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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업번역가 Sep 16. 2020

부업을 하려고 스톱워치를 샀다

부업 번역가로 살기 위해 필요한 것

무더위가 한풀 꺾일 즈음, 나는 퇴근 후 애니메이션, 드라마, 영화를 번역하는 초짜 부업 번역가의 삶을 살고 있었다. 가끔 회사 업무와 번역일이 몰릴 때는 점심시간을 틈타 번역을 하기도 했다. 몇 편의 작품을 납품하고, 스톱워치를 샀다.




잠시 시간을 여름으로 돌려보자. 새 회사에 막 입사한 즈음으로. 새로이 시작하는 회사에는 스타트업 특유의 열정이 흘러넘쳤다. 우리는 인력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플랫폼이었다. 아직 서비스는 정식 오픈 전이었고, 입점할 인력과 서비스를 모으는 중이었으므로 첫 출근과 함께 내게도 일정 분야의 입점 업체를 모으는 미션이 주어졌다. 동료들은 매일 외근과 미팅을 하느라 바빴고, 나도 전화와 대면으로 영업을 뛰며 업체들을 만나고 다녔다. 해외에 있는 업체와도 미팅을 잡아야 했기에 시차를 맞춰 움직이느라 종종 퇴근이 늦어졌다. 


이즈음의 나는 마치 맥주 광고에 나오는 사람 같았다. 아니, 그런 모습을 꿈꾸며 일했다. 열정적으로 땀 흘려 일하고, 퇴근 후에는 동료들과 맥주 한 잔 짠! 새로운 업무였고, 부담과 어려움도 있었지만, 회사에는 그런 것들을 다 이겨낼 희망이 풍부했다. 퇴근 후에는 동료들과 치킨을 뜯으며 우리 회사가 이 업계에 펼칠 서비스가 얼마나 혁신적인지, 우리는 얼마나 성장할지를 가늠해보고는 했다.


입사 후 두어 달이 지나면서 회사의 분위기는 급속도로 우울해지지만, 아무튼 이때는 그랬다. 회사로 돌아오길 잘했다고 생각할 만큼 뿌듯한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이렇게까지 회사 일에 빠져들 수 있었던 건 번역일이 없었기 때문이며, 번역일이 없었던 건 회사의 적응 기간을 고려해 입사 전에 미친듯한 스케줄로 하루에 한 편씩 납품을 끝내놓았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번역일이 들어오면서 나는 왜 현명한 사람들이 굳이 퇴근 후 돈을 벌지 않는지를 깨닫게 된다.




서비스 개발과 입점 업체를 모아오는 직원들에게 쏟아지던 응원의 목소리는 서비스 오픈이 다가오자 점점 독촉으로 변해갔다. 나 역시도 매일 오늘은 얼마나 계약을 성사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고, 내가 담당하는 영역이 회사에 얼마나 돈을 벌어줄 수 있을지를 분석 당했다. 내 업무에 애정을 많이 쏟았던 만큼, 회사에 자랑스러운 성과를 내놓기 위해 인터넷 세계와 현실 세계를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먼저 말했다시피 나는 해외 업체와의 연락을 주고받아야 할 일이 많았는데, 한국과 약 두 시간 차이가 나는 호주 정도라면 괜찮지만, 거의 지구 반대편에 있는 다른 나라들의 경우에는 밤중에도 전화를 받아야 할 때가 있었다. 그들의 생활 시간대를 생각하고 미안해하는 목소리를 들으면 업무 시간을 비껴간 전화가 크게 화나지는 않았지만, 다른 문제가 있었다. 나는 퇴근 후, 번역을 해야 했다.


입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첫 시즌부터 진행했던 드라마의 더빙 번역이 들어왔고, 그 후에는 영화 번역이 들어왔다. 번역 의뢰는 주로 회사에 있을 때 들어왔는데, 그럼 그날부터는 퇴근 후 번역가 모드가 되어야 했다. 회사에서는 실적에 쪼였고 집에 와서는 일정에 쪼이니 솔직히 말하자면 죽을 맛이었다. 심지어 나는 야근을 하느니 칼퇴를 하며 집에 일감을 싸 들고 가는 스타일이라서 때로는 번역과 회사 업무를 함께 할 때도 있었다. 그러다 보면 자정을 넘겨 잠들기 일쑤였고, 전날의 피로는 다음날의 괴로움으로 이어졌다.


