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PD가 바라본 세상, 열두번째 이야기
-순수한 마음은 곧 꿈의 연료이며, 감수성은 멋진 문학작품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유년시절 겨울이 되면 항상 해야 하는 작업이 있었다. 바로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드는 것, 두꺼운 도화지 위에 부직포를 붙여 트리를 만들어내고 누나는 옆에서 멋진 교회를 그려줫다. 그 위에 반짝이를 뿌려두면 손바닥 크기의 엽서는 어느새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연출 되곤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몇 백원 안 되는 돈을 투자해 부모님의 지갑을 뜯어냈으니 그 재미가 얼마나 쏠쏠했을까? 이번 연말에는 그 빚을 좀 갚아야겠다.
우리 누나는 그 카드를 가지고 라디오 사연 코너에 보내곤 했었다. 내용은 사춘기 소녀의 철통보안을 자랑하여 지금은 알 길이 없지만 꽤나 진지했던 것 같다. 추측컨대 그 속에 진심을 담아 보내면 마치 첫사랑이 이뤄질 것 같은 믿음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처럼 TV가 거실에 위치하지 않았던 시절엔 TV 시청권은 안방의 주인인 ‘아버지’였다. 그래서 안방이 닫힐 무렵인 밤 10시 이후에 젊은 감성을 달래줄 매체는 라디오가 유일했다. 밤 10시면 어김없이 별밤 시그널이 울렸다. 짙은 음색의 진행자는 밤의 감수성에 무게를 더해주었다. 당시 인기 프로그램이던 MBC ‘별이 빛나는 밤에’의 경우 지역방송국 기준으로 하루 200통 가량의 엽서를 받았다고 한다. 그 중에 15~6개의 사연이 소개되었다니 거의 웬만한 기업 신입사원 경쟁률 수준이다. 지금은 실시간으로 댓글을 보며 방송을 하는 세상에서 엽서의 경쟁률이라니 엄청난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요즘 이런 풍경이 인기를 타고 있다. 바로 ‘tvN’의 응답하라 시리즈가 그러하다. 이 프로그램의 코드는 순수했던 시절에 대한 ‘재현’일 것이다. 그리고 그 타깃은 시청자의 ‘감수성 자극’일 것이다. 요즘 나오는 ‘1988시리즈’를 보면 과거의 모습을 잘 재현해 놓았다. 담당 연출이나 무대, 소품감독의 안목이 돋보이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그런 소품들이 시청자로 하여금 당시의 채취, 온도까지 느껴지게 만드는 모양이다. 심지어 이 방송을 보고 있을 때면 라면이 그렇게 먹고 싶어진다. 나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꽤 되는 모양이다. 그래서 금요일 저녁이 되면 그렇게 엄마 생각이 난다.
사람의 감정은 뇌 중추에 위치한 변연계에서 관장한다. 포유류일수록 이 변연계가 커지는 특성이 있고 고등동물로 갈수록 감정도 복잡해진다. 애초에 인간을 만들 때 창조주는 왜 이렇게 우리 ‘감정기관’을 뇌 중심에 꼭꼭 숨겨 놓았을까? 감정이 기억의 복합체라고 한다면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자극을 변연계가 종합해서 감정을 드러내라고 한 것은 아닐까? 그만큼 사람에게 감정은 소중하니까.
감수성도 마찬가지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굳어져가는 뇌에서는 좀처럼 감수성이 뚫고 나오지 못한다. 그래서 타인의 일에 무덤덤해 진다. 혹자는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하지만 그런 무덤덤함은 또 다른 의미의 비극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필자는 감수성의 문이 열릴만한 매개체가 있으면 금세 거기에 빠져든다. 이런 ‘매커니즘’이 우리 안방극장에도 작용하는 걸까? tvN의 응답하라 시리즈는 그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감수성의 요체는 ‘순수함’이 아닐까? 세상만사 귀찮고 힘든 시절, 순수함이 있으면 그래도 살아가는 힘이 된다. 비록 드라마지만 응답하라 시리즈는 이 원칙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천수(天壽)를 누리더라도 ‘순수’가 없으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서른 중반을 넘어가는 지금도 순수함에 대한 열망이 가득하다. 어느덧 나이를 먹어가며 내 순수함도 내 머릿속 깊은 곳에 꼭꼭 숨어버렸지만, 어느 개그 코너처럼 감수성의 임금은 가끔 내 순수함을 풀어주지 않을까? 이런 우스운 상상을 해본다. 사실 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순수해 질 수 있는 젊은이들이 부럽다.
순수한 마음은 곧 꿈의 연료이며, 감수성은 멋진 문학작품을 만들어 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왜 젊은이들이 ‘꿈의 보고’이고 이 나라의 ‘미래’라고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감수성이 풍부한 시기를 보내는 이들은 얼마나 무궁무진 한가. 세상이 그대의 감수성을 무너트리려 할 때 당당히 외쳐보자! 내 감수성 돌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