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때는 기원전 208년 중국 진(秦)나라. 그러니까 진시황이 죽기 2년 전이었다. 진나라의 전권을 틀어쥐고 온갖 폭정을 일삼던 환관 십상시 중 최고의 권력자는 바로 조고였다. 환관 조고는 사자성어 지록위마를 낳은 인물로 일찍이 진시황의 환심을 얻어 권력을 독차지한 후 온갖 폭정을 일삼은 자였다. 그는 진시황이 죽자 유서까지 거짓으로 만들어 태자 부소를 폐하고 황자 호해를 황위에 올려 사실상 황제의 버금가는 권력을 누렸다.
어느 날 조고가 국정회의인 어전청정에 불참하는 일이 있었다. 진시황은 한 번도 회의에 빠진 적이 없는 조고의 불참을 이상하다 여겨 간의대부를 시켜 알아보게 했다.
간의대부가 아뢰었다.
“조고는 나이가 연로하여 다리에 맥이 멸하여 걷지를 못하옵니다.”
“내 그리 정(停)을 취하지 말고 동(動)하라 하였거늘 이는 짐의 말을 듣지 않은 데 있다.”
진시황은 매우 노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애석하게 생각하여 황의를 시켜 백첩약제를 내렸다. 또한, 교서를 직접 필서하여 조고에게 보냈으니 내용은 이러했다.
‘내가 조고에게 늘 동하라 명하였거늘 이를 듣지 않아 나라의 우환을 만들었으니 그 죄 매우 크도다. 그리하여 내 마지막으로 명하노니 즉시 행하라. 환관 조고는 매일 아침 십오 리를 뛸 것이나 대신 나이가 있으니 무리 없이 가볍게 뛰라. 그것을 필히 지킬 것인바, 짐이 다시 염려하여 명하노니 간부대신은 매일 살펴서 짐에게 고하라. 이를 어길 시에는 조고와 간부대신 모두를 팽형에 처할 것이다!’
조고는 황제의 지엄한 명을 어길 수 없어 이튿날부터 아침마다 뜀박질을 하기 시작했고 석 달이 지나 건강을 되찾고 황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훗사람의 판단이 건데 이 같은 진시황의 배려가 결국은 진나라가 멸망한 배반의 결과로 나타난 것임에 역설의 역사라 하겠다.
한편, 성의 백성들은 매일 아침이면, 권력에 아첨하며 백성을 도탄에 빠트렸음에도 황제의 명만을 받드는 조고의 엉성한 뜀박질을 일컬어 아침 '조'(朝)에 뛸 '깅(전해지지 않음)'이라며 조롱했다. 조고는 진시황이 죽자 마을길을 뛰던 조롱의 수치를 없애고자 2대 황제 호혜를 윽박 하여 '조깅'이란 문자가 들어간 모든 문서는 없애라 하였다. 정사에는 기록이 없고 야사로만 전해져 오니 이를 2차 분서갱유라 한다.
이때 당시 상서, 문서를 주관하던 녹장서사 대신이 아뢰길, "낮과 저녁과 밤, 하루의 때가 그러하듯 '아침 조'는 매일 저절로 돌아오는 것이라 백성이 쓰지 않을 수 없고, 반면 '깅' 자는 온 백성을 뛰지 못하게 법으로 강제하면 저절로 없어지는 것이라 '깅'만 없애는 것이 현명하다." 하였다. 이에 조고는 "이치에 매우 합당하여 한 치도 그르지 않다" 하고 그리하라 명하였으니 이후 문서에 '조'는 남고 '깅' 문자만 사라지고 말았다.
