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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긍정 Aug 08. 2019

엄마는 최선을 다했고 나는 겨우 살아남았다

긍정의 서재 책리뷰 <이상한 정상 가족>

어릴 적 내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 있었다. 그건 내게 아빠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책 <이상한 정상 가족>의 김희경 작가는 한국 사회가 ‘정상 가족’이라는 좁은 원을 만들어 그 범주를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손가락질하고 차별한다며 한국의 보수적인 가족관을 지적했다. 또한 돌봄 노동을 전적으로 가족에게만 의지해온 한국의 보육 시스템을 꼬집었다. 책을 읽으면서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엄마, 엄마도 재혼하면 안 돼?” 아무것도 모르던 초등학생 시절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당황스러운 표정과 함께 “쪼끄만 게 못 하는 말이 없어?”하고 웃어넘겼다. 엄마는 오빠와 나를 홀로 키웠는데, 학교에선 수업 주제로 가족을 종종 다뤘다. 다른 친구들이 가족에 대해 스스럼없이 이야기할 때 나는 망설여야 했다. 엄마가 내게 누가 아빠에 관해 물어보면 아빠가 해외로 출장 갔다고 말하라며 일러뒀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그날을 또렷이 기억했다. 아빠는 얼마 전부터 명치가 막힌 듯한 기분이라고 했다. 병원에 갔지만, 별일이 아니라고 했고 아빠는 그 말을 믿었다. 그날은 퇴근 후 오빠와 함께 식빵에 쨈과 케찹을 발라 나눠 먹었다. 이내 잠이 들었고 아빠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사인은 심장마비라고 했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오빠는 목놓아 울었고 나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아빠가 삐뽀삐뽀 타고 갔다”고 되풀이했다고 한다. 내가 4살, 오빠가 6살이던 1996년이었다.


하루 아침에 엄마는 전업주부에서 한 집의 가장으로 역할이 뒤바뀌었다. 결혼 후 쭉 전업주부였던 엄마는 먼저 이력서를 썼다. 첫 직장은 집에서 한 시간 거리의 공인중개소였다. 당시 아파트 투자로 수익을 낸 엄마는 자신이 있었다. 일주일 정도 다녀보곤 그만두었던 이유는 퇴근 후 집에 남겨진 우리 남매를 돌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이후 엄마는 영농법에 대해 실험하고 연구하는 농림부 산하 기관인 농촌지도서에 일자리를 구했다. 엄마는 회사에서 실험을 하나씩 배워나갔고, 퇴근 후 컴퓨터 학원에 등록해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다. 야무진 엄마는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뒤 일이 터졌다. 


할머니는 아들 잡아먹은 며느리라고 생각했는지 불현듯 차가워졌다. 애들 봐줄 일 없으니 알아서 키우라며 우리 가족에게 등을 보였다. 동시에 엄마를 수시로 겁박했다. 큰 숫자가 박힌 보라색 집 전화는 쉴새 없이 울렸고, 엄마는 받지 말고 끊으라고 했다. 할머니는 집이고 회사고 닥치는대로 엄마를 찾아와 돈을 달라고 떼를 썼다. 과로사 위로금 7,000만 원으로 할아버지의 빚을 탕감해준 뒤였다. 한번은 큰아빠를 데리고 와 없는 돈을 달라기에 돈 없다고, 배 째라며 실갱이를 벌였다. 큰아빠는 엄마의 목을 조르며 내동댕이쳤고, 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르렀다. 그날 이후 엄마는 이모가 사는 성남으로 떠났고 오빠와 나는 할머니 집에 남겨졌다. 벌어진 신발 틈 사이로 빗물이 새어 들어오듯, 불행은 우리 가족을 조금씩 그리고 깊숙이 잠식했다.


할머니는 엄마에게 우리를 데려가려면 돈을 가져오라고 했다. 엄마와 할머니가 눈치 싸움을 하는 동안 오빠와 나는 할머니의 눈치밥을 먹고 자랐다. 유치원생이었던 나는 11월에도 샌들을 신고 다녔고, 오빠는 엄마가 숨겨둔 돼지저금통에서 오백원씩 몰래꺼내 쓰다 들켜 돼지저금통까지 빼앗겨버렸다. 유치원 선생님의 귀띔을 통해 엄마가 할머니 몰래 겨울 부츠를 사주었다는 건 다 큰 뒤에야 알게 된 이야기였다. 하루는 오빠가 엄마한테 전화를 받았다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 오빠는 좋아하는 장난감과 교과서를 챙겼고 도망치듯 할머니네 집을 떠났다. 그날로 우리는 할머니라는 사람으로부터 달아나 엄마 품에 안길 수 있었다. 


