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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를린부부 Dec 09. 2019

독일 통일을 경험한 그들의 10대

by 베를린 부부-chicken

M은 나와 동갑내기로 서베를린 출신이다. 그녀는 동베를린의 경계와 상당히 거리가 있는 꽤 깊숙한 서베를린의 주거지역에서 태어나 자랐다.

통일되기 전, 그녀는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와 자주 에스반을 타고 다녔다 한다. 그녀와 그녀의 친구가 자주 타고 다닌 노선은 심하게 서독과 동독을 왔다 갔다 했는데 예를 들면 이번 정류장은 서독지역, 다음 역은 동독지역 이런 식이였다고 한다. 내가 “너네는 서독사람들인데 동독지역의 역에서 내리면 어떻게 돼?”라고 묻자 그녀는 “뭐하러 내려?”라고 답하고, 그녀의 친구는 까르륵 웃으며 “바로 잽싸게 다시 타야지!”라고 대답한다.


B도 역시 나와 동갑내기로 그는 드레스덴 출신이다. 통일되기 전까지 그곳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1991년 초등학교 3학년 때 독일이 통일되기 전까지 공산주의 사회에서 산 셈이다. 공산주의 사회의 초등학교 교육이 과연 어땠을까?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과 정반대로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내용을 배웠을까?

그가 설계한 작업들을 보면 ‘공공 공간’에 대한 중요성이 상당히 크다. 예를 들어 학교 건물이나 사무실 건물인 경우,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의 중요성을 상당히 강조한다. 투자자에 이루어지는 사무실 프로젝트일 경우, 건축주인 투자자님은 항상 효율에 집착하신다. 투자 대비 최대한의 이윤을 기대하는 건 자본주의에서 아주 당연한 ‘명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모두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광장이나 공공공간을 위해 건물의 일부분을 ‘쾌척’한다. 흔히 이런 시도가 건축주에 의해 무시당했을 때 건축가들은 건축주의 건축적 소양이 어쩌니 하는 비난을 하곤 하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적 선택에 의한 결과이다.

언젠가 맥주 한잔하는 자리에서 B와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러자 그는, 예상된 질문에 대한 답변에 답하듯이, “당연하다”라고 이야기하며 우리가 사는 도시의 공공공간의 중요성에 대해 아주 강한 확신을 들려주었다. 이런 그의 생각이 나와 다른 사회제도 교육으로 인한 것인지는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어쩌면 그의 삶을 너무 단순하게 바라보는 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사람이야’라고 말할 때 ‘남쪽이야? 북쪽이야?’라고 반문하는 사람은 보통 북한에 대한 인지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덧붙여 질문하곤 한다. ‘북한에 가봤어?’ 그럼 대화의 끝이 저 멀리 다가온다.


남한 사람은 북한에   없어. 그렇지만 한국인이 아닌 너는   있지.’


이런 대화에 익숙해진 사람에게 위의 M과 B는 신선하게 뇌를 자극한다. 내가 배운 ‘분단’의 개념이 이곳의 ‘분단’의 개념과 많이 다르기도 하지만 그냥 무덤덤하게 듣는 개인적 일상의 공유이기 때문이다. ‘베를린 장벽’을 보기 위한 많은 전시시설들은 분단 당시의 상황을 굉장히 치열하게 기억한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했고 상처로 남았다. 그리고 지금도 베를린의 도시를 걷다 보면 도시 구석구석을 황당하고 어이없게 가로지르는 장벽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아니 대체 누가 장벽을 이런 식으로 세웠단 말인가


그도 그럴 것이, 동독과 서독은 남한과 북한처럼 일체의 교류 없이 몇십 킬로의 거리를 두고 대치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동독에 의해 급하게 세워진, 말 그대로 건물과 건물 사이, 골목길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사람들의 통행을 막은 ‘벽돌담’에 의해 분리된 것이니 심리적 거리는 물리적 거리보다 훨씬 가까웠을 것이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 보니 오늘부터 윗동네에 못 간다는 식으로 말이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처럼.


한국인인 내가 목격한 유일한 북한은 군 복무 시절, 민간통제선 멀리서 콩보다 작은 점으로 본 것이 전부이다. 북한은 그만큼 가깝고도 아주 먼 나라다. 최근 훨씬 부드러워진 남북한의 관계를 반영하듯 여러 매체를 통해 접하는 북한 도시의 모습은 동베를린에서 자주 목격한 도시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 널찍한 가로를 두고 양쪽에 가지런히 늘어선 대로변의 모습은 동베를린의 모습과 아주 흡사하다. (물론 소련의 영향이다. 어쨌거나 소비에트 연합이 주조한 도시의 모습이니 말이다.) 평양의 모습은 동베를린의 모습보다 이질적이거나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특히나 영화 ‘베를린’에도 등장했던 지하철 역들은 북한의 지하철 역들과 아주 유사해 보인다. 뭐 사실 북한 사람과 말을 섞을 수가 없으니 직접적인 정보는 하나도 없지만 시각자료들로 간접 경험하는 평양은 인스타그램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사회주의를 배경으로 한 여느 도시들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불과 몇 해만에 이루어진 화해 모드로 광속 통일을 이룰 거라 생각지는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이제는 ‘언젠가 북한을 가볼 수도 있겠다’는 바람을 살짝 가져본다. 여느 유럽 국가처럼,  나라 들르듯 지나갈 수만 있어도 그게 어디인가. 기차로 한국에서 유럽까지의 여행이 가능해진다고 생각하면 그만으로도 멋지다.

 

M과 B처럼 내가 살아있는 동안 이 멋진 여행을 경험할 수 있을지, 아님 이런 하찮은 기록들로 나의 딸의 세대에게 고스란히 넘겨줘야 하는지 며느리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지만 어쩌면 아날로그부터 디지털로 넘어가는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 기술발전의 감동적인 장면을 느낀 것처럼 통일에 대해서도 그 비슷한 경험을 한 번 더 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The Gedenkstätte Berliner Mauer / 1998

베를린에 손님이 오면 항상 들르는 곳이다. 베를린 장벽의 흔적을 공원의 일부로, 전시공간으로, 조각품으로 다양하게 경험할 수 있도록 계획된 공간들이다. 위의 사진처럼 장벽이 지나가던 방향으로 서서 보면 20여 년 전처럼 왼쪽과 오른쪽이 '분단'되어 보이지만 밑의 사진과 같이 조금만 옆으로 비켜서면 사람도 지나갈 수 있을 만한 틈이 보인다. 보는 관점에 따라 과거와 현재를 이야기해주는, 가볍게 무거운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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