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프라브럼!
2004, 인도 콜카타행 기차 안에서
분명 하루면 도착한다고 했다. 인도 여행 3주 차, 매표소 직원들의 말은 절대로 믿지 않기로 했지만 이렇게나 49시간을 꼬박 기차에 갇혀서 지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오래된 기계 마찰음을 내며 무거운 기차가 몸을 움직였다. 객실을 나누는 문하나 없는 그곳에는 제일 아래 칸의 1층 침대, 낮이면 접어 등받이가 되어야 하는 2층 침대, 그리고 조금만 허리를 들어도 머리가 천장에 부딪히는 가장 저렴한 3층 침대가 있었다. 출발과 동시에 자기 자리를 찾아온 사람들로 모든 침대가 꽉 찼고, 나는 일찌감치 3층 침대 위에 누워 아래층에 엄마 옆에 꼭 붙어있는 큰 눈의 꼬마와 수줍은 눈 맞춤을 하고 있었다. 해가 진 시골길을 따라 창 밖은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기차 안에도 어둠의 시간이 찾아왔다. 기차의 덜컹거림을 따라 옅은 조명들이 흔들렸다. 1, 2층 침대에 누운 짙은 갈색 피부의 사람들이 이따금씩 입을 벌릴 때마다 하얀빛이 드러났고, 두 개씩 짝 지은 흰 동그라미들이 사방에서 깜빡였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몬도 그로쏘(Mondo Grosso)’의 가사 없는 연주 곡 <1974 –Way Home>을 틀었다. 음악을 배경 삼아 조명에 빛나는 흰 점들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순간 기차의 흔들림이 비트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나는 공연장에 온 것 같은 몽환 속에서 덜컹덜컹 춤추는 듯 눈을 감았다.
기차에서는 밤이 서둘러 오는 대신 아침도 일찍 찾아왔다. 부지런한 승객들은 이미 2층 침대를 접고는 1층 침대에 나란히 앉아 창문 밖 떠오르는 해를 맞고 있었다. 나도 ‘기차 여정의 반쯤은 지났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눈을 떴다. 아래층 꼬마와 눈이 마주쳤지만, ‘밤새 춤을 춘 덕분일까’ 나는 몸을 쉽사리 일으키지 못했다. 그 사이 낡은 기차엔 새로운 풍경들이 펼쳐졌다. 화장실을 찾아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는 사람, 1층 침대 아래 밀어 넣었던 어마어마한 짐들을 꺼내 정리를 하는 사람, 카드를 꺼내 게임을 시작한 사람들, 그리고 언제쯤 나한테 말 걸어볼까 하며 내가 일어나길 기다리는 아랫집 꼬마의 가족들까지.. 여전히 해가 떠오르고 있는 이른 아침이었지만 올려다보는 여러 눈길에 못 이겨 나는 결국 몸을 일으켜 1층 침대로 내려가 앉았다. 그렇게 가족들과 인사하며 더듬더듬 소통을 하고 있는데 덩치가 큰 승무원이 나타났다. 나는 서둘러 검표를 하고 있는 승무원에게 물었다.
“캘커타(Kalata)까지는 얼마나 걸리죠?”
“캘커타요? 음.. 도착하기 전에 안내 방송이 나올 겁니다.”
우문현답을 듣고 나자 통로에 짜이 파는 소년이 나타났다. 마치 ‘인도인들이 매일 아침 짜이를 마시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 마냥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짜이를 한잔씩 주문했다. 무광의 작은 갈색 황토 컵에 담긴 기차표 짜이는 길거리 짜이 가게나 식당에서 유리컵에 파는 그것과는 달랐다. 달달한 짜이 한잔으로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데 ‘퍽!’, 갑자기 내 정신을 한방에 돌아오게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짜이를 다 마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열린 창문 밖으로 컵을 던지고 있었다. 깨지기 쉬운 황토 컵은 곧장 창 밖으로 날아가 기찻길 바닥에서 산산조각이 되었고,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놀란 나와 눈이 마주친 꼬마의 엄마가 미소를 지었고 우리는 함께 빈 짜이 컵을 창 밖으로 던졌다. 옆에 있던 꼬마가 까르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기차는 또 다른 모습의 인도였다. 배가 고프다 생각이 들 때면 어김없이 도시락 판매원이 지나갔고, 정차할 때면 창문 밖으로 수많은 꼬마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아이들은 까막눈인 나에게 힌디어 신문을 강매하려고도 했고, 내가 좋아하는 튀김인 사모사(Samosa)를 비롯해서 다양한 요깃거리를 팔았다. 부모를 따라온 아이들, 동생을 업고 있는 아이들, 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팔이 그 작은 창문 틈으로 수없이 오고 갔다. 튀긴 콩 한 접시를 받아 든 1층 침대의 꼬마가 순간 다르게 느껴졌다. 저 앞에 식당칸까지 달려 있는 일등석에서 우리를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반대쪽 침대도 없는 딱딱한 의자 석 풍경도 아니, 몰래 탄 사람들이 있는 화물칸 풍경도 모두 다 다른 모습이겠지.
