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해영 다니엘 May 19. 2022

이스라엘 하이파 칼멜산에서

고대 문명과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서

문명과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 집사람과 함께 이집트, 터키, 그리스를 거쳐 마지막 방문지 이스라엘에 도착했습니다.


“Passion  of the Christ “ 십자가에 못 박혀 끔찍한 수난을 당하신 예수님, 그분의 위대한 생애와 흔적과 가르침을 찾아 여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땅 구석구석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분이 끼친 영향을 빼면 세계사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최대 산업도시이자 지중해 항구 도시인 하이파를 방문하여 바닷가 높은 칼멜산에서 바라본 지중해 연안, 하이파 시내와 눈이 시린 지중해 쪽빛 바다는 황홀했습니다.

시간은 다르지만 이 곳 칼멜산을 지나간 모든 사람도 같은 황홀한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재난을 피하기 위해 이집트로 피난을 간 예수님의 가족도 (요셉, 마리아, 어린 예수님) 여기를 거쳐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페르시아의 침략군, 알렉산더의 군대, 로마제국의 군대, 십자군, 또 갈릴리 호수 옆 하틴에서 십자군을 괴멸시킨 아랍의 영웅 쿠르드족 출신 살라딘도 예루살렘을 탈환하러 여기를 거쳐서 갔습니다.

또 칭기즈칸의 군대, 마르코폴로도, 아코가 베네치아의 식민지였기에, 이 곳을 거쳐 중국으로 갔습니다. 나폴레옹도 여기를 거쳐 이집트로 갔습니다. 영국도 석유, 중동, 시리아를 관리하려 여기서 다마스쿠스까지 철도를 부설하였습니다.

여기 이집트, 터키, 그리스, 또한 이스라엘/레바논 해안 지역은 문명이 발생하고 전파되고 제국의 이해관계가 충돌한 문명의 요충지/교통로입니다.

사도 바오로, 요한의 기독교 전도 여행이 기독교 전파에 결정적 요인이 되었지만 그들의 여행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그리스 터키 이스라엘이 로마의 통치를 받는 한 나라였고 그들이 만든 도로가 있었기에 기독교가 좀 더 쉽게 전파된 것 같습니다.

그분의 발자취를 찾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땅 요르단강 서안을 열심히 돌아 다녔습니다. 예루살렘, 베들레헴, 나사렛, 헤브론, 제리코, 베타니, 갈릴리 호수, 요르단 강, 사해, 시험산,  수많은 기념 교회와 성당 등.

방문한 팔레스타인의 현실은 끔찍했습니다. 요르단 강 서안은 방문할 수 있지만 가자 지구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교도소 담보다 한창 높은 분리 벽은 사람을 주눅 들게 합니다. 서안(West Bank)은 팔레스타인 땅이지만 이스라엘 군대가 주둔하고 곳곳에 총을 든 이스라엘 군인들이 지키고 검색하여 이제 그들의 총칼 아래 저항은 불가능합니다.

또 야금야금 팔레스타인 땅을 잠식하며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해 나가며 또 이스라엘 군인들이 그 지역을 보호합니다. 항상 높은 언덕에 짓습니다, 옛날 자기 조상들의 땅이라면서 이스라엘 정부 군인의 보호 아래.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방문한 팔레스타인 가정에서 그래도 아이들은 뭔지도 모르고 자라고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부모의 최대 걱정은 애들이 혹 이스라엘 반대 대모에 참석할까 노심초사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의자를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데모에 휩쓸려 다치거나 교도소 가지 말라고, 부모의 맘은 다 같습니다.

더 높은 분리벽 옆 1948년부터 자기가 살던 팔레스타인 땅에서 쫓겨난 난민들이 사는 ‘아이다 난민촌’을 방문했습니다. 쓰레기 천지인 이곳은 사람이 살기에 너무 열악한 환경입니다. 아이들이 희망인데,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냥 잿빛 절망의 우울한 도시입니다.

헤브론에 있는 유대인과 무슬림이 모두 자기의 조상이라 생각하는 아브라함 모스크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사라 등 부인 무덤이 함께 있음) 교도소 담장 출입문 같은 곳을 살벌한 검색을 두 번 받아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미국 흉악범 교도소 같습니다.

맨날 뉴스에서 분쟁이 일어나고 또 전략적 요지라는 골란고원을 찾았습니다. 1967년 6일 전쟁에서 시리아로부터 뺏어 일방적으로  이스라엘로 편입했습니다. 시리아, 레바논, 그리고 이스라엘 북부 갈릴리 지역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골란 고원은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아름다운 곳입니다.

멀리 눈 덮인 헤르몬 산이 (2,814m) 보이고 아름다운 들꽃이 만개하고 세 나라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정말 아름다운 곳입니다.

집사람도 연신 차를 세우라 재촉하고 사진도 찍고 아름다운 들꽃과 눈부신 경관을 감상했습니다. 금방 마주치는 이스라엘 포병 대대, 그들의 포신은 레바논 남부에 주둔한 헤즈볼라 민병대(이란이 지원)가 있는 마을을 겨냥하고 고원 꼭대기서 마주한 이스라엘 방공 레이다 미사일 부대는 이곳이 어떤 지역인 지 잘 말해 줍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 가신 예루살렘의 골고다 언덕에는 그 십자가가 세워진 장소와 옆의 예수님 무덤 위에 세워진 “무덤 교회 (Church of the Holy Sepulchre)”가 있습니다.


