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산들이 중첩되어 있는 골마다
아침 안개가 피어오르고,
해는 안개 속에 갇혀 있습니다.
신비로워 경탄하게 합니다.
보이던 것을 가리고 보이지 않던 곳을 드러내는 신기한 작업은
계속 펼쳐집니다.
수묵의 농도를 달리하고 빛의 강도가 돌변하면서
다시 반전하고 뒤집히며 상상 속의 절경을 만들어갑니다.
아마 오늘 아침 산은
자신이 얼마나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를
실험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갑자기 나를 실험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나를 밀어붙입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그 안개 속의 산들은
돌연 내면의 목소리들로 변하여 내게 소리칩니다.
"실험하라. 매일 실험하라.
매일 다른 삶을 살아라. 새로워져라.
매일 다른 사람이 돼라."
구본형의 <일상의 황홀> 중에서
아이들과 제가 성장해가며
시간통장을 이루는 아이템들도 꾸준히 변화해 나갔습니다.
그렇게 국면이 바뀔 때마다 버젼을 달리한 시간통장이
벌써 시즌 17을 맞이했네요.
물론 12년간 365일 하루도 안 빠지고 쓰지는 못했습니다.
어떤 때는 몇 개월씩 통으로 비어있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기록을 살피다 보니 그런 공백들 마저도
그 순간의 저와 가족들의 모습이
오롯이 살아 담겨 있는
온전한 기록이 되어주더라구요.
처음에는 시간을 쌓아가는 재미에,
그 재미가 시들해졌을 무렵에는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나면
'1만시간의 법칙'을 주장한 그 인간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오기에,
그 오기마저도 사위어가던 즈음엔
칸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일상을 세심히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깨어난 기쁨을 신기해하며,
그마저도 시들해진 어떤 날에는
그저 습관적으로 하루를 지면에 담으며
12년을 살았습니다.
그 시간이 10년을 꽉 채워가던 즈음
새로운 기록을 멈추고
지난 기록들을 다시 살펴볼 마음을 먹은 것은
솔직히 화가 나서였습니다.
아무리 계산해봐도 1만시간을 훌쩍 넘긴지가 언젠데
빌어먹을 놈의 '전문성'이란 것은
생길 기미도 안 보이는 걸 보니
이건 완전히 속은 게 분명해.
말만 번지르르한 '유명한' 사기꾼들에게
보기 좋게 속아넘어간 것이 분명하다구.
10년 묵은 실망과 좌절, 배신감과 분노가
해일처럼 저를 덥쳐왔습니다.
성질 같아서는 이까짓 기록들
확 다 불싸질러 버리고 싶었지만
서울 한 복판에서 그 많은 자료들을
태울 곳이 있을 리 없습니다.
대용량 쓰레기봉투에 담아서 버려볼까도 해봤지만
개인정보가 빼곡하게 담겨있는 자료들을
그렇게 버리는 것도 찝찝하더라구요.
그러니 도리 있나요.
한페이지 한페이지씩 꼼꼼히 살피며
치명적인 개인정보 만이라도 찢어서 따로 처리한 후
그 다음 스텝을 생각해보는 수 밖에요.
10년을 품고 있던 꿈이 산산조각난 상황이니
따로 다른 무엇인들 하고 싶은 게 있을 리 없기도 했구요.
그렇게 살피기 시작한 시간통장에는
저라는 존재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고 무엇을 추구하는지,
무엇을 비우고 싶어하고 무엇을 살리고자 하는지,
어떻게 하면 무리가 되고 어떻게 하면 효과적인지,
무엇을 계기로 변화를 시작하고 또 마무리 하는지가
구체적인 사례를 품고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사랑'을 알 수 있게 된다는 말은 진실이었던 걸까요?
'위대함'이 검증된 다른 사람들이 써놓은 글을 읽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존재의 희노애락애오욕과
그 변화의 구조와 원리가 온 몸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달까요.
이걸 어찌 설명해야 할까요?
무서운 기세로 추격해 오는 이집트 군대에 쫒겨
바다에까지 이르렀으나
이제는 어쩌면 좋단 말인가 막막해하던 때에
눈앞의 바다가 스스로 갈라져 길을 내어주는 것을
바라보고 있던
이스라엘인들도 이런 심정이었을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https://youtu.be/lQ1mJiPKgBY?si=utctms6rCF72ZtE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