없던 것을 새로 만들어 낸다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있던 것들을 새롭게 편집, 재구성, 재해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업혁명이 마무리되면서 기존 생산 양식과 그에 기반한 사상체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지만, 새로운 사상은 아직 정립되지 못해 여러 생각이 혼재한 상황에서 무언가 새로운 길을 찾고자 했던 예술가들의 이런저런 모험과 도전이 창조적 행동이고, 그런 행동의 결과물들이 창작물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창조에 대해 개방적 태도를 유지한다면 AI의 결과물과 인간의 결과물이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점을 인정하게 된다. 이런 개방적 태도는 창조를 인간만의 독점품이라는 편협한 생각에서 벗어나게 만들 수 있다. 사실 완전한 의미에서 즉, 전혀 없던 것을 처음 만들어내는 의미에서 창조는 창세기 첫 장에 나오는 사례 외에는 없다. 성서 첫 문장에 나오는 창조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바라'는 아무것도 없는 혼돈 카오스에서 우주의 새로운 질서 코스모스를 만들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이것은 창조주만 가능한 절대적 영역이다. 신의 창조 행위는 일차로 없던 것을 만들어 냈다는 의미가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조의 목적이 피조물들 간 아름다운 동행에 있다는 사실이다. 신의 창조 행위 궁극의 목적이 여기에 있다. 창조 또는 창작이라는 것을 사랑과 연대를 위한 행위라고 한다면, 우리는 인공지능의 창작을 맘 편하게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창작의 결과물을 갖고 인공지능의 창조와 인간의 창조를 구별할 것이 아니라 신에게 배운 사랑과 연대의 창조성을 실천함으로써 인간 창조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 더 아름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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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인터넷 신문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기명 칼럼 '김홍열의 디지털 카이로스'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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