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박정민 Jun 01. 2018

산 너머 산

영화 '변산', 두 번째 이야기

1. 


빠져 나간 영혼이 아직도 글자를 중얼거리는 육체를 보고 있었다. 

‘몸아 미안해. 하지만 네 안에 있을 수가 없어. 너 지금 엄청 구려.’ 



중얼거림이 끝났다. 이제 카메라와 함께 이경규가 들어오면 모든 게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경규는 들어오지 않았고, 작업실의 누구도 그 불행한 찰나의 고요를 깨는데 선뜻 나서지 못했다. 다들 이 상황에 가장 적절하고 예의 있는 단어를 찾아내는데 여념이 없어 보였다. 역시 동방예의지국이다. 한국 힙합 만세다.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앞으로 자주 만나 이야기하자는 방향으로 상황은 대충 수습이 됐다. 작업실을 빠져 나와 시동을 걸었다. 분당 수서로를 달리는데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고등학교 1학년, 랩 동아리에 들어가겠다고 오디션을 본 적이 있었다. 왜 랩 동아리에 들어가고 싶었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잘 나가고 싶었던 것 같다. 큰 반팔티와 큰 청바지를 입은 고등학교 2학년 형들이, 나란히 서있는 1학년들에게 좋아하는 가수가 누구냐고 물었다. 임창정이라고 말하려는 순간 친구들이 드렁큰 타이거, CB MASS, 원타임, 허니 패밀리 등을 이야기 하길래 나도 그렇다고 했다. 랩을 해보라고 했다. 


친구들이 드렁큰 타이거, CB MASS, 원타임, 허니 패밀리 노래를 할 때 난 오션의 ‘More than words’ 랩 부분을 불렀다. 이토록 감미로울 수가. 장내는 술렁였다. 생각지도 못한 감성래퍼의 등장에 다들 놀라는 분위기였다. 이경규가 들어올 타이밍이었다. 역시나 이경규는 들어오지 않았고, 난 방송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랩으로 치욕을 느낄 날이 또 올 줄이야. 차에서 한참을 웃었다. 술 먹고 노래방에서 랩을 한 나와 장단 맞춰준 강하늘과 그 랩을 들은 감독님과 그 옛날 큰 반팔티를 입은 형과 그 형 친구인 방송부장 형과 감미로운 오션까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네비에 쥐구멍이라고 쳐볼까. 이 길의 끝은 어디일까. ‘힙합플레이야’일까. 모르겠다. 힙합은 대들면 힙합 아닌가. 지금 당장 엄마한테 가서 랩 과외 받게 돈 좀 달라고 대들어야겠다. 그런 생각들로 밤새 달을 보다 해를 보고 겨우 잠에 드는 날이었다. 




2. 


엄마는 이준익 감독님을 참 많이 좋아한다.


“난 이준익 영화가 세상에서 제일 재밌어.” 


라고 한다. 그럼 아버지도 옆에서 “그 양반 영화 참 재밌지.”라고 거드신다. 때문에 감독님을 만나러 갈 때면 꼭 뭐라도 사가라고 다그치시는 두 분이다. 그럴 때마다 난 “아 내가 알아서 해요!”라고 한다. 물론 알아서 한 적은 별로 없다. 송구하다. 좌우지간 감독님과 또 영화를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두 분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뭘 잘했는지 모르겠지만 잘했다고 하셨다. 그리곤 무슨 영화냐 물으셨다. 


“변산이라는 영화요.” 

“이번에도 사극이니?” 

“현대물이야.” 

“제목이 꼭 사극 같다 얘. 주인공이니?” 

“뭐 그렇게 됐네요.” 


“무슨 역할이니?” 

“래퍼요.” 


엄마가 웃었다. 


“너 노래 못하잖아.” 

“아니 래퍼라니까.” 

“너 아빠 닮아서 노래 못해.”

 

한 번에 두 남자를 공격하는 엄마의 디스가 수준급이었다. 가만히 계시다 탈탈 털린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난 “너 어떡하니.”하는 엄마의 비웃음 서린 걱정에 힙합정신으로 대들고 싶었지만 십수년 전, 딱 한 번 들어본 아버지의 노래가 기억나 마음을 접었다. 그 때 부르신 ‘칠갑산’은 아직도 내게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그건 힙합정신 정도로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유전자는 강하다. 음악적 재능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부자지간이었다. 엄마의 수준급 디스 유전자로는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별 수 없었다. 연습만이 살 길이었다. 



3. 


혼자서 노래방에 다니기도 했다. 인적이 드문 노래방을 찾아 들어가 아는 랩이란 랩은 모조리 예약한 후에 한 시간 동안 부르고 나오곤 했다. 하얗게 불태우고 노래방 문을 나설 때 ‘이 새끼 뭐하는 새낀데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랩만 하다 나가지?’하는 사장님의 눈빛을 보고, 그 다음부턴 중간 중간 발라드 같은 것들을 끼얹기도 했다. 감성 래퍼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



현장에 다니는 차 안에서도 mr을 틀어놓고 중얼중얼 가사를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순간 운전을 하고 있는 매니저의 뒷통수가 보였다. 뮤직뱅크라도 잡아드려야 하나 하는 압박감을 느끼는 것 같은 뒷통수였다. 미안했다. 쟤도 감미로운 오션 노래 들으면서 운전하고 싶을텐데 뒤에서 형이라는 새끼가 ‘세상아 덤벼라. 다 죽일 거다. 힙합정신 췍췍.’ 하며 중얼거리고 있으니 얼마나 곤욕이겠는가. 영화가 끝나고 정토 수련원 같은 데라도 보내줘야 하나 싶은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부디 ‘정민이 형이 지가 정말 래펀 줄 아는 거 같아요.’라고 회사에 보고만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얀키형이 추천해주는 음악들을 많이 들었다. 평소엔 잘 모르던 외국 래퍼들의 음악을 많이 들었고, 꽤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이 어떤 영상을 하나 보여주는데 J Cole이라는 가수의 영상이었다. 


J Cole


그의 제스쳐가 멋있으니 한 번 연습해보라는 이유였다. 집에 가서 시키는 대로 연습을 하다보니 내 자신이 멋있게 느껴졌다. 당당히 거울 앞에 서서 다시 그 연습을 이어갔고, 거울 안에는 멸치 한 마리가 있었다. 순간 다시 한 번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고, 영혼은 멸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청 푸드덕 거리네.’ 


산 너머 산이었다.




* 다음화는 마지막 3화입니다. 많은 관심 감사 드립니다! 3화도 많은 기대 부탁드려요~ 

keyword
흑역사 가득한 고향 ‘변산’에 강제 소환된 빡센(?!) 청춘이자 무명 래퍼 ‘학수’ 를 연기한 배우 박정민입니다.
댓글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서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