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트릭모디아노 -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by 세인트
문학동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과거를 잃어버린 뒤에야 비로소 현재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이름이 진짜 이름인지, 들고 다니는 신분증이 나를 가리키는지, 오래 다닌 동네가 정말 내가 살아온 곳이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패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그런 사람의 걸음을 따라가는 소설이다.


이야기의 시작에서 주인공은 이미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다. 그는 전직 탐정이지만, 이제는 남을 찾는 대신 자기 자신을 찾아야 하는 사람이다. 자동차와 전철, 오래된 전화번호부와 주소록, 누군가의 낡은 사진과 엽서, 한때 존재했던 이름들이 그의 앞을 스쳐 지나간다. 그 모든 것의 목적은 단순하다. “나는 누구였는가.”


이 질문은 보통 청춘의 철학적인 고민처럼 들리지만, 모디아노의 세계에서는 훨씬 더 물리적인 의미를 가진다. 주인공의 현재 이름 ‘귀 롤랑’은 사실 임시로 붙여진 것에 불과하고, 진짜 이름은 전쟁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는 다른 실종자들을 찾던 직업을 접고 이제는 자기 자신의 실종 신고서를 다시 읽는 사람이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을 떠올려 보면 그 정서가 더 분명해진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낯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눈앞에 카페 풍경이 그려지는 동시에, 이 사람은 이미 자기 존재를 자신의 등뒤로 밀어낸 사람이라는 인상을 준다.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은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시간에게서 밀려난 자의 자기 인식이다. 나를 증명해 줄 과거의 이야기들이 빠져나가 버린 자리. 모디아노는 그 비어 있는 자리를 따라가면서 시간이 흔적을 남기는 방식이 얼마나 모호하고 부서지기 쉬운지 보여준다.


특이한 건, 이 이야기가 전혀 격렬하게 쓰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폭력적인 장면이나, 극적인 고백, 큰 반전 대신, 소설 내내 안개 낀 골목 같은 분위기가 이어진다. 주인공은 탐정처럼 보이지만, 그가 하는 일은 대부분 '이름 하나를 더 알아내고, 또 다른 단서를 듣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나고, 길을 잘못 들어 돌아 나오는 일'이다. 그 느리고 삐걱거리는 조사 속에서 독자는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이 소설이 끝까지 도착하려고 애쓰는 곳은 완벽한 정답이 아니라 "어쩌면 이랬을지도 모른다”는 불완전한 가능성이라는 것을.


귀 롤랑이 추적하는 것은 사실 단 하나의 시간대다. 전쟁 전후의 파리, 점령과 박해의 시기, 누군가가 흔적을 감추어야만 살 수 있었던 시대. 그의 실종은 개인적인 사고가 아니라 역사의 어둠과 겹쳐진 실종이다. 모디아노의 소설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이 작품에서도 전쟁은 크게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주소, 호텔의 이름, 골목의 위치, 문패에 적힌 성씨 같은 것들이 그 시대를 증언한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한 문장이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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