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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스매니아 Nov 11. 2023

형법 제21조 제3항

평범한 가족이 싸움에 휘말렸다. 아니, 일방적으로 맞았으니 폭행의 피해자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어느 날 저녁 엄마, 아빠, 딸이 동네 식당에서 식사하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3~4명의 남성이 계산을 한 뒤 카운터 근처에 있는 우산 통에서 가족의 우산을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갔다. 아빠가 곧바로 이들을 쫓아 나가면서 “그거 저희 우산입니다. 이리 주세요.”라고 했다. 지극히 당연한 요구였다. 그런데, 술에 취한 남성들은 죄송하다며 얼른 우산을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아빠를 비웃으며 아빠를 상대로 무차별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가 이 사건으로 피해자 자격으로 경찰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경찰서에 가니 상대방도 아빠를 폭행으로 고소하였다면서 피해자 조사 후 바로 피의자 신분으로 또 조사를 받아야 한단다. 마땅히 처벌받아야 할 가해자가 도리어 피해자 행세를 하는 것 자체도 황당한데, 수사관은 상대방 남성들 중 한 명이 비교적 많이 다쳤다며 아빠를 추궁하기까지 한다. 아빠(나의 아빠는 아니다.)의 변호인으로 조사에 입회하였던 나는 이에 대해서 적절하게 제지하며 우선 조사를 무사히 마쳤다. 조사 입회 후 사건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 형법의 한 조문이 생각났다. 

      

제21조(정당방위) ① 현재의 부당한 침해로부터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法益)을 방위하기 위하여 한 행위는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벌하지 아니한다.

② 방위행위가 그 정도를 초과한 경우에는 정황(情況)에 따라 그 형을 감경하거나 면제할 수 있다.

제2항의 경우에 야간이나 그 밖의 불안한 상태에서 공포를 느끼거나 경악(驚愕)하거나 흥분하거나 당황하였기 때문에 그 행위를 하였을 때에는 벌하지 아니한다.

     

정당방위의 요건 중 상당성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경우 다시 말해 방위행위가 그 정도를 초과한 경우에는 형을 감경하거나 면제할 수 있는데, 그러한 상황이 밤 시간대 또는 불안한 상태에서 공포심, 경악, 흥분 또는 당황 상태에서 발생한 경우에는 유죄로 인정하되 형을 감경하거나 면제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처벌을 하지 않도록 규정한 것이다. 

 

형법 이론 중 기대(불)가능성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행위 당시에 구체적인 사정에 비추어 보아 행위자에게 위법한 행위 대신 적법한 행위를 하는 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그 사람을 비난할 수 없다고 보아 형사책임을 감경하거나 아예 부과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기대가능성 개념이 형법 조문에 구현된 것들이 몇 개 있는데, 형법 제21조 제3항 규정이 그중 하나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오래된 유명한 판례가 있다. 


결문에 드러난 사안의 사실관계는 다음과 같다. 50년 된 판결이라 표현이 예스러운 면이 있어, 가독성 좋게 문장을 다듬었다.

 

1) 피고인이 22:40경 배우자와 함께 극장구경을 마치고 귀가하는 도중 乙(19세)이 피고인의 조카 등 소녀들에게(음경을 내놓고 소변을 보면서) 키스를 하자고 달려들었음


2) 피고인이 술에 취했으니 집에 돌아가라고 타이르자 乙이 도리어 피고인의 뺨을 때리고 돌을 들어 구타하려고 따라오는 것을 피고인이 피하자, 乙은 피고인의 배우자를 땅에 넘어뜨려 깔고 앉아서 구타하였음


3) 피고인이 다시 제지하였지만 乙은 듣지 않고 돌로 피고인의 배우자를 때리려고 하였음


4) 그 순간 피고인이 농구화 신은 발로 乙의 복부를 한차례 차서 乙로 하여금 외상성 12지장 천공상을 입게 하였고, 乙은 사건 발생 후 약 45일 뒤 사망에 이름 


대법원은 이 사건에서 "피고인의 행위가 형법 제21조 2항 소정의 과잉방위에 해당한다 할지라도 위 행위가 당시 야간에 술이 취한 피해자의 불의의 행패와 폭행으로 인한 불안스러운 상태에서의 공포, 경악, 흥분 또는 당황에 기인된 것이라면, 형법 제21조 3항이 적용되어 피고인은 무죄이다."라고 판시하였다.(대법원 1974. 2. 26. 선고 73도2380 판결)


위와 같은 상황에서는 그 누구라도 피고인과 달리 행동하는 것을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도 같고, 일반인들의 법감정에도 부합하는 결론인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일가족이 싸움에 휘말리게 된 사건 관련해서 처리 방법을 고민하던 중 형법 제21조 제3항과 위 판례를 떠올리게 되자, 우리 사건도 형식적으로는 쌍방 폭행이지만 위 법리를 적용하여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 건강, 회사에서 짤리는 문제, 노부모 봉양, 젖먹이 아이 부양 등 눈물 쏙 빼는 읍소 위주의 양형 변론에 익숙하던 내게 간만에 법률적인 쟁점을 다룰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살짝 가물의 단비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사건을 같이 진행하는 변호사와 함께 이 사건은 형법 제21조 3항을 적용하여 무혐의가 되어야 한다는 취지의 변호인의견서를 작성할 준비를 하던 중, 변수가 생겼다. 


경찰조사 후 상대방 측에서  우리 쪽(배우자와 딸)이 우산을 휘두르며 폭행을 가하는 모습이 담긴 동영상을 증거로 제출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당방위나 형법 제21조 제3항의 적용을 주장하여 다퉈볼 만한 사안이었건만, 의뢰인들은 보다 안전한 길을 가길 희망했다. 결국 사안을 검찰에서 당사자들끼리 합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형사조정 절차로 회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형사조정 절차에서 서로 처벌을 원하지 않는 내용으로 다른 조건 없이 합의하였고, 사건은 원만히 종결되었다.  


법조인으로서 모처럼 법리다툼을 해 볼만한 사건을 맡게 되어서 의욕이 생기려던 참이어서 아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의뢰인의 뜻을 함부로 거역할 수는 없는 것... 무엇보다 사건은 원만히 해결이 되었고, 처분 결과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으니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이 글의 사례는 사실관계를 다소 각색한 것임을 밝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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