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감정의 시간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L'Étranger)>은 시간의 흐름이 인간의 마음에 아무런 물결도 일으키지 못할 때 생겨나는 낯선 소외를 기록한 작품이다.
주인공 뫼르소는 시간에 대해 그 어떤 마음의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삶의 모든 순간에서 거창한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으며,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않은 채 오직 눈앞에 보이는 것과 몸으로 느껴지는 감각에만 충실하며 살아간다. 소설의 첫 문장은 그를 상징하는 선언이자, 이 작품 전체를 꿰뚫는 삶의 태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이 짧은 문장은 뫼르소의 무덤덤한 속마음을 곧바로 드러낸다.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커다란 일조차 그에게는 단지 일어난 하나의 사실일 뿐, 슬픔이나 충격이 되지 않는다. 그에게 시간은 의미가 차곡차곡 쌓여 역사를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그저 아무 뜻 없이 나열된 사건들의 연속일 뿐이다. 이러한 태도는 뫼르소의 시간이 어떤 마음의 흔들림도 없이 메마른 상태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감정의 무게를 덜어낸 채 오직 지금 이 순간의 물리적 자극에만 반응한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마주한 ‘태양의 시간’이다.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조차 남들이 하는 식의 애도를 하지 않는다. 슬픔을 바라는 주변의 시선이나 사회의 관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오직 자신을 괴롭히는 뜨거운 햇살과 참기 힘든 피로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빛으로 가득한 이 고장에서는 날씨가 너무 더웠다.'라는 그의 관찰은 그가 마음의 변화를 거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내면의 슬픔 대신 피부를 파고드는 열기만을 느낀다. 여기서 태양은 감정을 자극하는 통로가 아니라, 시간을 견디기 힘들게 만드는 물리적인 압박일 뿐이다. 그는 태양에 맞서지도, 그렇다고 열기에 저항하지도 않으며 그저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기다린다.
우리가 생각하는 장례식은 떠나간 사람과의 시간을 정리하고 슬픔을 나누는 자리다. 하지만 뫼르소에게 그 시간은 꽉 막힌 영수증 보관소나 버스 안의 후끈한 공기, 졸음이 쏟아지는 단조로운 풍경으로 나타날 뿐이다. 그는 어머니의 나이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고, 관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커피를 마신다. 이런 행동들은 그가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에게 시간은 오직 ‘지금, 여기’에서 몸이 원하는 요구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옛일을 떠올리거나 장례 예절이 끼어들 틈이 없는, 철저하게 단편적인 현재만이 그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뫼르소에게 '어제'와 '오늘'의 구별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어머니의 죽음이 어제였는지 오늘이었는지가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그에게 시간은 가치에 따라 순서가 정해지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장례식을 치르고 알제로 돌아온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여자친구와 해수욕을 즐기고 코미디 영화를 본다. 이 지점에서 독자들은 당혹감을 느낀다. 우리는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 일정 기간 '애도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뫼르소는 그런 사회적 약속을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생각해 보면 일요일이 하루 지나갔고, 이제 엄마의 장례식도 끝났고, 나는 다시 일을 하러 갈 것이고,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그의 독백처럼, 그에게 시간은 그저 매 순간 새롭게 주어지는 감각의 덩어리일 뿐이며, 과거의 사건이 현재의 즐거움을 방해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그는 슬픔이 아니라 자신의 살갗에 닿는 햇살의 뜨거움과 바닷바람의 감촉에만 집중한다. 이것은 도덕적 결함이라기보다, 흐르는 시간의 정직한 생얼굴을 대면하려는 뫼르소만의 방식이다.
살인 사건 이후 법정에 선 뫼르소는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해 구차한 변명도, 후회도 늘어놓지 않는다. 그는 법정이 바라는 '적절한 죄책감'을 연기하려 하지 않는다. 살인이라는 행위조차 그에게는 태양의 눈부심과 뜨거운 열기 속에서 일어난 갑작스러운 '사건'일뿐이다. 그는 죄를 설명하기보다 자신이 총을 쏘았다는 물리적 사실만을 인정한다. 사회는 그의 살인 자체보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그의 무심함에 더 큰 공포를 느끼고 그를 처벌한다.
뫼르소에게 재판 과정은 타인의 시선이 한 개인의 삶을 얼마나 왜곡된 방식으로 해석하는지 확인하는 시간일 뿐이다. 법정은 뫼르소가 살아온 과거의 파편들을 모아 사회적 상식에 부합하는 범죄자의 서사로 재구성한다. 검사와 판사는 그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보인 무관심을 살인의 동기와 연결하며, 개별적으로 일어난 사건들을 하나의 계획된 악행으로 묶는다. “이 사람이 자기 어머니를 매장한 바로 그 이튿날 가장 파렴치한 유희에 탐닉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라는 검사의 외침은 세상이 인간의 시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상은 언제나 겉으로 드러난 행동에 이유를 붙이고, 원인과 결과를 억지로 연결하며 도덕적 잣대를 들이댄다. 뫼르소가 사형을 선고받은 이유는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 아니라, 슬퍼해야 할 때 슬퍼하지 않는 것과 같이 사회가 정해놓은 감정의 규칙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방인(L'Étranger)>의 시간 속에서 가장 극적인 요소는 태양이다. 태양은 뫼르소의 모든 생각을 마비시키고 모든 존재를 열기 속에 증발시켜 버리는 힘이다. 그가 해변에서 방아쇠를 당긴 것도 결국 태양이라는 절대적인 시간의 상징 아래서 벌어지는 일이다.
