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소영 May 06. 2024

[심리학] 자아는 허상이다 - 이야기하는 동물, 인간

자아 '구성'에서 '이야기'의 역할

자아(self), 즉 나라는 개념은 허상이다.

혹자는 자아는 망상(delusion)이라고도 표현한다. 불교 담론에서 흔히 이런 유의 이야기를 한다. 현대 심리학에서도 이 명제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다. 자아는 ‘허상이니 집착하는 게 무의미하다’는 식의 선불교적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연속적이고, 일관적(안정적)이고, 단일하고, 고유한 존재'로서의 자아 개념은 '구성'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참고로, 자아가 구성되는 과정은 인식할 수 없으며, 원치 않는다고 자아를 내던질 수는 없다. (마음챙김 명상을 통해 자아 감각에 일시적으로 거리를 둘 수는 있다.) 자아가 '허상'임에도 불구하고 신체 예산을 효율적으로 쓰게 만드는 진화의 압력 속에서도 자아가 채택된 이유는 나름의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자아가 진화적 적응인지 진화적 부산물인지는 논외로 하겠다.) 여기서 자아의 기능에 대하여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지만 자아라는 허상(구성개념)은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등의 기능을 통해 우리 종의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어 왔다는 점은 분명하다.


다시 논의로 돌아가 보자. '나'라는 존재에 의문을 던져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이야기가 오히려 의아할 지도 모르겠다. 엄밀하게 따지면 자아는 연속적이지 않고 일관적이지 않고 단일하지 않으며 고유하지도 않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그럭저럭' 같은 사람 같다. 그러나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동일한 사람인가? 이는 심오한 철학적 질문이기도 하다. 특히 나이가 어릴수록 10년이라는 세월이 가져오는 심리적, 신체적 변화는 매우 크다. 10년이면 세포 수준에서도 정말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자아는 일관적이거나 안정적이지도 않다. 자아 개념은 '나는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루어질 텐데, 이는 본질적으로 인식과 기억의 문제이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나라고 생각하는 요소들은 부정확한 인식과 기억의 영향을 받으며, 심지어 강하게 확신하는 경험에 대한 기억조차 세월의 흐름에 따라 결코 정확하지 않다.


‘다중 인격’의 존재는 자아의 단일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만큼 극단적이지는 않더라도, 예를 들면 집에 있거나 편안한 사람과 있을 때와 사회생활할 때의 모습이 현저히 다른 사람들도 있다. 이런 경우 흔히 ‘사회적 가면’을 쓴다고 한다. 혹은 세상 다정했던 사람이 흥분하거나 화가 나면 매우 폭력적으로 변할 수도 있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라는 노래 가사는 하나의 단일한 존재로 나를 통합하기 어려울 때 흔히 느끼는 심경을 대변한다.


내가 얼마나 고유한지에도 얼마든지 도전할 수 있다. 간단한 사고실험을 해보자. 당신이 모글리처럼 정글에 살거나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태어났다면 지금의 당신이 될 수 있었을까? '내 취향'이나 '내 생각'이라고 말하는 것이 오롯이 당신 안에서 발견한 것일까? 나만의 고유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결코 고유하지 않으며 우리가 얼마나 주변 사람과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지는 많은 연구들에서 밝혀졌다. (자아의 높은 투과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나'라는 존재를 (대체로) 연속적이고 일관되고 단일하고 고유하게 인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에모리 대학 심리학 교수이자 신경과학자, 정신과 의사이기도 한 그레고리 번스(Gregory Berns)는 우리가 매끄럽게 연속되고 일관된 자아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야기' 덕분이라고 한다. 이를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 뇌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우리 뇌= 러프한 베이지안 뇌(베이지안 샘플러)

우리가 대상이나 상황을 인식할 때나 인식의 결과를 기억으로 저장하고 회상할 때 흔히 다음과 같은 가정을 한다. 사물이 거기 그렇게 있기에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 기억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저장한 후 '있는 그대로' 회상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처리 방식을 따른다면 우리의 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커져야 할 것이다. 너무 비효율적이라는 말이다. 자연선택은 엄밀함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럭저럭 기능하면서도 에너지를 절감할 수 있는 방식을 선호한다.


