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길목마다 어김없이 돌부리에 걸려 머리가 하얘지는 내가 이어령이라는 스승을 만난 건 축복이었다. 선생님이 암에 걸려 투병 중이던 2년 전 가을, 나는 당신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선생님은 '라스트 인터뷰'라는 형식으로 당신의 지혜를 '선물'로 남겨주려 했고, 나는 그의 곁에서 재앙이 아닌 생의 수용으로서 아름답고 불가피한 죽음에 대해 배우고 싶어 했다. 그렇게 매주 화요일, '삶 속의 죽음' 혹은 '죽음 곁의 삶'이라는 커리큘럼의 독특한 과외가 시작되었다(8페이지)
루게릭병을 앓았던 모리는 제자인 미치 앨봄에게 헝클어진 백발, 힘없는 팔다리, 침을 흘리고 화장실에서 일어서지 못하는 모습 등 생명이 사그라드는 모든 과정을 공유했으나, 이어령은 내게 면도하지 않은 모습조차도 보여주기 싫어했다(21페이지)
예일대 교수인 셸리 케이건이 했던 유명한 이야기로 수업의 서문을 열었다.
"한 사람이 우주선을 타고 여행을 떠나기 전에 친구와 작별인사를 했어. 우주의 시간은 달라서 돌아오면 2백 년이 훌쩍 지나버려. 지구 시간으로는 마지막 만남이니, 그게 결국 죽음인 거라. 그런데 이를 어째. 그 우주선이 출발하다가 중간에 폭발을 해버린 거야. TV 중계로 그걸 지켜보던 친구가 깜짝 놀랐겠지. '아이고, 내 친구가 죽어버렸네' 그제야 울고불고 난리가 났어. 아이러니하지 않나? 그럼 아까 죽음은 뭐고, 지금 죽음은 또 뭔가?"
"글쎄요... 내 눈앞에는 없어도, 다른 시공간을 살아도 '어딘가에 있다'라는 인식이, 우리를 견디게 하지 않습니까? 적어도 그 존재를 상상할 수 있으니까요" (24페이지)
<마인드를 비워야 영혼이 들어간다> 스님을 찾아온 사람이 입으로는 '한 수 배우고 싶다'라고 하고는 한참을 제 얘기만 쏟아냈지. 듣고 있던 스님이 찻주전자를 들어 잔에 들이붓는 거야. 화들짝 놀라 '스님, 차가 넘칩니다'헸더니 스님이 그랬어. '맞네, 자네가 비우지 못하니 찻물이 넘치지. 나보고 인생을 가르쳐달라고? 비워야 가르쳐주지. 네가 차있어서 말이 들어가질 못해' 마음을 비워야 영혼이 들어갈 수 있다네(26페이지)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살면서 패한 일이 거의 없으시지요?"
"아니야, 나는 매번 패했어. 글 쓰는 사람은 매번 패배한다네... 정말 마음에 드는 기막힌 작품을 썼다면, 머리 싸매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을까 싶어"
글을 쓴다는 것은 앞에 쓴 글에 대한 공허와 실패를 딛고 매번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고, 그가 환하게 웃었다(29페이지)
"공포는 없으신지요?"
"자신은 없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라는 사람은 최초로 죽음학을 했고 죽음에 대한 강의를 그렇게 많이 했는데도, 정작 자기가 암에 걸리고는 감당을 못했어. 그것을 본 한 기자가 물었지. '당신은 임종하는 사람을 지켜보며 그렇게 많은 희망을 줬는데 왜 정작 당신의 죽음 앞에서 화를 내고 있느냐?' 로스가 이렇게 답했다네.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은 타인의 죽음이었어. 동물원 철창 속에 있는 호랑이였지. 지금은 아니야. 철창을 나온 호랑이가 나한테 덤벼들어. 바깥에 있던 죽음이 내 살갗을 뚫고 오지. 전혀 다른 거야"
"테레사 수녀도 다르지 않았다네. 로스처럼 죽음을 저주하진 않았지만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었다고 탄식했지. 성처녀였으나 고통스럽게 죽었어" (33페이지)
"선생님은 그럼 책을 어떻게 읽으셨나요"
"재미없는 데는 뛰어넘고, 눈에 띄고 재미있는 곳만 찾아 읽지. 나비가 꿀을 딸 때처럼. 나비는 이 꽃 저 꽃 가서 따지. 1번 2번 순서대로 돌지 않아. 목장에서 소가 풀 뜯는 걸 봐도 여기저기 드문드문 뜯어. 그런데 책을 무조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다? 재미없으면 던져버려. 반대로 재미있는 책은 닳도록 읽고 또 읽어. 그 기나긴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도 나는 세 번을 읽었어"(43페이지)
<유언이라는 거짓말> "이보게. 사람들이 죽을 때는 진실을 얘기할 것 같지? 아니라네. 유언은 다 거짓말이야... 진짜 전하고 싶은 유언은 듣는 사람을 위해서, 듣는 사람을 믿지 않기 때문에 거짓말로 한다네" 그러니 당신의 유언을 들을 때는 있는 그대로의 정직을 기대하지 말라고 했다. 듣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얘기를 할 작정이라고(53페이지)
"묻는 자로서 저는 어떤 질문을 경계해야 합니까?"