내가 이렇게 기차 속 또 다른 세상에 익숙해가는 동안 매표소 직원이 말했던 그 하루의 시간은 금세 지나가 버렸다. 기차는 여전히 쉬지 않고 어딘가를 향해 달렸고, 나는 3층 침대에 누워 두 번째 어둠 속 공연을 맞이했다. 어김없이 다시 새로운 해가 떴고, 어제보다 더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아침을 맞이하던 많은 사람들이 내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힌두교 신자들에게 성지와 같은 갠지스강이 흐르는 ‘바라나시(Varanasi) 역’이었다. 짐을 꾸리던 아래층 꼬마네 가족과 인사를 했다. 기차가 역에 들어서자 몸을 일으키던 꼬마의 아빠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 안에는 도착할 거예요. 노 프라브럼!”
Photo by Butan @train, INDIA
바라나시 역에서 아래층 사람들이 모두 내린 탓에 나는 1층 칸으로 승격했다. 커다란 TV로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창 밖으로 너른 벌판이 펼쳐졌다. 반복되는 광활한 장면들, 그리고 몇 명 남지 않은 열차 내의 고요함에 순간 나는 꾸벅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덜컹거림에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눈을 떴는데 창 밖엔 여전히 같은 풍경이 남아있었다. 시계를 보니 긴 바늘만 단 한 칸 움직였을 뿐이었다. 시계를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시간이 더 궁금해졌다. 그렇게 참고 참다가 다시 시계를 보면 다시 또 실망을 했다.
에라 모르겠다. 아무 데나 빈 아래층 침대에 누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다가 눈을 감았다. 그렇게 찰나의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침대에 내 몸의 모양 그대로 자국이 남았다. 열린 객차 문과 창문으로 들어온 흙먼지가 내가 누운 자리만 빼고 그 주변에 뽀얗게 쌓였기 때문이었다. 다른 승객들과 고루 나누던 흙먼지들이 남아있는 몇 명의 사람들에게 다 몰리는 것만 같았다. 세수를 하고 오기도 여러 번, 자세를 바꿔 누우면 다시 금세 침대에 새로운 자국이 그려졌다. 더 이상 씻는 게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은 나는 이번에 어떤 모양의 자국을 만들어볼까 고민을 하며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정차 역에서 창문 틈으로 들어오던 손들도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고, 타고 내리는 이가 거의 없는 한적한 역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먹을거리 없는 텅 빈 기차역을 보자 갑자기 허기가 밀려왔다. 나는 남은 바나나 하나를 소중히 꺼내 여행을 마친 누군가가 주고 떠난 작은 고추장 튜브를 꺼내 그 위에 짰다. 사실 여행 내내 한국 음식은 전혀 그립지 않았는데, 바나나에 고추장이라는 전에 없던 도전을 하고 나니 빨리 캘커타에 가서 김치볶음밥을 한 숟가락 수북하게 푸고 싶어졌다. 노트를 꺼내 한국에 가면 먹고 싶은 것들을 적어내기 시작했다. 목록은 금세 두 페이지를 가득 채웠다.
