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은 결국 리딩이다
'유창한 스피킹에 현혹되지 마라'
“Don’t squeeze me, Dad!”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잊을 수 없는 표현이다. 결혼 후 대학원 유학을 위해 미국에 갔을 때의 일이다. 첫째를 집 근처 유치원에 보내고 몇 달이 지났을까. 어느 날 집에서 아이와 놀아주다가 소파 구석에서 못 나오게 미는 좀 과격한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때 아이 입에서 갑자기 나온 말이다. “스퀴즈”도 아니고 “스뀌즈”에 가까운, 거의 원어민 발음과 유사한 소리를 내는데 솔직히 기분이 좋았다. 마치 우리 아이가 뭐라도 된 것처럼, 내가 뭐라도 된 것처럼 마음속으로 우쭐했다.
외국어를 말한다는 것은 폼나는 일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영어로 말할 줄 안다는 것은 긍정적인 평을 받는다. 게다가 교과과정의 중요 과목 중 하나고 대학입시에서도 절대 빠지지 않는 것이니 영어 회화에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유혹 아닌 유혹을 떨쳐버리기란 어지간해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한때 영어 말하기 교육이 광풍처럼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 집 아이는 영어 발음을 좋게 하려고 혓바닥 아랫부분을 절개하는 수술까지 받는다는 황당한 뉴스가 보도되기도 했다.
영유아기 때 집중적인 영어 노출은 아이의 발음이 좋아질 거라는 엄마의 바로 그 기대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실 언어라는 것을 언어 그 자체로 볼 때 말하기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다. 또 학문적인 접근으로 보아도 말하기·듣기·읽기·쓰기가 서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는 것이 언어 교육의 본모습임에는 틀림이 없다. 특히 말하기는 영어 학습의 초창기에 하면 발음도 좋아지고, 읽기·듣기·쓰기에 도움이 되는 것도 맞다. 언어는 그러한 부분들이 상호유기적으로 작용한다. 그것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말하기 영어가 중심이 되고 그것만이 영어 학습의 최고의 가치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현실로 한번 되돌아와 보자.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아이는 바빠진다. 학교 숙제도 해야 하고 현장학습, 체험학습에 피아노 학원이나 태권도 도장도 다닌다. 친구랑도 놀아야 하고 또 싫든 좋든 스마트폰을 아이에게서 완전히 떼어놓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시간이 흘러 이제 중학생이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학교를 마치면 빨라야 서너 시다. 과목마다 주어지는 수행평가도 해야 하고 일 년에 네 번 치르는 지필고사(중간고사, 기말고사)도 준비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최근 공교육의 트렌드는 전인 교육을 목표로 직업교육, 봉사활동, 동아리 활동까지 다양성을 추구한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해야 할 것들이 더 많아진다. 영어에만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영유아기 때 힘들게 배운 영어를 계속 유지하기가 만만한 환경이 아니다. 외국어로서의 언어, 특히 말하기는 활용하지 않으면 실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것도 눈에 띄게 말이다.
특히 입시로 눈을 돌려보면 더욱 그렇다. 대학입시에서 영어 회화 스킬 하나만 가지고 신입생을 뽑는 대학도, 그런 전형도 없다. 대학생이 되고 사회에 나온 이후에도 좋은 영어 발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매력적인 요소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자체만으로 모두를 물리칠 수 있는 강력한 경쟁력은 아니다. 영어 발음이 아주 탁월하게 좋지 않더라도 충분히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심지어 어설픈 영어 발음으로도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무대에서 자기가 가진 기량을 마음껏 뽐내는 사례는 굳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에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우리나라 환경을 고려한 영어 학습이 절실히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영어 말하기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환상을 어느 정도 내려놓는 것이다.
보통 아이들이 태어나서 만 4세를 꽉 채워 모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기까지는 엄청난 양의 언어 노출이 필요하다. 외국어를 습득하는 데도 기본적인 의사소통을 위해서 최소 3,000~4,000시간의 노출이 필요하다는 것이 수많은 언어학자의 입장이다. 무의식적으로 습득하는 모국어든, 의식적으로 학습해야 하는 외국어든 한 언어를 배우기 위해서는 이렇듯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다. 게다가 사람마다 다른 언어 습득 능력과 언어 환경을 고려하면 그 시간과 노력은 더 길어질 수도 있다. 영유아기 가정에서 영어 몰입 교육으로 영어가 유창한 아이로 키워냈다는 자랑 섞인 성공 스토리들에 혹하는 것은 그야말로 일반화의 오류다. 뛰어난 언어적 감각을 지닌 그 아이만의 탁월한 능력일 수 있다.
귀를 쫑긋하게 만드는 매끄럽고 유창한 영어 회화 몇 마디가 과연 우리 아이에게 무엇을 보장해주는가? 또 그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는가? 그냥 막연히 영어 잘하면 좋지 하는 식의 생각을 다시 한번 정리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더군다나 영유아기 어린 나이에 이루어지는 소위 말하기 중심의 영어 몰입 교육에 대해서도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서울대 의대 교수와 한국뇌연구원 원장을 지낸 서유헌 박사의 다음 이야기를 들어보자.
“말이란 단순히 단어의 연결이 아닙니다. 인지기능, 감정, 생각, 철학 그 자체죠. 그런 능력이 골고루 발달해야 적절하게 언어를 구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 교육은 언어와 인지기능이 빠르게 발달하는 초등학교 시기에 본격적으로 하는 게 좋습니다. 유아 시절 언어 조기 교육이 과연 필요한지 조사를 해봤습니다. 유아 때 영어를 가르치는 것과 7~8세 이후에 영어를 가르치는 걸 비교해봤어요. 7~8세 이상이 되면 여러 가지 다양한 뇌기능이 발달합니다. 언어를 쉽게 더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데, 유아 시기에 가르치면 그냥 몇 가지 단어 연결밖에 구사하지 못한다는 연구 결과를 얻었습니다.”
- 《굿바이 영어 사교육》 중에서
영어 말하기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혹시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에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꼼꼼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원어민 수업에 참가하고 있다면 그것을 통해 얼마나 내실 있는 학습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학원비가 아깝지 않게 충분한 양의 언어적 노출도 병행하고 있는지, 리딩과의 적절한 균형을 이루는지 잘 살펴봐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영어 학습이 앞으로 아이의 영어 공부와 어떻게 이어질지 멀리 내다보는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 놓쳐서 안 될 것은 바로 리딩이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가 한국에서 필요한 영어는 다른 무엇보다 읽기영어다. 그것도 문법을 알고 정확하게 읽을 수 있는 그런 실력이 다른 어떤 영어 능력보다 탄탄한 경쟁력을 가지게 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