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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난다 Oct 24. 2024

규칙은 딱 하나, 예쁘되 조용할 것!

훌륭한 직장과 예쁜 아이를 가진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인

노트였다. A4 절반크기의 스프링 노트 하나만 개봉된 상태였고, 나머지는 한 개씩 또는 여러 개씩 따로 포장되어 있었다. 포장한 앞면에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는 걸로 보아 스프링 노트는 가장 최근의 기록인 것 같았다. 위의 글은 그 스프링노트 맨 끝부분에 적혀있던 글이다. 편지같기도 하고 일기같기도 한 그녀의 마지막 글. ‘이대로라면 그녀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힘차게 살아있어야 맞지 않은가? 도대체 어쩌라고 내게 이 기록을 남기고 그렇게 가버린 걸까?’ 다시 한참을 망설이다 ‘1’ 이라고 적힌 서류봉투를 열었다.  




나는 육군장교셨던 아버지가 부산에 근무할 때 집에서 태어났다. 소연이라는 이름은 아버지가 지어주셨는데..엄마말로는 제가 태어난 날 퇴근하신 아버지께서 엄마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소연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셨다고 한다. 왜였을까? 


태몽의 주인공은 원숭이였단다. 털이 북실북실한 커다란 원숭이가 집의 기둥인가 나무인가에 묶여 있다가 엄마가 지나가자 엄마 치마폭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깜짝 놀란 엄마가 아무리 떼어 내려고 해도 떨어지지가 않더라구. 해몽책을 찾아보니 재주 많은 아이 꿈이라고. ^^


아가야 때는 무지 순한 아이였는데..욕심은 많았단다. 두 살 터울로 남동생이 태어나자 뗐던 젖을 다시 먹기 시작해서 다섯 살 때까지 먹었다고 한다. 질투쟁이 누나 덕에 잘 나오는 엄마젖이 있었음에도 동생은 분유로 키울 수 밖에 없었단다.


동생이 태어난 이후니까 서너살쯤 되었을 때쯤인가 빨래 광주리를 이고 냇가에 빨래하러 가시는 엄마를 따라가서 빨래를 한다고 우기던 기억이 있다. 엄마는 하는 수 없이 양말같은 작은 빨래를 건네주셨는데 냇물에 떠내려 보내고 잡으러 다니며 놀았다. 경기도 포천의 한 전방마을이었는데..그때 만해도 빨래터에서 빨래를 했었다고 한다. 주로 동생의 똥기저귀를 빨러다니셨다는데 그러고 보면 우린 그야말로 웰빙을 누렸던 것 같다. 


펌프식 수돗가가 마당 가운데에 있고 그 둘레로 방과 작은 부엌이 줄줄이 이어진 그런 집이었다. 엄마가 부엌에서 아궁이불에 고기를 구워주시면 동생과 나는 문지방에 걸터 앉아 고기를 받아먹곤 했다. 뭔가 아는 나는 살코기만 떼어 달라고 졸랐고, 남은 비게는 암 것도 모르는 동생 입에 쏙쏙 넣어주었다. 그래도 동생은 허연 비게를 맛있게 넘기고는 또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우습고도 정겨운 풍경이다. 


그 집에 살던 때다. 엄마따라 목욕탕에 갔는데 아마 또 빨래놀이를 했었나 보다. 수건에다 비누를 잔뜩 묻혀 거품을 내서는 사부작사부작 탕에다 헹구고 있었다. 주위에 있던 아주머니가 기겁을 하며 뭐라고 큰소리를 치셨다.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모른다. 엄마도 연신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셨던 것 같다. 어린 마음에도 나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는 그 목욕탕엔 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러고 보면 이것이 최초의 사색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좀 컸다. 그렇다고는 해도 유치원에 다니기 전이었다. 다른 집이었던 것 같다. 거기도 전방의 시골동네였던지라 집과 집사이가 멀었다. 종종 혼자서 모험을 떠났다. 누구네였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어떤 맘씨 좋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시는 집에 주로 놀러갔었던 것 같다. 그 시절 애들이 다 그랬던 걸까? 수퍼맨처럼 날아보겠다고 목에 빨간 보자기를 묶고 다리위에서 뛰어내려 다쳤던 기억도 난다. 


