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알아가는 중입니다
오래전에 출간된 책 한 권 받았다.
“우리 집에 두 권이 있더라고요. 이제 형제들이 한 권씩 가지게 되었어요.”
한국 방문에서 만난 형님은 내게 시아버지가 쓴 책을 건넸다. 300페이지가 넘는 도톰한 책을 열자 출간에 맞춰 지인들에게 보낸 메시지가 적힌 종이 한 장이 나왔다. 군인이었던 시아버지는 중령으로 예편 후 우즈베키스탄으로 떠났다. 그곳으로 강제 이주한 고려인들을 돌보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다. 책은 그가 가족을 두고 일 년 간 혼자 우즈베키스탄에서 학생 선교사로 지내면서 남긴 매일의 기록이었다. 그 후 남편을 포함한 가족은 모두 서울이 아닌 우즈베키스탄에서 지내게 되었으나, 이 책을 낸 후 얼마 되지 않아 시아버지는 건강상의 이유로 소천하셨다. 오래전 세상을 떠난 그를 나는 결혼 전 현충원에서 사진으로 처음 만났다.
“아버지가 보고 싶고, 그립진 않아?”
“그리울 때도 있지. 하지만 나중에 천국에서 만날 테니까.”
아직 부모님 두 분이 살아계신 나는 남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 남편이 이야기해주는 그의 추억의 한 장면을 통해 만나지 못한 시아버지에 대해서 상상할 뿐이었다. 책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시누이에게 있는 한 권뿐이라고 들었는데, 해외파견을 마치고 돌아온 아주버님 댁에 한 권이 더 있을 줄이야.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보물을 받은 것처럼, 책을 꼭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책의 내용은 놀라웠다. 당시 그가 접한 우즈베키스탄의 문화, 사람, 날씨, 모든 것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시차도 다른 해외에서 일 년 간 매일 일상의 기록을 세세하게 남긴다는 게 얼마나 부지런해야 하는지 알고 있기에,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쓴 그의 글에 감탄했다.
“책 양이 많아서 나중에 덜어냈다고 하더라고.”
“세상에, 너무 놀라워요.”
“사실, 내가 많이 칭찬을 못해줬던 거 같아.”
나의 감탄에 시어머니는 멋쩍은 듯 웃으셨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가 하던 일을 시어머니가 받았고, 우즈베키스탄에서 오랫동안 그곳의 고려인들을 섬기셨다. 남편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집은 나만의 공간이 없는, 고아와 미망인, 모든 이가 함께 지내는 그런 공동체였다고 했다. 책에는 내가 만나지 못한 남편의 어린 시절, 가족과의 일화도 소개되었다. 시아버지는 오래전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글은 여전히 남아서 나는 그 안에서 그를, 갓 태어났을 때 무척 약했다는 어린 시절의 남편을 만났다. 살아계셨다면 글쓰기를 좋아하는 나와 대화가 잘 통하지 않았을까. 남편도 이렇게 글을 쓰면 좋을 텐데... 속으로만 생각했다.
“올해는 매일 블로그에 글을 좀 써볼까 해.”
남편에게서 먼저 그 이야기가 나왔을 때 흠칫 놀랐다. 나의 이상형은 책을 같이 있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남편에게 그 부분을 기대하진 않았다. 해외에서 오래 살았던 그는 한국어로 된 책은 좀 어려워하는 눈치였고, 꼭 같은 취미를 가지지 않아도 서로가 좋아하는 영역을 지켜주면 되는 거니까.
“오, 정말? 좋지. 글로 만나는 자기도 궁금해진다.”
“그림도 같이 그릴 거야.”
“너무 힘들지 않겠어? 일기 쓰듯 편하게 써요. 응원할게.”
작년 말부터 남편의 글쓰기가 시작됐다. 블로그를 오픈한 그는 매일 조금씩 글을 썼다. 원래 좋아하던 디지털 드로잉도 매일 하나씩 해냈다. 우리는 함께 100일간 매일 글쓰기 프로젝트에도 참여하며 서로의 글을 읽었다. 싱가포르로 장기출장으로 떨어져 있던 시간, 그가 블로그에 남긴 그날의 일상은 매일 아침 확인하는 안부였다. 남편은 지금까지 총 244편의 글을 썼다. 지난여름, 컨셉진의 프로젝트 에세이집 만들기를 그에게 추천했다. 매일 주어지는 단어에 맞춰 글을 써내면 책으로 만들어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는 주어진 주제와 정해진 분량에 맞춰 30편의 글을 썼고, 그 결과 우리 집에는 또 한 권의 책이 도착했다.
“엇, 제목이..... 진짜 이렇게 한 거야?”
“어때. 괜찮지?”
“아버님이 살아계셨다면 정말 좋아하셨겠다.”
1997년에 출간된 시아버지의 책과 2021년에 만들어진 남편의 책, 두 권의 책을 나란히 책꽂이에 꽂아둔다. <누가 고려인을 그곳에>와 <누가 믿음을 그곳에> 자... 다음 시리즈는 이제 소망과 사랑으로 가야 하나. 글쓰기에 재미를 붙인 남편은 이제 책을 읽고 리뷰를 쓴다. 처음 만났을 때 묘하게 어색한 한국어를 쓰던 그가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사람이 될 줄이야. 그의 글쓰기를 마음 깊이 응원하며, 나는 지금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그를 알아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