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은 미국의 임상심리학자 앤 웰슨 셰프가 한 말이다. 누구나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부족하거나 아쉬운 마음을 느낄 때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그러나 심각한 죄책감과 수치심, 우울감을 느낄 정도로 스스로를 저평가하고 과도하게 채찍질하는 사람들이 있다. 완벽주의자들이 그렇다. 완벽주의자들은 목표는 높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기준과 현 상태 간의 괴리를 크게 느끼기 때문에 목표에 도달하도록 자신을 가혹하게 몰아붙인다. 객관적으로 정말 부족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덕분에 많은 성취를 이루기도 한다.
이들의 목표는 대체로 이루기 어렵지만, 목표를 이루더라도 만족감은 오래가지 않는다. 아무리 뭔가를 이뤄도 내면의 공허감과 부족하다는 느낌은 떨쳐지지 않는다. 그래서 완벽주의자들은 이를 극복하고자 더욱 높은 기준을 세운다. 완벽주의적 목소리는 자기와의 싸움만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하도록 한다. 사실 주변을 조금만 둘러봐도 나보다 어떤 측면에서든 잘난 사람을 반드시 찾아낼 수 있다. 어떤 분야에서 최고가 되더라도 언제든 누군가가 자신의 자리를 치고 올라올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다른 부분에서 부족한 점이 있기 마련이다. 완벽주의자는 자신에 대한 채찍질을 멈출 수 없다. 자기돌봄이라할 수 있는 운동이나 식단 관리, 외모 관리도 철저하다 못해 가혹하다.
완벽주의적 목소리는 어떤 성취를 안겨주기도 하지만, 부적응을 초래하는 경우도 많다. 완벽하게 잘하고 싶지만 그럴수록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물을 얻거나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커지면서 차일피일 미루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완벽해지려다 보니 실수나 결점은 없는지 세세한 부분까지 강박적으로 검토하다가 시야가 좁아지고 효율이 떨어질 수도 있다. 오히려 힘을 빼고 너무 애쓰지 않을 때 성취할 수 있는 것보다도 결과물이 좋지 않은 것이다. 혹은 이상적인 기준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자기를 비난하다가 어떠한 긍정적인 결과도 얻지 못한 채 수치심과 우울감에 깊이 침잠해 버릴 수도 있다.
이렇게 나는 부족하다며 다그치는 완벽주의적 목소리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자생적인 것일까? 물론 이러한 자기패배적 사고패턴이 한 번 생기고 나면, 이에 반하는 정보를 걸러내고 들어맞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면서 해당 패턴이 점차 강력해질 수 있다. 따라서 현 상태의 강력한 완벽주의적 목소리가 전적으로 외부에서 왔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근원을 거슬러 내려가다 보면 어린 시절을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대체로 완벽해야 한다는 목소리의 씨앗은 어린 시절 양육자(대개 부모)와의 관계에서 형성된다.
여러 가능성이 있지만 양육자가 학대했을 때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통제하고 요구적이었거나, 변덕스럽게 굴었거나, 방치했을 때, 즉 적절한 관심과 돌봄, 훈육을 제공하지 않았을 때 병적인 비난의 목소리가 무럭무럭 자랄 수 있다. 양육자는 아이의 요구에 적절하게 수용적으로 반응해야 할 뿐만 아니라, 아이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성장을 돕기 위해 때에 따라 규칙을 따르고 절제하도록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보호자의 행동 준칙은 아이에게 내면화된다. 이러한 기준은 ‘건강한 비판의 목소리’,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건강한 초자아가 된다. 건강한 비판의 목소리는 스스로를 가혹하게 내몰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방탕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는다. 지나친 엄격함과 과도한 허용 그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며 자신의 욕구와 정서에 ‘반응적’인 태도를 보인다.
지나치게 통제적인 양육자
지나치게 통제적인 양육자는 아이 입장에서 이루기 어려운 높은 기준에 도달하도록 요구한다. 칭찬에 인색하고 뭘 해도 못마땅한 눈초리를 보내거나 잔소리를 하고 체벌을 가하기도 한다. 이러한 반응을 늘 겪으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나중에는 양육자가 말하지 않더라도 알아서 자신을 깎아내리고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 채찍질한다. 아니면, 완전히 반대로 청개구리 같은 행동을 한다. 양육자가 요구하는 바와 무조건 반대로 함으로써 다른 의미에서 양육자의 요구에 얽매여 버릴 수도 있다.
변덕스러운 양육자
어떤 때는 가혹했다가 어떤 때는 지나치게 허용적인 태도를 보이며 왔다 갔다 하는 양육자도 있다. 어린아이는 순진하게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인지적 경향성이 강하다. 어떤 결과든 자신과 결부 짓는다. 누군가 자신을 부정적으로 대하면 자신이 못나고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부모가 사랑을 어떤 때는 줬다가 다른 때는 박탈을 했다면, 사랑이 박탈된 이유를 자신에게서 찾고, 더 완벽한 아이가 됨으로써 안정적으로 애정을 얻으려고 애쓴다.