현재 '우리 뇌가 대략 베이지안 뇌와 같다'라는 이론이 신경과학 분야에서 가장 지지받고 있다. 베이즈의 정리(Bayes' theorm)조건부확률을 계산하는 방법 중 하나로, '후행 사건 B'가 일어났다는 조건하에 '선행 사건 A'가 일어날 확률에 관한 것이다. 베이지안 뇌 이론에 의하면 뇌는 끊임없이 '사후 확률'을 계산한다. 새로운 정보가 입력된 '이후'에 '사전 지식(믿음)이 일어날 확률(사전 확률)'을 갱신한다는 점에서 사후 확률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면, 우리 뇌는 어떤 사건에 대해 새로운 정보를 얻으면 그 정보에 근거하여 사전 믿음을 갱신한다. 여기서 '대략' 베이지안 뇌라든지, '베이지안 샘플러'라고 부르는 이유는 우리 뇌가 가능한 모든 확률을 엄밀하게 계산하지 않지만 대략 베이즈의 정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좀 더 나아가자면, 우리가 어떤 정보를 있는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학습한 사전 지식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무의식적 과정이 더 많지만) 확률적으로 가장 그럴듯한 결과를 예측(확률 계산) 한다. 그런데 사전 지식을 바탕으로 예측한 결과가 새로운 정보와 일치하지 않으면, 즉 예측에 오류가 발생하면 유연한 시스템에서는 이를 피드백으로 반영하여 사전 지식을 수정한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오래된 사전 지식이든 성향의 문제든) 사전 지식을 고수하는 경향이 강할수록(사전 확률이 강할수록) 사후 확률이 갱신될 가능성은 낮아진다.  


다음은 많이 알려진 '카니자 삼각형'이다. 우리가 논쟁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단순한 대상을 지각하는 과제에서조차 어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 지식을 바탕으로 구성한다(top-down processing, 즉 하향식 처리라고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림을 전체적으로 바라보자. 이 글을 읽는 당신이라면 반드시 가운데에 있는 하얀 정삼각형을 보게 될 것이다. 흐린 눈을 하고 삼각형을 주변시야에 두거나 억지로 시야를 좁혀 검정 부분에만 집중하지 않는 이상 하얀 정삼각형을 보지 않기란 어렵다. 그러나 하얀 삼각형을 구분 짓는 선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가 환영과도 같은 이 삼각형을 보는 이유가 뭘까? 우리에게 삼각형이라는 사전 지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태의 정보가 주어졌을 때 가장 가능한 해석이 곧 하얀 삼각형을 보는 것이다. 빨간약을 먹은 후에 이전 상태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삼각형을 배운 적 없는 어린 아이나 동물은 절대 볼 수 없는 하얀 삼각형 환영은 우리를 끈질기게 쫓아온다.


불완전한 기억과 인출

이렇게 인식된 정보가 입력되고 인출되는 과정은 어떨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컴퓨터에서 정보를 저장하고 인출하는 것처럼 경험을 '온전하게' 기억하고 떠올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사로운 일들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출생이나 죽음과 같이 중대하거나 중요한 사건이라면 10년 전 일이라도 '눈에 선하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한때 이러한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에 대한 기억을 '섬광기억(flashbulb memory)'이라고 불렀다. 전구에 불이 팍 들어오는 것처럼 개인에게 중요한 기억들이 뇌에 정확하게 새겨진다는 의미에서였다. 그러나 후속 연구에 따르면 섬광기억이라는 것도 시간에 따라 느리지만 확실히 정확성이 떨어진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제는 섬광기억이라는 표현은 부정확하다.) 다만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것은 사람들이 그 일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확신'이었다.


그런데 생물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 정보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저장하고 인출 방식은 훨씬 더 큰 뇌를 요구하는 매우 비효율적인 방식이다. 우리 뇌에서 감각 정보가 '지각'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 과정이 매우 빠르고 무의식적인 나머지 우리는 '통합된' 결과를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고 느낀다. 하지만 정보는 이를 구성하는 하위 요소, 즉 시각 정보, 청각 정보, 촉각 정보, 운동 정보와 같은 기본 단위의 정보들로 쪼개져서 눈과 귀, 피부 등 감각 수용기를 통해 '감각'되기 시작하며(시각 정보 또한 형태, 방향, 색깔 정보 등으로 쪼개질 수 있다.), 이러한 정보들이 뇌의 상위 수준으로 올라갈수록 점차 의미 있게 '통합'된다. 그리고 그 결과를 인식하는 것이 곧 지각이다.


