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토요판 '다른 삶' 2023년 08월 12일 연재
우리 둘째 아이의 출산 예정일은 2023년 8월 22일이다. 이 글이 연재되는 8월 12일을 기준으로 10일 정도가 남은 상태이다. 10달의 기다림을 지나, 아이는 곧 세상에 태어날 것이다.
둘째 아이가 우리 가정에 오기까지 4년의 시간 동안, 우리 부부는 가족계획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대부분은 의견 차이를 이해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많은 대화 중에 우리 부부는 분명한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냥 무조건 둘째가 있어야 한다’가 아니라, 무언가 심적 깊숙한 이해가 필요했다. 육아의 산을 한 번 더 넘기 위한 강력한 심적인 동기가 필요했다.
사실 우리 부부의 가족계획에서 베를린 생활을 떼어 놓고 생각할 수는 없다. 우리 부부의 결혼생활도 이곳에서 시작되었고, 육아도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낯설고 어색한 이곳에서 첫째 아이를 낳고 기르는 동안, 베를린에 사는 여느 사람들처럼 생활을 하고, 우리 아이도 베를린의 여느 아이들처럼 생활을 해 왔다. 만약 이 시간이 우리 부부에게 힘들고 아픈 기억이었다면 아마도 '다시 한번' 혹은 '두 번째'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무엇이 좋았고, 무엇이 아쉬웠는지 정도는 둘이 의논을 해야 했다.
우리 집 첫째 아이는 보통 저녁 8시에 잠자리에 든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내가 저녁 6시에서 6시 반 정도에 퇴근을 해 집으로 오면 아이가 잠들기 전, 오늘 하루 무엇을 하고 놀았는지 물어볼 수 있다. 일찍 잠든 아이는 아침에도 일찍 일어난다. 보통 7시쯤 나와 함께 일어나 30분에서 1시간 정도 시간을 보내다가 출근을 한다. 이렇게 조금씩이나마 아침저녁으로 아이와 마주하는 이 시간이 너무 소중한 일상이다.
이 일상을 유지시켜 주는 고마운 직장, 육아에 관련된 주제에 너그러운 사회적 분위기, 유아차에 관대한 배려, 많은 비용이 들지 않는 어린이집, 어딜 가나 자연과 가까운 주변 환경, 가족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가까운 이웃들 등등 사실 생각하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상의 단면들이 베를린이란 환경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언어나 사고방식 등 어른이 된 우리 부부는 아직도 이곳에서 생활하며, 혹은 새롭게 육아를 준비하며 마주해야 할 주제들이 많다. 특히 출산을 직접 몸으로 경험하는 아내야 말로, 민망한 순간들과 아주 가깝게 마주쳐야 한다. 꼼꼼하고 세심한 한국의 모든 의료 서비스는 이곳에 없다. 첫째 때 모든 걸 경험했음에도 아내는 지금도 이곳의 투박함에 내적갈등을 겪는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둘째를 향한 우리의 가족계획의 가장 큰 원동력은, 첫째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행복이었다. 때론 힘들고, 지치고, 피곤하고, 귀찮지만, 문득문득 이 아이로 인한 즐거움과 웃음은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행복이었다. 그것도 아주 중독성이 강한 행복이다. 첫째 아이와 함께 지낸 시간을 즐거움으로, 행복으로 느낀 것이 크게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우리 부부의 물리적 나이가 많은 영향을 미치기에 언제까지 마냥 고민만 할 수는 없었다. 생각보다 물리적 나이는 이미 일상 곳곳에서 많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날마다 성장해 가는 아이를 번쩍 앉는 것도 나날이 달라졌고, 놀이터에서 아이가 지칠 때까지 쫓아다닐 때도 느꼈다. 물리적 나이를 체감하는 속도가 더 빨라지는 건 가족계획에 좋지 않았다.