동생이 참 귀여웠다. 내 동생이지만 참 귀엽게 생긴 아가야라고 생각했다. 물론 귀찮을 때도 있었지만 동생이 있어서 좋았다. 유치원에 다닐 무렵일 것이다. 동생은 4살쯤되었을 때다. 동네 아이가 동생을 때렸다는 소리를 듣고 신발도 신지 않고 그 집에 달려가 그 아이를 때려주었다. 나는 때릴 수 있지만 남이 내 동생을 때리는 건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가끔 울면서 짐을 싸셨다. 동생이랑 나는 꼭 안고 엄마랑 아빠를 지켜보고 있었다. 가끔 아빠를 말려보기도 했지만 결과는 항상 마찬가지였다. 가만히 있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다. 아빠가 방을 나가시면 동생과 나는 엄마가방을 붙들고 함께 울었다. 


「가지마..엄마」


유치원 선생님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나도 크면 선생님처럼 예뻐질 거라고 다짐했다. 지금 사진을 보니 뭐 그저 그렇다. 그래도 그땐 선생님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 같다. 유치원에서 어떤 남자아이가 자꾸만 내게 뽀뽀를 했다. 귀찮았다. 그래서 유치원에 가는 게 싫었던 적도 있다. 엄마에게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모아놓은 모양이었다. 읽으며 나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자연스럽게 내 아이들과 내 자신의 아이 적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봉투 안에는 빛바랜 편지 모음과 일기장 한 권이 더 들어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족히 십 수년은 넘어 보였다. 큰 서류봉투안에 들어있는 편지모음중에 노란 고무밴드로 따로 묶인 편지봉투가 몇 개 눈에 띄었다. 내용을 읽어보니 주로 전학을 간 그녀가 전 학교 친구들과 주고 받은 편지들이었다. 편지 내용에 따르면 그녀는 직업군인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부산→광주→서울로 옮겨 초등학교를 다닌 것 같았다. 


초등학교 4학년(광주)때 헤어진 친구에게 6학년 무렵 즈음에 받은 편지에 ‘내 친구 안소니․하얀이에게, 캔디․스미드 아가씨가’ 등의 표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책을 좋아하는 아이였던 것 같다. 언뜻 보아도 안소니와 캔디는 보낸 친구가 좋아하는 설정이고, 하얀이와 스미스 아가씨는 키다리아저씨를 저희들 나름대로 윤색한 데서 나온 호칭인 듯 했으니까.. 초등학교 6학년 동급생 지현이란 아이와는 하트모양의 우정의 목걸이를 나눠 걸었고, 희진이라는 친구랑도 친하게 지냈었나 보다.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포천으로 전학을 간 그녀에게 일국이라는 남학생이 보낸 편지엔 ‘언제나 활짝 웃는 얼굴로 친구들과 사귀고 발표력이 좋은 네가, 언젠가 희진이가 네가 넘어진 것을 보고도 그냥 갔다고 교실에 들어와 배신당했다고 울 때, 네가 바보같이도 느껴지더라’라는 표현이 보이고 민정이라는 여자아이의 편지에 ‘네가 해주는 이야기 듣는 걸 좋아하거든’이라는 내용이 있는 걸로 보아 그녀의 어린시절을 짐작할 수 있었다. 


대부분 다 그렇고 그런 내용의 편지였는데 특히 ‘최민석’이란 남자아이와 주고받은 편지는 양과 기간이라는 측면에서 두드러졌다. 내용은 별 것 없다. 다른 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각자의 학교 시험지를 주고 받기도 하고 성적이나 뭐 그런 고민거리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가 고무밴드로 따로 묶어놓은 편지는 내용 중에 그녀의 어린시절을 짐작케하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니 그녀도 이 편지를 분류하기 위해 꽤나 꼼꼼히 자료들을 읽었던 것 같았다. 동봉된 일기장은 군데군데 선생님의 코멘트가 적혀있는 것을 봐서 초등학교 6학년 때 숙제로 제출하던 일기장 같았다. 세세한 감정까지 상당히 솔직하게 표현된 일기장이었다. 그중에도 눈에 띄는 구절, ‘선생님은 민정이만 이뻐하시는 것 같다.’ 도발적인 아이였나보다. 


일기의 끝장엔 그녀가 정리해 놓은 초등학생 시절의 단상들이 첨부되어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나는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다. 내성적이고 수줍은 아이였을 것이다. 수업시간에 화장실 가겠다는 말을 하지 못해 교실에서 앉은 채로 오줌을 눌 정도였다. 초등학교 3학년때 쯤이었던가. 엄마 몰래 학교를 빼먹기 시작했다. 공상을 하며 학교주변을 배회하다보면 어느새 친구들이 가방을 메고 학교에서 몰려나왔다. 그러면 나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집으로 향했다. 