정보가 저장되는 원리도 마찬가지이다. 통합된 후 지각된 정보 그 자체가 통으로 저장되는 게 아니라 각 유형의 정보 조각들이 이를 담당하는 뇌의 영역 여기저기에 흩어져 저장된다. 정보를 회상한다는 것은 파편적으로 분산 저장되어 있는 저해상도의 정보 조각들을 동기화하여 실시간으로 '재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방식으로 정보가 통합되는지는 여전히 신경과학이 풀어야 할 미스터리이다.) 온전한 정보가 아닌 저해상도 정보 조각들을 모으면 어쩔 수 없이 구멍이 숭숭 뚫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 뇌는 이러한 정보의 빈틈을 기억과 같은 내부 소스, 혹은 타인의 말이나 사진, 영상 등의 객관적 기록 등의 외부 소스를 이용하여 매끄럽게 채워 넣기 때문에 온전한 기억을 떠올린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다. (이러한 채워 넣기 과정이 병리적인 수준으로 심각하면 '작화증'이라고 부른다.)



정보의 빈틈을 메우고 효과적으로 정보를 기억하고 전달하는 방식, 이야기

아이들을 관찰하면 매우 어린 나이부터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고 시도 때도 없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는 온갖 이야기에 매혹된다. 소설이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소설이라는 장르 형태가 아닌 웹툰이나, 영화, 게임이라는 요즘 유행하는 형식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이야기를 소비한다. 우리가 이야기의 동물이라고 불릴 정도로 이야기에 빠져드는 이유는, 정보를 효과적으로 조직하는 뇌의 계산 방식인 '서사'를 만들어내는 압력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야기(story)'와 '서사(narrative)'를 엄밀하게 구분해서 쓰지 않겠다.]


삶은 사실 무작위적이고 통제할 수 없는 사건들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성적'으로는 이를 받아들이더라도 우리 뇌는 이를 믿지 않는 것 같다. 뇌가 정말로 이 사실을 '믿는다면(의식적으로 믿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앞날을 예측하는 데 모든 가능성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에너지를 써야만 한다. 서사(narrative)는 의미 단위로 묶이는 정보인 '사건'들을 인과적 순서대로 배열한다. 더 나아가, 우리 뇌는 정보에 '제한된 수'의 서사 구조를 부여하는 방식을 통해 정보를 효율적으로 기억하고 전달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우리 뇌는 정보의 조각들이 구슬이라면 이러한 구슬들을 몇 가지 제한된 유형의 '의미와 인과관계를 가진 궤적(서사)'으로 꿰는 계산을 수행하여 정보 처리의 효율성을 높인다.


몇 가지 서사 구조가 있느냐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그렇지만 제한된 수의 서사가 있다는 점에는 대체로 동의한다. 2017년 버몬트 대학교의 연구자들이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저작권 말료 도서를 무료 공개하는 프로젝트)에 올라온 소설 1,327권을 분석한 결과 오직 여섯 가지의 서사 구조만 존재한다고 결론 지은 바 있다. 이는 정말로 우리가 제한된 서사 구조만 만들어낼 수 있다기보다는 특정한 숫자의 서사 구조에서 의미를 느끼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여섯 가지 서사 구조를 벗어난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를 했을 때 감응하기 어렵고 기억에도 잘 남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누군가에게 나를 알릴 때, 그게 자소서이든 마케팅이든 간에 (좋은)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이다.]



최초 경험과 이야기의 중요성

저차적 수준의 감각 정보를 지각하는 것조차 '구성'되는 것이라면 당연히 자아와 같은 큰 개념도 구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아 개념을 형성하는 재료에 해당하는 정보들(여기서는 '서사적 자아'에 국한해서 이야기하겠다.), 즉 자신의 직간접 경험을 지각하고 기억하는 과정에 허술한 점들이 많아 엄밀하게 따지면 이러한 부정확하고 파편적인 정보들로 일관된 자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일은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이야기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이러한 정보들을 나름대로 매끄럽게 연결하여 대체로 연속적이고 일관되고 단일하고 고유한 자아 인식을 가질 수 있다.