어느 순간부터는 역 이름이 쓰여있는 표지판에는 힌디어뿐, 영어 표기가 보이지 않았다. 기차역의 영어 이름을 알더라도 내가 어디쯤 왔는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기는 어려웠으나 내가 읽을 수 있는 글자가 없다는 것은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의미했다. 우리 객차에 남은 마지막 인도인 승객인 한 할머니가 내리려는 것을 발견했다. 영어를 못하시는 것 같아서 ‘캘커타, 콜카타, 꼴까따..’ 등을 외쳤으나 할머니는 멋쩍은 웃음과 함께 옆으로 고개를 까딱거리고는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래, 누구의 대답을 들은 듯 뭐하랴. 그 말을 믿을 수도 없는데. 여기가 어딘지 알면 뭐하랴. 콜카타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도 없는데. 종착역이 콜카타라 했으니 가다 보면 언젠가는 도착하겠지. 이틀 밤 잤는데 하루쯤 더 자면 어떠랴.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데. 하긴, 밤보다 낮에 떨어지는 게 더 나을 수도. 만약 다른 곳에 내리게 되면 어떠랴. 그곳에서 새로운 여행을 하면 되지... 콜카타에 가면 인도 최고의 김치볶음밥과 테레사 수녀님의 봉사센터들인 ‘마더 하우스’가 있다는 말 한마디에 혹해서 이 횡단 기차에 올랐다고 했지만, 사실은 변태를 만났던 잠무가 싫어서 도망치듯 떠났던 것이니 도착지가 어디든 괜찮았다. 나는 마음속 깊이 ‘노 프라브럼!’을 외쳤다.
인도 북서부의 작은 도시 잠무(Jam Mu)에서 인도 동부 끝의 콜카타까지 수십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온 기차가 힘이 다한 걸까. 이제 막 역에서 다시 출발하는 기차의 옆으로 걸어가는 사람이 계속 보였다. 기차도 그 사람도 어느 누구도 급할 거 없는 속도였다. 세 번째 어둠이 찾아오고 있던 그 찰나, 텅 빈 객실에 나오는 안내방송에서 ‘콜카타’라는 말이 들려왔다. 벌떡 일어나 마침 우리 칸으로 넘어오던 승무원을 불러 세우니, 그가 엄지를 세우며 소리친다.
“콜카타!”
2000년까지 캘커타(Calcutta)로 불렸고, 과거 영국령 인도의 수도였던 현대적인 도시 콜카타라 들었지만 그 큰 도시의 밤은 여느 인도의 밤과 다를 것 없었다. 조용한 어둠이 내려앉은 낯선 역 앞에서 나는 노트에 적어뒀던 몇 개의 숙소 중 하나를 골라 뚝뚝이 기사에게 보여줬다. 이젠 흥정엔 누구보다 자신 있었지만 빨리 숙소로 가고 싶은 마음에 조금 비싼 가격을 수락했다. 기사가 데려다준 골목 끝 하나뿐인 가로등 아래 어슴푸레 숙소 간판이 보였고, 그 아래 쪼그리고 앉아있는 남자들의 하얀 눈들이 깜빡였다. 건물을 들어서자 마치 쇠창살 같은 문을 타는 사람이 직접 여닫아야만 하는 그런 엘리베이터가 보였다. 발리우드 영화에서 구레나룻 혹은 가슴 털 가득한 우락부락한 남자 주인공이 악당 속에서 여주인공을 구해낼 때 나오던 그 엘리베이터. 창살 밖 어두운 복도가 다 보이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주인공의 심정을 느끼며 배낭끈을 꽉 붙잡았다. 리셉션에 도착하니 역시나 내가 가이드 북에서 찾아본 가격은 잘못된 정보라 했고, 나를 쳐다보는 눈빛들 가득한 어둠 속에서 더 이상 실랑이하고 싶지 않은 나는 호기롭게 지는 것을 선택했다. 그리고는 평소와는 다르게 방 상태를 미리 확인해 보지도 않고 순순히 방 키를 받았다.