부활 주간 (Holy Week) 성 목요일(Holy Thursday) 로만 가톨릭 미사를, 세족식 포함 이스라엘에 계신 모든 신부님 주교님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의 네 시간 가까운, 드리는 일생 최대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시고 수난을 당하신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로만 가톨릭 부활절 전야 미사는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의 수태고지 성당에서 갇는 기쁨, 또 부활절 미사는 900 년이 넘은 갈릴리 호숫가 성 베드로 성당에서 갇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홀로코스트 박물관을 방문하기 전 이스라엘에 대한 나의 생각은 아주 부정적이었습니다.

유태인 육백만의 희생을 치른 이차대전이 끝나고 다시 유럽에 국경선이 그어졌지만 어느 나라도 유태인을 받아 주는 나라가 없었습니다.

폴란드에서는 전후 또 인종주의로 수많은 유태인이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땅으로 가는 비밀 조직이 결성되었습니다.

전쟁 전 팔레스타인 땅에는 40만 명 정도의 소수 유태인만 살고 있었습니다. (폴란드 삼백 삼십만, 이 중 삼백만 희생) ( 러시아 연방 삼백만 거주 이 중 구십오만 희생)

유태인이 영국은 도와주는 조건으로 1917년 영국의 외무장관 발포어 선언으로 이스라엘 독립은 약속했지만 조상 대대로 사는 팔레스타인과 충돌을 우려한 영국은 이주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차대전 후 이스라엘 정착을 위해 대규모로 이스라엘 하이파 항구로 가는 이민선(불법)을 해안 봉쇄하고 지중해 동부의 큰 섬 사이프러스의 리마솔 항구에 난민촌을 건설하여 이들을 가로막고 수용하고 이들의 이스라엘 상륙을 막았습니다. 이 과정은 폴 뉴먼 주연의 ‘영광의 탈출’이란 영화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희생당했는 데도 전후 돌아갈 나라가 없었다. 박물관을 나서며 참 착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폴란드 바르샤바의 담벼락에 갇힌 게토에서 또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에서 나치에게 그렇게 당했는 데 똑 같이 높은 절망의 담을 쌓고 일제보다 더 가혹하게 팔레스타인 사람을 억압하는 그들을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스라엘은 무장 한 군인이 모두를 감시하고 체크합니다. 백화점, 큰 상가 터미널 모두 가방을 열고 보안 검색을 받아야 합니다. 별 유쾌한 기분이 아닙니다.

안식일 (Shabbat)에 걸리면 여행이 아주 어렵습니다. 저가 이스라엘 Tel Aviv 국제공항에 토요일에 도착을 했는데 버스가 다 쉬어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택시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택시 운전사도 비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금요일 오후 1시부터 토요일까지 상점 거의 대부분 문을 닫습니다.

많은 도시가 법으로 강제하고 벌금을 메기고, 또 강제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안식일을 잘 지키기에 여행객은 요일을 잘 맞추어야 합니다.

마지막 이틀 머문 Tel Aviv는 2014년 슈퍼체인이 시를 상대로 오랜 싸움 끝에 이겨 대부분 가계가 안식일에도 문을 열고 길거리 지키는 군인도 보기 어렵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완전히 별종 자유로운 곳입니다.

이 땅을 스쳐간 수많은 정복자와 분쟁, “Holy Land”
란 이름이 무색하게 드리우진 종교 갈등과 전쟁.

현재의 중동 분쟁을 즐기고 또 뒤에서 조정까지 하는 이스라엘 수상 벤자민 네탄야후! 그리고 집권 극우 리쿠트당!  그의 형님은 1976년 우간다 엔테베 공항 유태인 납치 구출작전에서 전사한 특공 대장이며, 그는 극단적 시온주의자입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총칼로 억압하고 내 국민만 잘 살겠다는 지도자와 종교는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머무는 동안 내내 또 떠나며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기 참 힘들었습니다.

이집트의 건축 예술은 크레테, 헬레니즘, 로마, 비진틴, 오스만 제국 모두와 연결이 되어 있었습니다. 방문한 카이로, 아스완, 룩소, 그리스의 아테네, 델피, 크레타 섬,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 이스탄불, 에페소, 또 파묵칼레의 이에라폴리스, 라오드키아 등을 돌아보며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건물의 거대한 기둥과 열주들 - -  이집트 룩소의 신전, 크레테의 미노안 문명, 알렉산드 대왕의 마케도니아 수도 펠라의 유적들, 아테네와 델피의 신전, 로마제국과 비잔틴의 건축물, 오스만 터키의 거대한 이스탄불 모스크의 기둥을 보면 건축 기술이 대대로 이어져 내려감을 금방 아실 수 있습니다.

영국과 스칸디나비아 등은 사람이 살기엔 척박하여 중세 전까지는 따스한 지중해와  에게해를 둘러싼 이집트, 터키, 그리스 및 이스라엘/레바논 지역이 동양의 중국과 함께 거대한 인류 문명의 한 축이었습니다.  


중동이 분쟁 중이라 찬란한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 바그다드, 다마스쿠스, 알레포 등지를 둘러보지 못함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이다 난민촌 옆 분리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