끝내 어느 날, 나는 새로운 번역 일이 들어왔을 때 냉큼 일을 받았다가 다시 포기를 선언한다. 도무지 엄두가 안 났다. 회사에 입사하고 약 세 달 만에 벌어진 일이다. 야심 차 번역과 회사를 모두 손에 넣겠다고 한 것 치고는 빠른 포기였다. 함께 작업하는 번역가들에게 미안하고 민망했지만, 그만큼 힘들었다.


작품을 거절하고 나니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회사 업무에 임할 수 있었고, 매일 출근-퇴근-번역-출근-퇴근-번역을 반복하던 루틴에서 벗어나니 조금 숨 돌릴 틈이 생겼다. 그제야 내가 왜 힘들었는지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나는 <호빗: 뜻밖의 여정>을 보고 첫 번째 회사를 그만둘 각오를 했다. 하지만 실제 회사를 그만두려고 할 때, 팀장님께 '잠시 할 말이 있습니다'라고 용기를 낼 수 있게 해 준 건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였다. 이 영화는 내게 상상을 현실로 만들라고 등을 떠밀어 주었다.


그렇지만 영화의 초반부, 월터는 자신이 꿈꾸는 모습과 현실의 모습에 분명한 괴리를 느끼고 움츠러든다. 생각해보면 나는 월터만큼이나 터무니없이 멋진 내 모습을 상상하고 있던 것 같다. 회사에서 맥주 광고 속 직장인을 꿈꾼 것처럼 말이다. 회사에서는 열심히 일하고 퇴근 후 부업을 하며 또 다른 커리어를 쌓아가는 멋진 30대를 꿈꿨지만, 꿈을 이루려면 상상 속 내 모습을 그리는 게 아니라 히말라야에 다녀올 각오로 움직여야 하는 법이다.


감사하게도 다음 번역 의뢰가 왔을 때,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대신 인터넷에서 스톱워치 하나를 주문했다. 수험생들이 공부 시간을 기록할 때 쓰는 예쁜 걸로. 작품 별로 번역에 걸리는 시간을 파악해 전략적으로 부업 스케줄을 짤 생각이었다. 그런데, 스톱워치를 사용하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퇴근 후, 번역을 시작할 땐 스톱워치를 켰고 번역을 종료할 땐 스톱워치를 껐다. 이 끄고 켜는 행위만으로 번역가와 직장인 사이에 구분이 생겼다. 시간을 기록하기 위한 장치인 만큼, 스톱워치가 돌아가는 동안에는 다른 생각 없이 번역에만 몰두했다. 스톱워치가 도는 동안의 나는 번역가였고, 종료하면 다시 내일의 출근을 준비하는 직장인으로 돌아갔다. 스톱워치가 내 온오프 스위치가 된 것이다.


당시 내가 사용하던 이시국 스톱워치, 요즘은 휴대폰 앱을 통해 기록한다




직장인과 번역가. 두 역할을 다 가져가고 싶다면 구분이 명확해야 한다. 직장인일 때 번역가의 모습이 나타나선 안 되며, 번역가일 때 직장인의 모습에 매여서는 안 된다. 그러면 결국 그 어느 것도 뚜렷하게 해내지 못할 뿐이다.


막 부업을 시작했을 땐 '번역가뽕'과 '부업뽕'에 제대로 물이 올랐다. 그래서 항상 두 가지 일로 바쁜 사람처럼 살고 싶었다. 스톱워치를 산 다음부터는 경계 없이 일하는 걸 그만뒀다. 직장인의 나와 번역가의 나를 구분하자 회사의 힘듦이 번역으로 씻기기 시작했다. 부업 번역가로 살기 위해 필요한 건, '부업 번역가'인 나를 만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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