"내가 제일 무서웠던 사람이 있네. 내 글을 읽고 강원도에서 벌을 치던 사람이 꿀 항아리를 가지고 찾아왔어"
'글 쓰는 것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습니다'
다짜고짜 그러더군
'선생님, 문학이란 무엇입니까.'
"나는 이런 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제일 무서워. 빅 퀘스천이지. 문인에게 다짜고짜 '문학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사람은 문학을 못하네. 그런 추상적인 큰 질문은 무모해. 철학자에게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아인슈타인에게 '과학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보면 대답할 수 없어"
"꿀벌 장수는 어떤 답을 듣고 갔나요?"
'자네가 가장 잘 아는 게 뭔가?'
'꿀벌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꿀벌을 잘 봐. 꿀벌처럼만 하면 좋은 문학이 돼. 개미는 있는 것 먹고, 거미는 얻어걸린 것 먹지만, 꿀벌은 화분으로 꽃가루를 옮기고 스스로의 힘으로 꿀을 만들어. 여기저기 비정형으로 날아다니며 매일매일 꿀을 따는 벌! 꿀벌에 문학의 메타포가 있어. 작가는 벌처럼 현실의 먹이를 찾아다니는 사람이야'(56페이지)
"지난밤에는 무엇을 하셨어요?" "글을 쓸 수 없어서,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있다네" "작고 아름다운 것들. 요즘엔 그런 것들로 공백을 채워나가고 있어. 세 줄로 된 글. 3행시라고나 할까"
발톱 깎다가 눈물 한 방울 너 거기 있었구나, 멍든 새끼발가락 (67페이지)
늙으면 한 방울 이상의 눈물을 흘릴 수 없다네. 노인은 점점 가벼워져서 많은 것을 담을 수 없어. 눈물도 한 방울이고, 분노도 성냥불 휙 긋듯 한 번이야
(69페이지)
하지만 나는 작고 사소한 이야기를 즐긴다네... 큰 얘기들은 다 똑같아. 큰 이야기를 하면 틀린 말이 없어. 지루하지. 차이는 작은 이야기 속에서 드러나거든. 디테일 속에 진실이 있다고(117페이지)
기록자들, 작가나 예술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야... 감추고 싶은 인간의 욕망, 속마음을 광장으로 끌어내 노출시키는 사람들이지(124페이지)
"성공한 사람 중에는 도움을 받기만 하는 '테이커 taker'보다 도움을 주는 사람 '기버 giver'가 많습니다. 그런데 요즘엔 도움을 주는 사람만큼이나 도움을 요청하는 '리퀘스터 Requester'도 중요하다고 해요. 사람들은 거절이 겁나 부탁을 두려워하지만, 실험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타인에게 도움을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거죠. 사회적으로 묻힐 수 있는 자원을 캐내어 유통시킨다는 차원에서, 부탁이 매우 역동적인 행위라는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마스크는 나를 위해 쓰지만 남을 위해서도 쓰잖아. 부탁도 그래. 나를 위해 하는 거지만, 그게 남에게도 유익이거든. 나는 남에게 부탁할 수도 부탁받을 수도 있어. 그걸 알기에 도와주는 거야. 반대로 남한테 부탁 안 하는 사람은 남의 부탁도 잘 들어주지 않아"
(131페이지)
"선생님, 럭셔리한 삶이 뭘까요?" "가장 부유한 삶은 이야기가 있는 삶이라네. '스토리텔링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럭셔리지. 똑같은 시간을 살아도 이야깃거리가 없는 사람은 산 게 아니야. 스토리텔링이 럭셔리한 인생을 만들어, 세일해서 싸게 산 다이아몬드와 첫 아이 낳았을 때 남편이 선물해준 루비 반지 중 어느 것이 더 럭셔리한가?" (153페이지)
글을 쓸 때 나는 관심, 관찰, 관계... 평생 이 세 가지 순서를 반복하며 스토리를 만들어왔다네. 관심을 가지면 관찰하게 되고 관찰을 하면 나와의 관계가 생겨... 젊었을 때는 관심이 최우선이었어. 사오십대 되니 관찰을 알겠더군. 늙어지니 관계가 남아
(155,157페이지)
성경은 참 새로워. 정말 새로워...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거든... 아흔아홉 마리 양을 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가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나... 그 한 마리 양이 아흔아홉 마리보다 뛰어날 거라는 생각은 왜 못하나? 아흔아홉 마리 양은 제자리에서 풀이나 뜯어먹었지. 그런데 호기심 많은 한 놈은 늑대가 오나 안 오나 살피고, 저 멀리 낯선 꽃향기도 맡으면서 제멋대로 놀다가 길 잃은 거잖아. 저 홀로 낯선 세상과 대면하는 놈이야. 탁월한 놈이지. 떼로 몰려다니는 것들, 그 아흔아홉 마리는 제 눈앞의 풀만 뜯었지. 목자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닌 거야. 존재했어?"