주로 동생이 다니던 성당유치원 정원에서 놀았다. 엄마가 쓰는 꽃가위를 몰래 들고 나와 커다란 나무, 정원 울타리 대신 둘러놓은 작은 입사귀가 달린 활엽수였는데 그 나무의 가지를 잘라 내 몸이 들어갈 만큼의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서 뭔가를 상상하며 보낸 시간이 제일 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북한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될까? 1999년 지구가 멸망할 때쯤엔 난 뭘 하고 있을까?’ 이런 종류의 생각들이 주요 주제였던 기억이 난다.


하여간 엄마는 응당 받아오리라 믿었던 개근상이 없는 걸 보고야 뭔가 일어났음을 아셨다. 선생님은 뭘 하셨던 걸까? 엄마는 정말 모르셨을까? 초등학교 3학년 2학기에 광주로 전학을 갔는데, 부산 친구들과의 편지교환이 없었던 것은 단지 어렸기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광주로 전학가면서 나의 학교생활은 180도 달라졌다. 임원도 하고 공부도 곧 잘했다. 언제나 화제의 중심이었다. 어떻게 이런 드라마틱한 변화가 가능했을까? 아마도 아빠덕분이었던 것 같다. 목포가 고향이셨던 아빠 친구분 중에 내가 다니던 학교 선생님이 계셨다. 우리 집에도 자주 오셨던 걸로 기억한다. 뭘 어떻게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아마 활달하고 발표 잘하고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나는 이런 특별한 관심 속에서 만들어진 캐릭터였을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부모와 선생님의 관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는다. 


광주 상무대. 아빠는 당시 소령이셨다. 출퇴근을 위해 군용 오토바이가 지급되었다. 아빠는 휴일이면 우리 남매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꽤 멀리 나들이를 다니시곤 했다. 지금은 모두 아파트 숲이 되어버렸지만 그때 만해도 군인아파트를 조금만 벗어나면 끝도 없이 논과 밭이 이어지던던 시골이었다. 우리는 잠깐 내려 상추나 고추를 서리해 오기도 하고 잠자리를 잡기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부대 안에 있는 어린이풀장에도 자주 갔던 것 같다. 아빠와 함께하는 곳은 어디라도 좋았다. 아마 아빠에게도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을 것 같다. 그때가 아빠 나이 딱 서른 여섯, 지금의 나보다 한살 더 오빠였다.


5학년이 되면서 서울로 전학을 왔다. 아빠는 진급 때문에 바빠지셨다. 엄마가 본격적으로 술을 드시기 시작하신 때가 이 무렵이었다. 나는 아빠의 지령에 따라 달력에 엄마가 술 드신 날을 빨갛게 표시했다. 하지만 이 때만해도 그다지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6학년 즈음엔 좋아하는 남자아이도 있었다. 문제는 그 아이가 나보다 날씬하고 예쁜 다른 아이, 희진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질투했었던 것 같다. 편지 속에서 희진이에게 배신당했다고 울었다던 에피소드. 정말은 넘어진 나를 그냥 두고 간 희진이가 미웠던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남자아이와 친하게 지내는 그녀가 미웠던 것 같다. 




그녀의 중학생활은 포천군 관인면이라고 하는 곳에서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친구인 지현이가 보낸 편지에 ‘1등을 했다니 축하해. 거기 아이들이 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잘해줘’라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공부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시골 아이들 틈에서 1등을 한 것이 좀 쑥스러워했던 모양이다. 혜진이라는 글쓰기를 좋아하는 정 많은 아이와 좀 새침한 영숙이라는 아이와 친했었던 것 같다. 문예반 활동을 했고, 시골의 마을 행사격이었던 체육대회에서 사회를 보기도 했나보다. 


그녀는 중학교 2학년때 서울로 다시 이사를 왔다. 앞의 혜진이와 영숙이도 전학 후에 주고 받은 편지의 발신인이다. 이밖에도 ‘항상 좋은 추억으로 남고 싶은 사람’이라는 발신인이 눈에 띄었다. 내용을 읽어보니 두 학년 선배 남학생인 듯 했다. 이를테면 첫사랑인가? 편지는 그가 대학에 입학하는 해까지 이어진다. 담백하고도 담백한 내용이었다. 마지막 편지를 다 읽고 나자 어느새 다음 봉투를 뒤적이고 있는 내가 있었다. 그녀를 향한 여행은 그렇게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때 나의 삶은 전반과 후반으로 확실히 나뉜다. 전반엔 사회 속에서 내 정체성을 찾았다. 반장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유난스런 반장 덕에 담임 선생님은 자율학습 감독에서 자유로워지셨고, 겨울엔 조개탄을 조금이라도 더 받아오려고 나눠주는 선생님께 갖은 아양을 떨었던 기억도 있다. 오락시간이 되면 혼자서 원맨쇼를 하면서 친구들을 웃기기도 했다. 국회의원 유세하듯 친구들과 어울렸다. 반 아이들과 두루두루 모두와 친한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이런 내가 2학년이 되면서는 조금 위기감을 느꼈나보다. 모두들 당연하게 생각하던 반장투표에서 ‘제발 나를 내버려 둬 달라’며 애원하며 사퇴했던 기억이 난다. 