성남에서 직장을 구한 엄마는 늘 바빴다. 혼자서 우리 둘을 키우는데 엄마가 받을 수 있었던 지원은 아빠 몫의 국민연금 20만 원이 전부였다. 엄마는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인 데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소득이 있다는 이유로 정부의 한 부모 복지 정책에서 모두 탈락했다. 경제적으로 불안했던 엄마는 줄곧 두 아이의 양육과 본인의 커리어 사이에서 줄타기해야 했다. 엄마는 출근 전 끓인 밥을 말아주고는 하루 용돈으로 얼마가 필요하냐고 물었다. 나는 “오백 원!”하고 말하고 싶은데 오빠는 어른스럽게 “엄마 삼백 원씩이면 돼요”하고 답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열쇠로 무거운 현관문을 열면 텅 빈 어두운 거실만이 나를 반겼다. 큰 식탁에 앉아 밥그릇에 아빠 숟갈로 시리얼을 말아먹던 시절이었다. 난 그 장면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생계가 우선인 엄마는 늘 일터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의 관심 밖에 있는 듯했다. 운동회 날이면 엄마가 아닌 이모가 대신 오곤 했다. 내가 보고 싶었던 건 이모가 아닌 엄마였는데. 하루는 집에 돌아와 홱 돌아서 바로 현관문을 잠그려고 하다 철문에 새끼손가락이 끼어버렸다. 파랗게 멍들고 퉁퉁 부은 손가락을 보고 놀란 나는 울면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긴 통화 연결음이 다급한 나를 가로막았다. 엄마는 실험실에 있을 때면 전화를 종종 놓쳤다. 익숙한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자 나는 남양주에 있는 외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변에 도와줄 만한 어른이 없냐는 물음에 집 앞 태권도장 관장님께 전화를 걸어 병원에 다녀올 수 있었다. 


엄마는 애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겁났는지 내가 잘못을 할 때면 눈물이 쏙 빠질만큼 혼을 냈다. 한번은 옆 집 친구네 텔레비전 위에 있는 200원을 훔쳤다가 엄마에게 걸렸다. 엄마는 내게 사실대로 말하라며 빗자루를 반대로 집어들곤 혼을 냈다. 엄마는 “고짓말 하지 말랬지! 엄마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고짓말 하는 사람이야!”라며 소리를 질렀다. 엄마는 화가 날 때면 맞을 때의 고통보다 아픈 모진 말을 중얼거렸다. “다 고아원에 내다 버렸어야 했는데. 괜히 데려왔어” 들을 때마다 익숙해지지 않던 그 말은 소화되지 않고 마음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내가 놀이터가 아닌 일터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5학년일 때였다. 엄마는 이모와 함께 남양주 산속, 계곡 옆에 닭, 오리가 주메뉴인 가든을 열었다. 개업한 뒤 여름마다 우리 남매는 식당으로 차출되었다. 친구의 가족들이 엄마의 가게로 여름마다 휴가를 보내러 올 때 나는 땀으로 범벅된 티셔츠 위로 앞치마를 두르고 반찬을 나르거나 그들이 다 먹은 그릇을 치우곤 했다. 아빠를 먼저 보낸 뒤 우리 가족에겐 외식도, 여행도 사치였다. 여름이면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를 해치우느라 바빴고, 겨울이면 방 한 켠에 연탄을 피우고 추위를 견디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엄마가 성남에서 직장에 다니던 시절보다는 좋았다. 바쁘긴 해도 집으로 돌아가면 날 반겨주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책을 읽으며 떠올렸던 내 유년 시절은 따갑고 시큰했다. 돌아보니 나는 피치못한 엄마의 방임과 열악한 돌봄 사이에서 겨우 살아남았다. 엄마는 종종 "우리 딸은 병원도 치과도 혼자 잘 다녀!"하고 칭찬하곤 했지만, 그 공백 속에서 나는 외로웠다. ‘점잖다’의 어원이 ‘젊지 않다’는 뜻처럼(244쪽) 나는 점잖고 씩씩한 아이가 되어야만 했다. 얼마 전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그때 왜 재혼 안 했어?” 엄마의 답은 간단했다. “엄마는 다른 건 생각할 여유도 없었어. 엄마는 먹고사느라 마음에 여유도, 경제적 여유도 늘 모자랐거든.” 책 <이상한 정상 가족>을 읽으면서 빗자루로 나를 때리며 훈육했던, 모진 말을 뱉던 젊은 엄마의 모습을 떠올렸다. 작은 몸에 내가 올려다보던 짙은 화장의 엄마 얼굴을. 그 시절의 엄마를 이제야 어렴풋이 이해할 것만 같다. 왜 엄마가 모진 말을 뱉어낼 수밖에 없었는지. 두 어깨에 짊어진 두 아이의 인생이 얼마나 육중했는지.

<이상한 정상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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