아내의 첫 번째 출산 때, 병원에서 하는 모든 문진에 특이사항 없음으로 아주 감사하게 답변을 했었다. 그중 하나의 예외사항이 있었는데, 그게 나이였다. 2018년 기준으로 만 36세 이상의 산모는 주의가 필요한 경계에 있었다. 그러니 꽉 찬 4년이 지난 지금은 더 자세하게 문진표를 작성해야 했다.
이런 문서들과 더불어 생각보다 가파르게 떨어져 가는 일상의 체력을 느낄 때마다 왠지 마음이 더 급해지곤 했다. 왠지 쫓기는 기분도 들고, 빨리 결정을 내려야만 할 것 같았다. 이 즈음만 해도 우리 부부는 마음을 먹는 게 어렵지 일단 마음만 먹으면 그다음은 자연스레 흘러갈 거라 믿었다.
첫째 아이가 워낙 생각지도 모르게 찾아온 우리 부부에게 둘째 아이는, 우리가 마음을 먹지 않았을 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맞이할 수 있다는 존재였다. 그러나 모든 출산과 육아의 단계가 그렇듯, 항상 그 뒤에는 많은 단계들이 더 있다. 그렇게 둘째 아이의 존재에 대해서 마음의 결정을 하는 것도 큰 산이지만, 마음먹은 후에도 여러 산이 더 있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해 보자는 마음다짐이 무색하게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우리 부부에게 별다른 소식은 없었다. 1년 반 정도의 시간의 시도 뒤, 의사분은 몇 가지 문진을 해주시고 명쾌한 진단을 내려주셨다. 우리 부부의 나이와 상황 등을 고려할 때, 6개월 이내에 자연임신이 되지 않으면 난임이라 설명하셨다.
다음 단계는 ‘정말로 난임치료까지 해야 할까’였다. 베를린에서의 난임치료는 치료과정에 대한 고충보다 심적인 장벽이 더 컸다. 언어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물론 있었고, 첫째 출산때와 마찬가지로 생소한 외국어로 겪는 생소한 경험은 불안을 만들곤 하기 때문이다. 무언가 잘못 알아듣거나 잘못이해할까 봐 매번 예습과 복습을 반복해야 했다.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무는 사이, 우리 부부는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라는 생각에 서서히 도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즈음에 우리 부부는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주어진 시간은 이제 다 된 것 같은 느낌에 끄덕였다. 가끔씩 지인들과의 자리에서 안부의 대답으로 나오는 말들을 통해 우리 부부는 스스로 현실을 재차 확인하며 그게 곧 생각이 되어가고 있었다.
때마침의 한국방문을 마치고 그런 마음으로 베를린으로 돌아가는 준비를 하는 사이, 갑작스럽게 둘째 아이가 찾아왔다. 그래도 임신테스트기의 두줄 반응은 처음이 아니었으니 신중하자 했다. ‘안정기’란 말에 괜히 있는 것은 아니니, 그때까지만 이라도 좀 더 지켜보자 했다. 우리 스스로도 어리둥절하니, 베를린으로 돌아가 병원에서 정확하게 검사를 하고, 의학적인 확답을 들을 때까지, 더 확실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뭔가 믿기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며 이리저리 다시 병원들을 찾기 시작했다. 아내는 베를린에서의 첫째 출산 경험을 통해 이곳의 시스템이 어떤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물론 한국만큼의 쾌적함과 친절함과 최신식시설은 바라지도 않지만, 조금이나마 나은 병원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베를린의 대부분 병원들이 그렇듯, 우리 집 주변의 산부인과 들도 신규환자와 기존환자를 구분한다. 산부인과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병원들이 신규환자로 등록하는 것에 민감한 편이다. 두 팔 벌려 환영할 것 같지만, 기존환자라야 예약을 받아주는 상황은 더 이상 아이러니도 아니다. 그렇게 우리는 결국 첫째 임신 때 갔었던 산부인과로 다시 가게 되었다.