'뜨거운 햇살이 뺨 위로 쏟아졌고, 땀방울이 눈썹 위에 맺혔다. 그것은 엄마의 장례식 날과 똑같은 햇살이었다. 그 뜨거움은 어제와 같았고,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뫼르소에게 태양은 곧 시간의 정지다. 너무나 강렬한 빛은 사물의 윤곽을 지워버리고, 인간의 이성적인 판단을 멈추게 한다. 해변의 뜨거운 모래 위에서 그는 시간의 흐름을 잃어버린다. 과거의 원한 때문이 아니라 오직 지금 이 순간 나를 찌르는 '빛의 칼날' 때문에 그는 움직인다. “나는 단지 태양 때문에 그랬다고 말했다.”라는 그의 진술은 인간의 행위가 얼마나 우발적이고 부조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는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도, 어쩌면 뫼르소의 총격처럼 단지 그 순간의 참을 수 없는 눈부심 때문에 일어난 일일지도 모른다는 통찰을 전하는 것이다. 뫼르소의 권총에서 발사된 다섯 발의 총성은 정적을 깨뜨린 파열음인 동시에, 그가 세상을 향해 내뱉은 유일하고도 주체적인 비명이다.
죽음을 앞둔 감옥 안에서도 뫼르소는 특별한 공포에 휩싸이지 않는다. 그는 단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이 사라지는 방식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그는 감옥 안에서 보낸 시간들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적응의 동물인지를 배운다. 처음에는 자유를 박탈당한 시간에 괴로워하지만, 곧 그는 자신의 기억을 되새김질하며 시간을 보내는 법을 터득한다.
'바깥세상에서 단 하루라도 살았던 사람이라면 감옥에서 백 년 동안 지내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기억할 것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는 감옥 안에서 기억을 분류하고 정돈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다시 세운다. 방 안에 있는 가구들의 위치를 하나하나 떠올리고, 나뭇결의 무늬와 먼지 한 톨까지 기억해 내는 과정 속에서 그는 외부의 시간이 멈춰버린 감옥 안에서도 자신만의 시간을 구축한다. 이것은 비참한 적응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기억의 힘'이 어떻게 정지된 시간을 견디게 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기억은 흐르는 시간을 정지시켜 영원으로 만드는 유일한 도구다. 마지막 순간, 그는 태양 속으로 사라지는 하나의 점처럼 자신을 느낀다. 죽음은 그에게 그저 물리적인 마침표일 뿐이다. 그는 죽음 앞에서도 자신이 지나온 무색무취한 시간들을 돌이켜본다. 삶과 죽음을 연결 짓는 거창한 이야기 없이 단지 시간의 연속성만을 끝까지 유지하려 한다.
'나는 죽음 앞에서도 그저 내가 지나온 시간을 생각할 뿐이다. 그 시간들은 내게 충분히 정직했다.'
결국 뫼르소는 죽음을 맞이하며 자신이 왜 그토록 무감각하게 살아왔는지 되돌아본다. 어머니의 죽음, 살인, 재판, 그리고 다가올 처형까지 모든 것을 지나가는 소나기처럼 여겼던 그의 시간들. 그의 내면은 어떤 마음의 파도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 고요한 수면 아래에는 '부조리'라는 이름의 진실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삶의 의미를 억지로 부여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흐르는 시간의 정직한 생얼굴을 가장 가깝게 마주할 수 있었다. 사제는 그에게 회개하라고 권하지만, 뫼르소는 죽음이라는 확실한 시간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외친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이나 엄마의 사랑이 내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모든 사람은 똑같이 사형 집행을 받을 권리가 있다. 너도 결국은 사형수와 다를 바 없다.'
그는 사제에게 쏟아낸 분노 이후에야 비로소 평온을 찾는다. 그는 사제가 말하는 내세의 구원이나 신의 시간 대신,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살갗을 스치는 시원한 새벽바람과 밤하늘의 별빛을 선택한다. 그는 자신이 행복했었다고 느끼며 세상의 무관심에 자신을 내맡긴다. 뫼르소의 시간은 끝내 마음의 색깔 없이 '흘러가는 사건' 그 자체로 남는다.
카뮈는 뫼르소를 통해 흘러간 시간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그 무의미해 보이는 시간의 축적이 결국 인간의 실존을 증명한다고 말한다. 시간은 인간의 마음이 있든 없든 멈추지 않고 흐르며, 인간은 그 흐름 속에서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여행자일 뿐이다.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었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았고 마침내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그럴듯한 포장도 필요 없이 흐르는 시간을 그대로 온몸으로 통과해 내는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붙잡으려 애쓰는 의미들이 모두 사라진 뒤에도, 태양은 뜨겁게 내리쬐고 시간은 묵묵히 제 갈 길을 갈 것이다. 뫼르소는 그 당연하고도 잔인한 진실을 향해 마지막 미소를 지으며 걸어갔다. 그의 메마른 뒷모습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과연 '의미'라는 가공된 안경 없이, 단 1분이라도 이 세계의 투명한 시간을 정면으로 응시할 용기가 있는가 하고.(수필/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