억지스런 사퇴가 무색하게 곧 발표된 전체회장선거에 출마한 것은 순전히 남자때문이었다. 공부에 집중하겠다고 반장을 마다했는데 민현수라는 상당 그럴 듯하게 생긴 남자아이가 임원단에 속해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특별한 인연이 없는 그와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기 위해서 임원생활은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미 회장단을 제외한 임원선출은 모두 끝난 상태라 내게 기회는 회장 아님 부회장뿐이었다. 선배없는 학교의 첫 직선제 선거라 나름 본격적이는데 선거운동 때 내가 보인 적극성은 스스로 생각해도 참 대단했다. 결과는 당연한 당선. 임원단 모임이 목적이었던 네게 회장이건 부회장이건 별 의미는 없었다. 당연히 남자아이가 회장이 되고 내가 부회장이었다. 회장단 생활은 그리 즐겁지 않았다. 더 억울한 건 결국 민현수와도 눈 한번 맞춰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때 알았다. 대한민국에서 여자는 예쁘고 조용할 때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학생회활동에서 보인 내 과도한 적극성은 남자아이들의 비위를 상하게 했다. 과도하다고는 해도 실은 할 말을 했을 뿐이었다. 내 공부시간 쪼개가며 열심히 활동하고도 욕을 먹으니 억울했다. 2학년 중반쯤엔 ‘전학가고 싶다’를 달고 살았다.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입학하고 내내 1년 반을 주기로 전학을 다니던 내가 정확히 임계점을 넘기던 순간이었다. 


다행히 가을 축제가 끝나고 학생회에 일이 줄어들면서 많은 아이들에게 노출될 일도 함께 줄었고 남자아이들의 따가운 시선도 시들시들해졌다. 2학년 2학기는 과도기였다. 초조한 마음에 매일 무리한 공부계획을 세웠지만 별로 지킨 기억은 없다. 당연히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아니 실은 곤두박질이랄 것도 없었다. 그때까진 규칙적으로 공부한다는 개념자체가 없었다. 벼락치기가 가능한 내신성적 위주로 근근히 유지하고 있던 성적이었으니 갑자기 모의고사 비중이 높아진 시점에서 체감성적이 내려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2학년때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친구는 진아였다. 강남 어디선가 전학 온 공부 잘하는 아이.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진아의 도시락을 보며 ‘이 아이는 나랑 다른 세계에 사는구나’생각했다. 새침하고 야무진 그 아이와 활달하고 덤벙대는 나는 나름대로 참 보완적인 파트너였다. 진아는 나를 통해 새 학교에 무리없이 적응할 수 있었을 테고 성실하고 부지런한 진아를 보며 ‘나와 그녀의 성적차이엔 다 이유가 있구나’를 절감했다.


점점 사교생활의 비중이 혜수에서 진아로 넘어왔다. 혜수는 섭섭해했고, 2학기 때쯤에 교내 최고의 政敵(?)으로 변해있었다. 무슨 일이든 나를 험담하는 무리에는 늘 그녀의 목소리가 제일 컸다. 속상했지만 별로 신경은 안 쓰였다. 내가 뭘 잘 못한 것도 아니고, 그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언제까지나 밤거리를 헤매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 어린 마음에도‘치뤄야 할 것’이라고 담담히 받아들였던 것 같다. 