방은 가관이었다. 좁고 어두웠고, 옆방의 말소리와 복도에 윗도리를 벗고 돌아다니는 남자들의 발소리, 그리고 그 건너의 화장실 샤워 소리까지 다 들렸다. 나무 판을 세워 구획을 나눠 놓은 게 벽이었고 그마저도 발차기 한 번이면 구멍이 뚫릴 것만 같았다. ‘옆방 남자가 벽을 부수고 들어오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나는 씻으러 나갈 겨를도 없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방법이 없었다. 이 밤중에 옮길 숙소도 없고, 더 움직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어둠 속 기차와 아침의 기차가 달랐듯 ‘내게 지금 보이는 장면들은 어둠 속에 가려진 것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침이 밝아올 것이고, 내가 하고 있는 걱정과 불안은 아무렇지 않게 사라져 버릴 것이라 믿었다. 어둠 속에서 해골 물인지도 모르고 맛있게 마셨다는 원효대사를 떠올렸다. 다시 문단속을 하고 침대에 누워 이어폰을 꼈다. 심호흡을 하고 눈을 가늘게 뜨자 창으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이 천장에 매달린 빨랫줄에 그림을 그렸다. 몽환적인 미술 작품이 보였다. 만들어낸 가상의 현실 속에서 두려움은 금세 사라졌고, 기차에서 그렇게 자고 잤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아무 탈없이 아침을 맞은 나는 숙소를 나와 서점을 찾아 큰 거리로 나갔다. 깨끗하고 현대적인 콜카타의 거리와 고급스러운 상점들은 먼지 싸인 가난한 여행자를 여러 번 놀라게 했다. 어젯밤 처음 마주한 어둠 속 콜카타와 오늘 알게 된 화려한 콜카타는 분명 같지만 다른 세상이었다. 콜카타 여행자 거리인 써더 스트릿(sudder street)에 위치한 전설의 노천식당 ‘띠루파티(TIRUPATI)’의 김치볶음밥은 사실 맛보다 양에 만족했고, 테레사 수녀님의 기관에서 운영하는 ‘죽음을 앞둔 사람들, 장애인, 아이들을 위한 봉사자 프로그램’들은 떠돌이 여행자로서 고작 며칠짜리 체험을 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에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콜카타에서는 어디든 화려한 건물의 코너를 돌면 어둡고 좁은 골목 안 몸을 잔뜩 움츠린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내가 묵은 숙소도 바로 그런 노동자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것들이 있었다. 2박 3일간의 기차여행부터 콜카타에 도착한 어젯밤까지가 모두 꿈처럼 느껴졌다.
콜카타 여행에서 나에게 남겨진 것은 서점에서 산 일러스트 엽서 한 장과 배고픈 여행자에게 가성 비 좋았던 어수룩한 김치볶음밥뿐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차를 타고 콜카타의 서점까지 가게 된 일련의 모든 순간들이었다. 그 과정 안에서 예측하거나 대비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을 마주하면서, 나는 다가오지 않을 미래를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려 애썼다. 무엇보다 '그 순간의 나'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한번 더 깨달았다. 이제 나에게도 언제든 외칠 수 있는 주문이 생겼다. 노 프라브럼!
Photo by Butan @Hamphi, INDIA
[ 에필로그 ]
바야흐로 2004년, 스마트폰도 태블릿도 없던 시절이었다. 구글맵 따위는 당연히 무용지물이었던 시절, 당시에 인도를 여행하던 한국인 여행자들에겐 아직 한국어판이 나오지 않았던 영문판 가이드북인 <론리 플래닛>이나 여행자들 사이에 ‘100배 헤매기’라고 불리던 한국어 가이드북인 <100배 즐기기>를 무겁게 들고 다니는 것이 낯선 곳에서 길을 찾는 공식적인 방법이었다. 물론 그 가이드북을 따라서도 헤매는 일이 잦았으니, 자고로 새로운 지역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서점을 찾아 현지에서 만든 그 지역 지도 한 장을 구매하여 너덜너덜 들고 다니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도시가 아닌 시골 마을로 들어가기라도 하면 구매할 수 있는 지역 상세 지도조차 없었다. 그땐 마을에 들어가기 전 한국에 비하면 현저하게 느려 터진 PC방에 들러서 그곳에 다녀간 선배 여행자들의 흔적을 찾고 또 찾아내 미리 노트에 적어두는 것이 중요했다. 아니면 마을 주민들 여럿에게 묻고 또 물어서 가장 근접한 답을 선택하는 방법뿐. 지금은 하고 싶어도 다시는 할 수 없는 여행을 그땐 당연한 듯 그렇게 했었다. 그땐 그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