허공에 날아든 단도처럼, '존재했어?'라는 스승의 말에 뒷골이 서늘해졌다.
'너 존재했어?'
'너답게 세상에 존재했어?'
'너만의 이야기로 존재했어?'
(167페이지)
"신념이 위험한가요?" "위험해. 신념처럼 위험한 게 어디 있나?... 육탄 테러하는 자들이 다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네.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게 인간사인데 '예스'와 '노우'만으로 세상을 판단하거든. 메이미 maybe를 허용해야 하네. 메이비 maybe가 가장 아름답다고 포크너가 그랬잖아. '메이비 maybe' 덕분에 우리는 오늘을 살고 내일을 기다리는 거야" (174페이지)
"강화도에 화문석이 유명하잖아. 꽃 화자에 무늬 문자 써 화문석이거든. 그런데 나는 무늬가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더 좋아서, 그걸 달라고 했지. 그런데 그 무문석이 더 비싸다는 거야. 그래서 따졌네...
'이보시오. 어째서 손도 덜 가고 단순한 이 무문석이 더 비쌉니까?'
'모르는 소리 마세요. 화문석은 무늬를 넣으니 짜는 재미가 있지요. 무문석은 민짜라 짜는 사람이 지루해서 훨씬 힘듭니다'
인생도 그렇다네. 세상을 생존하기 위해서 살면 고역이야. 의식주만을 위해서 노동하고 산다면 평생이 고된 인생이지만, 고생까지도 자기만의 무늬를 만든다고 생각하며 즐겁게 해내면, 가난해도 행복한 거라네"
(179페이지)
"눈물 한 방울이 내가 전하고 싶은 마지막 말이라네"
"아... 88년 통찰의 결론이 눈물 한 방울이라는 말씀이지요?"
"그래. 이 시대는 핏방울도 땀방울도 아니고 눈물 한 방울이 필요하다네."
(213페이지)
"인간은 고난을 통해서만 자기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
"암 선고받기 이전의 선생님과 이후의 선생님도 그런 과정을 거치셨나요?"
"나도 마찬가지네, 뒤늦게 생의 진실을 깨닫게 된다네. 모든 게 선물이었다는 걸. 분명히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다 기프트였어. 우주에서 선물로 받은 이 생명처럼, 내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더라고"
(231페이지)
인간이라는 존재는 바깥에서 나를 바꾸도록 용납하지 않는다네. 남이 나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나? 남을 가르칠 수도 없고 남에게 배울 수도 없어(235페이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네. 나는 이렇게 외로운데 신은 얼마나 더 외로울까? 자네가 하나님 입장이라고 가정해보게. 얼마나 외롭겠나... 인간의 외로움과는 비교할 수 없지. 그래서 '하나님, 동무해드릴까요? 외로운 시간에 등이라도 긁어드릴까요? 옷자락이라도 들어드릴까요? ' 이렇게 물어본다네.... 하나님의 존재는 절대 고독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피조 세계 위에 홀로 서 계시잖아(255페이지)
<가장 슬픈 것은 그때 그 말을 못 한 것> "요즘엔 식구들과 모여서 어떤 이야기를 하시나요?" "최근에는 가족들과 서로 오해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고 했어. 딸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내고 나니 가장 아쉬운 게 뭔 줄 아나? '살아있을 때 그 말을 해줄걸'이야. 그때 미안하다고 할걸, 그때 고맙다고 할걸... 지금도 보면 눈물이 핑 도는 것은 죽음이나 슬픔이 아니라네. 그때 그 말을 못 한 거야. 그 생각을 하면 눈물이 흘러. 그래서 너희들도 아버지한테 '이 말은 꼭 해야지'싶은 게 있다면 빨리 해라. 지금 해야지 죽고 나서 그 말이 생각나면, 니들 자꾸 울어" (286페이지)
"눈감기 전에 꼭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네"
오래전에 숙명여대에서 신입생을 위한 강연을 하고 내려오던 길이었다고 했다. 여학생 한 명이 발을 동동 구르며 주차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추위에 얼굴이 파래져가지고, 나한테 꼭 할 말이 있다는 거야.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그러더군. '선생님, 돌아가시면 안 돼요!'
생뚱맞은 말에 나는 몹시 당황했네. 그래서 그만 차갑게 툭 던지고 말았지
'학생! 그게 뭔 소린가? 죽고 사는 문제를 어떻게 내 맘대로 하나?
그 여학생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슬퍼하며 돌아갔네.
선생님은 오래전에 스무 살이었던 그 여학생을 다시 만나 이야기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때 그렇게 매정하게 떠나는 게 아니었다고. 30분 넘게 추위에 덜덜 떨며 당신을 기다리던 그 아이에게 이 말을 했어야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