학대하거나 방치한 양육자
양육자가 학대하거나 방치한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아이에게 ‘지나치게 관대한’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진정으로 관심이 없는 것일 수 있다. 양육자가 마음은 있었지만 여러 이유로 아이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것도 방치에 해당한다. 어릴수록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사랑받을 만한 존재인지 아닌지는 주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와, 나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성인들도 영향을 많이 받으니 하물며 아이들은 어떻겠는가). 그런데 누군가가 자신을 학대하거나 적절한 관심을 주지 않는다면, 아이는 특유의 자기중심적 사고를 통해 스스로가 관심을 받지 못하거나 학대당할 만큼 무가치하고 결함 있는 존재라고 느낀다. 외모나 능력, 친절한 태도 등을 통해 누군가로부터 갈급했던 관심을 조금이라도 받게 되면, 그 방면으로 자신을 몰아붙이는 완벽주의자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면의 혹독한 목소리를 잠재우고 자신을 적절하게 돌보는 건강한 목소리를 키울 수 있을까? 우선 자기 비난적인 목소리를 거리 두고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 자기 비난적이며 완벽을 요구하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너무 빠르게 흘러 지나가 버릴 때가 많다. 따라서 이를 말로 직접 하거나 글로 써보면 좀 더 객관화가 되면서 ‘지나치다’는 생각을 더욱 분명히 할 수 있다. 완벽주의적 목소리에 대해 반증하거나 반박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타자화하는 행위는 원래 이것이 내 것이 아니었음을 더욱 또렷하게 느끼는 데에는 분명 도움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완벽주의적 목소리에 대해 논박하는 과정에서 이에 더욱 얽매여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내면에서 전쟁을 벌이기보다는 건강한 목소리를 키워 주는 것이 더 나은 접근이라고 생각한다.
내 기분이 어떤지 묻는다
가장 기본은 의도적으로 잠깐 멈춰서 내 기분이 어떤지 자주 묻는 것이다. 양육자가 내 욕구와 감정을 무시하거나 외면해왔다면, 당연히 나 스스로로 나의 욕구와 감정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만한 가치가 없다고 여기며 무시하거나 상대나 상황이 요구하는 감정을 꾸며내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뭘 원하고, 뭘 느끼는지 잘 모르거나 혼란스러운 경우가 많다. 뭘 원하는지와 뭘 느끼는지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내가 뭘 느끼는지 일부러 자주 질문을 하는 버릇을 들이면 좋다. 감정이 잘 느껴지지 않을 때, 몸 느낌을 살펴본다. 마음과 몸은 이분법적으로 분리된 것으로 자주 간주되지만, 감정과 신체 감각은 연결되어 있다. 몸의 느낌을 해석하는 것이 곧 감정이다. 나의 감정을 묻는 것은 가혹하고 완벽주의적인 목소리에 대항하여 건강한 돌봄의 목소리를 만드는 기본 스텝이다.
불편한 감정이 느껴질 때 잠깐 멈추고 자신에게 다정한 말을 건넨다
죄책감이나 수치심, 우울감 등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때 잠시 멈춰 본다. 이럴 때 잘 관찰해보면 나를 보듬고 달래기보다는 혹독한 목소리로 나를 다그치고 있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슬퍼서 울기라도 하면 ‘나약하게 자기연민에 빠지지 말라’며 자신을 매몰차게 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일단 이를 자각했다면 이번에는 나에게 다정하고 따뜻한 말을 건네 본다. 누군가의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위로하는 말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직접 다정한 목소리를 내서 자신에게 말할 수도 있다. 쉽지 않겠지만 내가 사랑하는 대상, 즉 애인이든, 애완동물이든, 자녀든, 그들에게 할 법한 말을 애정 어린 연민을 담아 소리 내어해 보는 것이다. 혹독한 병적인 비판자와 함께 했던 세월이 긴 만큼, 이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앞으로도 숱하게, 의식적으로 자신에게 다정하고 따뜻한 위로의 말을 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연습을 통해 완벽주의적 비판자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그런 목소리가 들려오겠지만 다른 목소리를 통해 균형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인 욕구를 잘 채운다
기본적인 욕구를 잘 채우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힘들 때는 쉰다. 피곤하면 잔다. 배고프면 먹는다. 소변이 마려우면 화장실에 간다. 급하게 먹거나 움직이지 않는다. 적절하게 운동한다. 기본적인 것이 사실 제일 어렵다. 조금씩 참다가 어느덧 번아웃이 오거나 병이 드는 한계선까지 자신을 몰아붙이게 될 수 있다. 몸이 필요로 하는 욕구를 잘 살피면서 자신에게 반응적으로 대할 때, 연민 어린 다정한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될 것이다. 그런데 제대로 쉬는 것이 무엇인 줄 모르면 완전히 방탕해져 버릴 수 있으니 , 이는 경계할 필요가 있다. 한계를 정하는 것이 항상 박탈이나 고통과 연관됐기 때문에 자신을 위로하고 돌본다고 하면서 반대로 자신을 한없이 풀어놔버릴 수 있다. 배고프면 적당히 먹어야 하는데 폭식을 해버리는 것이다. 배고픔을 인식하면 건강한 음식을 준비해서 꼭꼭 씹어 먹고 배부름의 신호가 느껴지면 수저를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요즘 같이 날씬한 몸매를 요구하면서 음식으로 스트레스를 풀도록 독려하는 매우 모순된 사회에서는 특히나 어려운 일이다. 억제된 식욕이 완전히 폭발해버릴 수 있다). 건강한 한계를 설정하고 자신의 욕구와 감정에 반응적으로 대하는 연습을 하는 과정에서 점차 내면에 건강한 돌봄의 목소리가 단단하게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다.
곁에함께심리상담센터 대표/ 임상심리전문가 백소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