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는 날까지 매번 '처음'을 경험한다.
자신을 잉태하고 태어나게 해 준 부모를 처음 만난 이후, 끊임없는 첫 만남이 이어진다. 양가 조부모를 비롯한 일가친척들, 옆집 뒷집 앞집 이웃들, 유치원을 비롯한 교육 기관에서도 새로운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나고, 군대를 가는 남성이라면 훈련소에서 시작해, 교관을 만나고 동기를 만나고 선임을 만나고 중대장을 만난다.
취업을 하게 되면, 동료, 선후배, 사수를 만나고, 사장을 만나고, 거래처 직원들을 만난다.
하지만, 모든 첫 만남이 살아있는 동안의 인연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우리도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날 날이 온다. 결국 첫 만남에서 시작된 인간의 운명은 처음 맞이하는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태어나서 처음 영화화를 전제로 하는 시나리오를 쓴 것은 처음이었다. 20년 가까이 다녔던 대기업에서의 이런저런 만남들과 작별을 고하기로 한 이후, 전 세계를 뒤흔든 팬데믹이 덮치고, 어느샌가 이직을 추진하기엔 경력도 나이도 무거워졌기 때문에, 이래저래 새 직장에서 새로운 첫 만남을 기약하기가 요원해진 참이었다.
집 근처 카페에서 호그와트와 해리 포터를 창조해 낸 J.K. 롤링을 롤모델로 삼았다. 뭐든 꿈은 높이 가지는 게 바람직하니까!
그렇게 집에서 가까운 스타벅스 지점 하나를 아지트로 삼아, 매일 커피 값을 지출하며, 맥북을 앞에 두고 어떻게든 시나리오를 완성하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번득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자판을 두드리며 내심 뿌듯해했다.
얄궂게도, 내 딴에는 참신한 내용이라고 생각한 극 중 상황과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왜인지 어디선가 이미 봤던 듯하고 들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9,000편 가까운 영화를 보며, 할리우드 키드이건, 씨네필이건, 영화광이건 간에 어쨌든 평생 '영화'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바탕으로, 영화 관련 회사에서 일했으니, 과장하자면 자나 깨나 영화 생각뿐이던 내가 이번엔 직접 시나리오를 써 보자고 도전했으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이미 누군가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기존의 영화들 장면들뿐이었다.
안정효 작가 원작, 정지영 감독 연출, 최민수, 독고영재 배우 주연 영화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1994년 당시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엔, 최민수 배우가 연기한 극 중 인물 병석이 연출한 영화가 기존의 유명 영화들의 장면과 대사들을 짜깁기한 괴작이었다는 설정에 놀랐고, 속으로 '나도 영화감독이 된다면 병석처럼 될 것 같다' 라며 스스로 비대해진 자아를 다독였다.
30여 년이 지난 후, 내용을 어렴풋이 기억하는 채로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나는 첫 관람 때와 다른 지점에서 더 크게 놀랐다. 영화 속에 버젓이 등장하는 <로마의 휴일 Roman Holiday(1953)><7년 만의 외출 The Seven Year Itch(1955)><벤허 Ben-Hur(1959)><라스트 콘서트 Take All of Me(1976)><개인교수 Private Lessons(1981)> 등 유명 영화들의 클립을 삽입하는 데 대한 저작권을 저작권자로부터 허락을 받은 것인지가 매우 궁금했다.
저작권자로부터 허락을 받은 경우, 영화가 끝나고 등장하는 엔딩 크레디트에 해당 영화의 제목과 저작권자를 명시하는 것이 당연한 관례이나, 이 영화의 크레디트에는 역시나 해당 영화들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태어나 처음 시나리오를 쓰면서, 또 일단 다 쓰고 나서, 역시 생애 처음 맞는 경험인 한국저작권위원회에 내가 쓴 결과물의 저작권을 등록했다. 영상화를 전제로 한 시나리오가 아직 나 이외에 누군가에게 선택된 상황도 아닌데, 저작권을 등록했다는 자체만으로 꽤 흥분했다.
내가 쓴 창작물에 고유 저작권 번호가 부여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뭔가 꿈꾸던 일이 실현된 것만 같은 설렘도 일었다.
그리고 영화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를 다시 떠올렸다. 혹시라도 내가 쓴 시나리오가 병석이 그랬던 것처럼 이미 어디선가 누군가의 생각으로 만들어진 영화 속 장면이 녹아들었을 수도 있겠다는 염려와 내가 쓴 창작물이 누군가에 의해 도용될지도 모를 일이라는 허황된 망상이 한데 뒤섞였다.
저작권을 등록한 내 생애 첫 시나리오는 그 이후 어떻게 되었냐고? 초고 완성 이후, 언제 끝날 지 기약 없는 수정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 물론, 초고에게 부여된 고유 저작권 번호는 아직 유효하다. 언젠가 세상에 선보이게 될 그날을 기다리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