첫째 임신 때 우리가 항상 가던 산부인과의 담당 의사분은 신중한 편이셨다. 나이가 지긋하신 이 분은 코로나 시간을 포함해 지난 4년 동안 정말 하나도 변한 게 없으셨다. 그 분과 그렇게 몇 번의 진찰을 하며 시간이 지나 공식적으로 임신 14주째가 됐을 무렵, 의사분이 우리 부부에게 물으셨다. 독일 법상, 14주 차부터 아이의 성별을 원하면 알 수 있다고, 우리의 의지를 물으셨다. 그리고 그날, 둘째를 위한 진찰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우리에게 축하한다고 하시며 활짝 웃으셨다. 우리 부부는 그제야 본격적으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덥디 더운 8월 말에 출산해야 하는 아내의 수고스러움은 더할 것이다. 안 그래도 더운 날씨에 아이를 뱃속에 데리고 다녀야 하니, 무릎이고 등이고 허리이고, 10달 동안 굉장한 무리를 해야 하니 말이다. 한국 방문 후 갑자기 살이 올라 계단에서 헉헉대는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프로와 같은 눈빛에서도 느껴진다.
첫째 때는 아무런 경험이 없어서 우왕좌왕했다면, 둘째 때는 벌써 아이가 있어서 우왕좌왕이다. 첫째 아이에게 처음 임신 사실을 알렸던 날이 생생히 기억난다. 특별히 아이가 좋아하는 저녁 메뉴를 먹으러 가 간신히 말문을 땐 우리 부부에게 아이는 울며 ‘베이비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울고 웃기를 반복하는 아이를 보며 애처로운 마음은 더 커져만 갔다.
때로는 혼란을 느끼기도 하고, 대성통곡을 하기도 하고, 때를 쓰기도 하고, 기대에 부풀기도 한다. 그렇게 몇 달의 시간이 지나 첫째 아이가 ‘기분이 좋을 때’, 둘째 아이의 태명을 부탁했다. 그리고 스스로 둘째 아이의 태명을 ‘폴리’라고 불렀다. 어디서 들은 이름인지, 어느 만화 속 인물의 이름인지, 언젠가 불러본 이름인지 알 수 없지만 그저 그렇다니 그럴 뿐이다.
베를린에는 산후조리원도 없고, 지척에서 달려와 줄 조부모님도 없다. 출산 후, 병원에서는 평균 3-4일 만에 집으로 퇴원을 해야 한다. 그리고 마침 여름휴가철이라 주변의 지인들도 모두 부재중인 지금, 아마도 둘째의 출산은 우리 3명의 가족이 오롯이 마주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눈치 없이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 현재의 직장생활에 너무나도 감사하다. 이번엔 육아휴직을 1달만 쓸 예정이다.
엄마가 되어가는 모든 과정을 담은 '엄마 수첩', 독일말로는 무터파스(Mutterpass)은 지금도 엄마의 가장 중요한 의학적 정보이다. 디지털 사본은 커녕 이걸 잃어버리면 곤경에 빠질 정도로 모든 임신과정의 변화들이 모두 들어 있다. 이번 주도 열심히 기록 중이다. 긴급하게 병원에 가게 되면, 무엇보다 이 수첩을 챙겨가야 한다. 이 수첩의 첫 번째 부분에 우리 첫째 아이의 기록이 담겨 있듯, 우리 둘째는 첫째가 밞았던 과정을 그래도 따라 세상에 나올 것이다. 출산 병원도 첫째 때 갔었던 병원으로 벌써 등록을 마친 상태이다.
언제 나오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둘째의 출산을 앞둔 요즘에는, 갑작스러운 아내의 전화가 한뜻 긴장된다. 말 그대로 스탠바이 상태로, 언제든 그 병원으로 엄마수첩을 들고 달려갈 준비상태이다. 다행히 평년보다 선선한 베를린의 여름에 부디 산모와 아내 모두 건강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