개인 서사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는 경향이 대체로 삶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 때문에 괴로움에 빠지는 사람도 상당히 많다. 심하면 목숨을 끊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서사가 생존에 도움이 되는지 의문이 들 수 있지만 특정 개인에게는 문제가 될지라도 종 전체의 관점에서는 통계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소위 '자존감이 낮은' 사람을 들여다보면 거의 대부분 자아에 대한 부정적이고 경직된 이야기(부정적인 핵심 신념)를 가지고 있다. "나는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다", "나는 무능하다" 등이 그러한 예 중 하나다.


앞서 우리 뇌는 대략 베이지안 뇌라고 했다. 결국 사전 지식이 상당히 중요하다. 애초에 사전 지식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는 아직 신경과학의 숙제이다. 강렬한 한 번의 경험이 사전 지식을 형성할 수 있고 덜 자극적인 반복적인 경험들도 사전 지식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어떤 정보가 사전 지식이 되면, 이후 경험들은 사전 지식과의 '편차'로 해석된다. 다시 말해서, A가 사전 지식으로 자리를 잡으면, B라는 경험을 했을 때 그냥 B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A와 어떤 점이 다른지의 관점에서 B라는 정보가 한 번 여과되어 처리되는 식이다. (반복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이 과정이 꼭 의식적이지 않다.) 이렇게 사전 지식이라는 프레임에 의하여 새로운 정보가 선별적으로 처리되며, 기존 이야기의 선별적 힘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경향이 있다.


어린 시절에 겪은 경험이나 자신에 대해 들었던 이야기가 자아 개념을 끈질기게 구성하는 것도 이처럼 우리가 대략 베이지안 뇌를 타고나 초기 정보들이 앞으로의 경험을 해석하는 틀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육이나 첫 경험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오래된 이야기는 긴 세월을 거치며 더욱 공고화되어 변화에 저항하는 힘이 더 크다. 이뿐만 아니라 고집스럽거나 위험회피 성향이 강한 것과 같은 심리적 유연성이 떨어지는 '성향'도 경직된 자아 이야기를 쓰는 데 영향을 미친다.


그래도 희망적인 건, 나의 이야기를 다시 쓸 수 있다

그래도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 비록 현재 내가 쓰고 있는 나의 이야기는 변화에 저항하는 경향이 있지만, 절대 안 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새로운 이야기를 쓸 수 있다. 과거 경험에 대해서는 이미 지나가버린 일이긴 하나 새로운 의미를 발굴하거나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를 써볼 수 있다. 사실 더욱 중요한 것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이다. 지금과는 다른 궤적을 그리는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새로운 경험을 해야 더욱 적극적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새로운 이야기를 써나가기가 쉽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다양한 인생 서사를 가능한 한 많이 접해야 할 것이다. 익숙한 서사는 공감이 많이 갈 수는 있지만 기존 서사를 공고화할 수 있다. 예컨대, 스스로를 피해자로 여기는 사람이 피해자화된 서사를 탐닉할수록 자신에 대한 다른 이야기를 쓰기 어려워진다. 그저 정반대의 이야기를 접하라는 건 아니다. 되도록 다양한 이야기를 책이나 강연, 다른 사람의 경험담 등을 통해서 수집하면서 심리적 유연성을 키워나갈 필요가 있다.


심리상담이나 심리치료는 나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쓸 수 있도록 돕는 좋은 작업 방식 중 하나다. 혼자서 작업하기 어려울 때는 심리상담을 통해 도움을 받아보기를 바란다.



당신 곁에서 함께, 곁에함께 심리상담센터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 많은 지면이 필요한 큰 주제를 짧은 글로 다루기 무리라 생각되나, 굵직한 메시지가 어느 정도 전달되었기를 바랍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부의 원칙을 말하는 자기계발 인플루언들에게 빠지는 심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