후반부는 고2 겨울방학 이후다. 고2의 마지막 상담. 현재 성적으로는 중하위권 대학도 보장할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충격이었다. 그때까진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의 위치를 확인할 기회가 없었다. 나는 그저 막연히 ‘나라면 당연히 최고의 대학에 갈 수 있으리라’생각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드라마틱한 성적향상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때까지 나의 학습패턴은 전형적인 벼락치기, 범위가 정해진 내신성적은 그럭저럭 유지할 수 있었으나 全과목, 全범위를 체계적으로 장악하기 위해서는 이에 맞는 학습습관이 절실하다고 판단했다. 과외, 학원 수강 등 여러 가지 방법을 고려했으나 딱히 효과적일 것 같지 않았다. 그러던 중 마침 기숙형 입시학원에서 재학생반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규칙적인 학습관리를 해준다’는 카피에 ‘이거다!’ 싶었다. 바로 부모님께 말씀드려 신청했다. 22일간 정확히 계획에 맞춰 생활했다. 공부하라면 하고, 쉬라면 쉬고, 자라면 잤다. 솔직히 학원 프로그램 자체는 별로였다.‘스파르타형’이라 불릴 만큼 억압적인 학원분위기에 대한 반작용이었는지 룸메이트들은 틈만 나면 삼삼오오 이야기꽃을 피워댔다. 또 수업의 질 역시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의 목표는 1년간의 장기전을 위한 공부습관을 얻는 것이었고, 여기서는 한번 계획한 것을 끝까지 밀고나가는 행동력만 몸에 익혀 나가면 그뿐이라고 생각하니 잡념이 사라졌다. 


퇴소 날엔 짐도 풀지 않고 바로 눈여겨 보아두었던 독서실로 향했다. 집과 학교의 정확히 중간지점에 위치한, 다시 말해 친구들과 집의 유혹에서 모두 안전한 그런 곳이었다. 매일 하루도 쉬지 않고 제일 처음 들어가 맨 마지막에 나왔다. 그렇게 3개월을 보내고 첫 모의고사. 제일 놀란 사람은 바로 나였다. 정확히 100점이 올라있었다. 전교 1등, 원하던 학교에 상위권 합격. 그때부터 학교는 나에게 개인과외장이 되었다. 생활만족도는 그야말로 최고였다. 이때부터 혜수의 태도도 바뀌기 시작했다. ‘네가 자랑스러워’로. 다시 혜수는 나의 열열한 팬으로 돌아왔다. 고3병 따위는 당연히 없었다. 그때 알았다. 스트레스란 해야 할 일의 분량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유로든 해야 할 일은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할 때 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친구들을 피해 독서실을 잡았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고3때 나의 사교는 全無에 가까웠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스스로의 성향을 잘 알았던 나는 교실에서 입을 열기 시작하면 통제하기 어려워진다고 생각했다. 내가 3학년 우리교실에서 했던 유일한 발화는 「차렷, 경례」뿐이었다. 진아와의 관계는 첫 모의고사이후로 어긋났다. 외람되게도 내가 그녀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다. 성적 대자보에서 자신을 이름을 발견하고 저 아래쯤에서 내 이름을 찾던 그녀는 곁에 서 있는 내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열심히 하더니, 이름이 없네.」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내가 기숙형 학원에 들어간다고 말했을 때도, 휴일날 독서실에서 간간히 전화를 했을 때도 그녀는 말했다. '공부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 그녀의 그 말은 마치 '공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라는 말처럼 들렸다. 그렇지만 딱히 기분이 상하거나 그렇진 않았다. '나도 진작에 너처럼 공부에 전념했어야 했는데...늦었지만 이렇게라도 해봐야 아쉬움이 없지 않겠냐'며 멋적게 웃을 뿐이었다. 대자보의 맨첫줄에서 내 이름을 발견한 그날 그녀의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다른 아이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앞 독서실에 다녔는데 나중에 다른 친구에게 전해들은 얘기로 그녀의 히스테리 역시 대단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내겐 한 번도 그런 내색을 한 적이 없다.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150센치 남짓되는 작은 키가 콤플렉스였던 그녀, 좋은 성적은 그녀의 자존감의 기반이었을텐데. 나와의 인연이 그녀에겐 어떤 의미였을까? 나는 그녀에게 좋은 친구였을까?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그녀를 만난 적은 없지만 그녀는 현재 아주 잘 살고 있다고 한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고, 의사 사모님으로 아이도 하나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녀만 생각하면 마음이 좋지 않다. 내가 뭘 잘 못 했기에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아직도 풀리지 않은 어려운 숙제다. 



 여기까지 읽는 데 며칠이 걸렸다. 퇴근하면 바로 서재로 들어가 그녀의 삶 속에 빠져들었다. 그녀 수첩에서 ‘스스로의 기쁨으로 세상을 기쁘게 하라’ 라는 문구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나 급하게 그녀의 삶 속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확인하고 싶었다. 최소한 그녀가 삶을 버린 이유와 이 메시지가 무관하다는 단서를 찾아내야만 했다. 절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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