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 또 참고...
기다림의 미학
예전에 어느 할머니 한 분이 하시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자식을 일곱, 여덟 여럿 낳아 키워 보니까 그중에는 공부 잘하는 놈, 여러 가지로 속 썩이는 놈, 착한 놈, 못된 놈… 골고루 다 있더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다 공부 잘하고, 다 착하면 무슨 재미야? 이런 놈 저런 놈 섞여 있어야 키울 맛, 사는 맛이 나지.” 하셨다. 연륜이 진하게 묻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요즘은 예전처럼 자식을 많이 안 낳다 보니 자식 한 명당 부모로부터 받는 사랑과 관심의 총량이 많다. 이렇게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는 사는 내내 가슴 속에 예쁜 꽃다발을 한 아름 지니고 사는 것과 같다. 이 세상에 그 누구든 엄마 아빠로부터 받은 사랑만큼 귀중하고 평생의 자산이 되는 것이 또 있을까. 그 소중한 가치를 말로써, 글로써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아쉽다. 하지만 그만큼 부모가 자식한테 거는 기대가 커지다 보니 욕심이 생기게 마련이다. 내 아이는 뭐든 잘했으면 좋겠고 1등을 했으면 좋겠고 다른 아이보다 앞서 나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러다 보니 뭐든 가르치게 되면 완벽함을 추구하게 된다. 빈틈없이 깔끔하게 실수 없이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내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야 어찌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아니다. 적어도 영어 학습에서 만큼은 어느 정도 내려놓아야 한다. 대충대충 공부하도록 내버려 두라는 것이 아니다. 언어 학습의 특성상 어느 정도 유연성을 가지고 한 걸음 떨어져서 아이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언어 학습은 덧셈, 뺄셈처럼 정확한 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장면 한 그릇처럼 짧은 시간에 비워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진중한 기다림이다.
단어든 문법이든 한두 번 알려주고 모른다고, 막힌다고 닦달을 하면 절대 안 된다. 차근차근 알려주고 다시 설명해주고 아이가 모르면 질문할 수 있는 길을 터주고 기다려야 한다. 부모가 답답해하며 야단치면 아이에게 공부는 뒷전이 되어버리고 야단맞지 않는 기술만 찾으려 든다. ‘이렇게 대답하면 엄마가 화를 안 내겠지’, ‘이렇게 반응을 보이면 엄마가 좋아하겠지’하고 눈치 보고 잔머리 쓰는 일에만 선수가 된다. 이런 단계에 진입하고 나면 이제 모두가 피해자다. 아이도 괴롭고 엄마도 괴롭고 공부 성과는 없고 심지어 관계마저 소원해질지도 모른다.
그럼 반대로 칭찬하면 될까? 반대편 꼭짓점도 살펴보자. 야단을 치고 답답해하는 대신 잘하는 부분을 찾아 칭찬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칭찬만이 최고의 방법인 양 무조건 아이를 치켜세워주면 아이는 흔히 말하는 자아도취증에 빠질지도 모른다. 나는 잘났고, 똑똑하고 내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 옳고 나는 항상 선두에 서야 하며 2등이란 자존심 상하는 것이고 잘못된 것이라는 편협된 사고방식을 가질 수 있다. 심지어는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학원에서 아이들을 상대하다 보면 의외로 이런 유형의 아이들이 많다. 적절한 자신감은 필요하다. 그러나 과도한 1등 지상주의는 칭찬이 만든 폐해다. 특히나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은 자기 혼자 잘나서 독주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아니다. 함께할 줄 알고, 약자를 끌어안는 포용력 있는 인재가 진정한 리더다.
영어 학습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아이 스스로 긍정적인 경험을 하는 것이다. 그것도 한두 번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최대한 많이 본인이 직접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아! 이렇게 하니까 이해가 되는구나! 열심히 했더니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가지도록 해주어야 한다. 거기에서 재미가 시작되고 혼자 능동적으로 해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생기는 것이다. 엄마는 곁에서 도와줄 뿐이다.
특히 아이와 공부하는 첫 단계에서 빼곡한 계획표(같이 짰다고는 하지만 엄마가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를 가지고 무엇을 얼마 동안, 얼마나 가르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기 쉽다. 그러나 이보다는 아이가 어떻게 하면 공부하는 동안 긍정적인 경험을 하고 또 그것이 긍정적인 피드백으로 돌아오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 것인가를 고민하고 연구해야 한다. 아주 중요한 얘기다.
10여 년간 수백 명의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느낀 점 가운데 하나는 적어도 영어 학습에 관한 한 ‘아주 뛰어난 수재도 아주 뒤처지는 둔재도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은 대동소이하다. 암기 능력 등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기는 하나 소위 머리가 좋아 단시간에 빨리 많이 외우는 아이는 빨리 잊어버리고, 반대로 천천히 하는 아이는 더 오래가고 더 깊이가 있다.
암기 능력 자체를 앞세워 머리가 좋다거나 머리가 나쁘다거나 하는 판단은 옳지 못하다.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중요한 건 그 속에 있는 콘텐츠다. 거듭 강조하지만 영어는 수단이다. 최종 목표가 아니다. 영어를 매개체로 그 안에 본인의 생각과 가치를 담을 수 있어야 그것이 의미 있는 것이고 경쟁력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인내다. 참고, 또 참아야 한다. 지금 당장의 눈앞에 보이는 결과물에 애타는 목마름을 이겨내고 산 정상에서 마시게 될 시원한 물 한 모금을 생각하며 열심히 올라가야 한다.
영어 표현 중에 “Just around the corner.”라는 말이 있다. 여기 이 코너만 돌면 정상이라는 뜻이다. 조금만 더 인내하고 기다리자. 조금만 더.
전쟁은 잔인하게도 승패가 있지만 영어 공부는 그렇지 않다. 물론 시험이라는 경쟁 구도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따라오는 것일 뿐 처음부터 시험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계획을 세우고 물 흘러가듯 그저 큰 물줄기를 따라 흘러가면 된다. 적을 무찌르며 앞만 보고 숨 가쁘게 올라 정상을 탈환해야 하는 그런 전쟁이 아니다. 숨이 차면 언덕 마루에서 쉬어가는 여유도, 옆 사람에게 농담 한마디 건네는 넉넉한 웃음도 필요하다. 즐겁게 배울 수 있도록 그 놀이터를 마련해주는 것이 엄마의 몫이다. 즐기는 사람은 노력만 하는 사람보다 더 잘한다고 하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