960년 건국한 송나라는 1040년, 화약발명 후 최고의 국가 부흥기를 맞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막강한 해상장악력을 지니게 되었고 국제무역항이었던 영파(寧波)의 항주만(杭州灣)을 중심으로 전 세계와 문물 교류가 이어졌다. 특히 당시 유럽의 해상권을 장악하던 영국은 전세계 식민화 정책으로 왕실까지 발벗고 나섰으니 송나라와의 교역이 더욱 활발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마다 전함에 화약을 싣기 위해 뛰어다니던 송나라 병사를 본 영국 왕의 이복동생인 라이어 아임스 백작이 "저들은 아침마다 뛰는 이유가 무엇인가?" 물었다. 이에 역관이 "전함은 각기 목적항에 따라 아침과 저녁에 출항을 하는데, 북항함은 아침이고 남방함은 저녁이지요. 그래서 화약도 아침, 저녁으로 나눠 각기 싣는데, 굳이 일컫자면 화전군(火箭軍)이 아침에 화약을 지고 뛰는 것을 조깅이라 하고 저녁에 뛰는 것을 석깅이라 하나, 애석하게도 '깅'의 글자가 진나라 때 소실되어 이후 구전으로만 전해 올 뿐이오." 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던 라이어 아임스 백작은 당시 송나라 황제인 인종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화약 수입 확대에 대한 회담이 끝나고 행(行) 하나 서(書) 하지 못하는 '조깅'에 대해 물었다. 그에 인종은 "나랏 말쌈이 진(秦)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로 소못디 아니할 새, 이런 전초로 어린 백성이 니르고자 홀 배 이셔도 모촘내 제 뜻을 시러펴지 못할 노미 하니라. 내 이를 어여삐 녀기긴 하나 진귁의 법도 법이라 어길 방도가 없으매 영귁 왕이 니르고자 홀 모음이 이시믄 친히 문자를 맹글어 쓰라" 하였다.
영국에 귀국한 라이어 아임스 백작은 헤럴드 1세 왕에게 회담 결과를 보고한 후 송나라 황제의 말을 전하였다. 헤럴드 1세는 이를 듣고 매우 안타까워 하며 "송나라 황제의 애석함이 실로 간절하다. 왕립 국어원에서는 즉시 조깅을 우리 문자로 만들어 브리테니커 사전에 올리고 전국에 전파하라. 또한 쓰는 데 행하지 않으면 그도 의미가 없으니 국민들에게 아침마다 뛰기를 권장하라. 하였다."
왕립국어원에서는 중국의 조깅을 발음 그대로 음차한 단어를 만들기에 착수했다. 한동안 'g'를 하나만 넣을 것인가, 둘을 넣을 것인가라는 문제로 왕권파와 의회파의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두 개를 넣는 것이 보기에 좋다는 의회파의 주장을 수용하여 'Jogging'으로 확정하였다.
왕립국어원에서는 사전에 등재함과 동시에 전국에 전파하고 아침에 뛰라는 왕명도 전하였다. 이후 영국에 전 국민이 아침에 뛰는 문화가 정착하였고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는 산업자본가들은 신발(조깅화)과 옷(조깅복)등 파생상품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이익을 탐하는 산업자본가들은 영국에 그치지 않고 유럽 전역을 누비며 건강특화 운동이라는 마케팅으로 조깅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관련 상품을 팔았으니, 삽시간 전 세계에 열풍으로 번져나간 것은 이를 말도 아니다.
이렇게 조깅은 영국에 의해서 전 세계에 퍼지며 조깅 관련 상품으로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었다. 이를 전해 들은 송나라 인종은 사치마 가루 묻은 손가락만 빨며 이렇게 한탄했다 전해진다. "오호라 통제여. 조깅은 원래 내 것이거늘 대국의 지엄한 도리가 있어 이미 준 것을 어찌 다시 거두며 내 것이라 하겠는가? 이는 저잣거리의 어리석은 농투성이가 한 시진 지나도록 죽을 쓰고는 개에게 준 것과 진배가 없도다." 하였다. '죽 쒀서 개 준다.'는 속담도 여기에서 비롯된 말이다.
조깅의 유래가 이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