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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긍정 Aug 08. 2019

딸은 낳자마자 엎어놓지 그랬어

가부장제에 갇힌 가족 이야기

"그럴 거면 뭣 하러 딸을 낳아? 딸은 낳자마자 엎어놓지 그랬어. 아들이 그렇게 좋으면 아들만 낳아야지!" 이모가 외할머니에게 자주 뱉어낸 말이었다. 외할머니는 1남 3녀를 낳았다. 3명을 더 낳았는데, 모두 일찍이 죽었다. 줄줄이 여자였다. 외할머니는 장남인 아들과 막내딸만 끔찍이 아꼈다. 그사이에 잘못 낀 듯한 첫째와 둘째 딸은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됐다. 아들과 막내딸은 노모를 챙기지 않아도 챙김을 받았고, 자매는 챙겨줘도 욕을 먹었다. 


엄마와 이모는 둘만의 대화를 할 때면 외할머니를 혐오하는 말들을 나눴다. 어느 때는 이기적이라고 했고 어느 때는 독하다고 그랬다. 외할머니네 집 옆에서 식당을 하는 자매는 성수기인 여름, 하루가 멀다고 외할머니와 싸웠다. 엄마와 이모는 목소리의 톤도 높고 성량도 컸다. 그에 비해 외할머니는 작고 야위어 약자처럼 보였다. 나는 그런 외할머니가 안쓰럽기도 했고 동시에 그렇게 모질게 소리 지를 수밖에 없었던 자매의 심정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해 이모 영화 씨를 인터뷰했다.


이모의 이야기는 81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영화 씨와 미영 씨는 3살 터울로 당시 나이 열넷, 열일곱이었다. 엄마는 남의 집 농사를 돕느라 아침부터 나갔다. 저녁 준비를 하던 영화 씨는 늙고 큰 호박 있기에 된장찌개에 넣었다. 손이 큰 미영 씨는 그만큼 큰 냄비에다가 물을 한 바가지 넣었고 된장찌개는 된장국으로 막 변한 참이었다. 지친 노동을 마치고 엄마가 집에 돌아왔을 땐 10시였고, 화롯불 위에 5~6인분은 돼 보이는 된장국이 막 끓기 시작했다. 엄마의 짜증은 폭발했다. 엄마는 발로 호박 된장찌개를 차 버렸다. 밥상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다는 것에 영화 씨와 언니는 혼이 났다.


봄 방학이 끝난 뒤 수업을 마치고 영화 씨가 집에 돌아왔을 때 엄마는 없었다. 화병으로 앓아누우신 아버지를 모시고 남양주 석천사 절에 들어가셨다고 6살 터울의 오빠가 전했다. 오빠는 "이제부터 네가 밥해야 한다."라고 영화 씨에게 말했다. 첫째 언니는 고등학교를 들어가자마자 상과의 타자반으로 뽑혔다. 타자반 수업은 늦게 끝나 집에 돌아오는 일이 어려웠다. 얼마 뒤 미영 씨는 학교 앞에 있는 외삼촌네에서 지내기로 했다. 집에는 초등학생 여동생, 중학생이던 영화 씨,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오빠가 있었다. 이때부터 가사노동은 자연스레 영화 씨에게 맡겨졌다. 


영화 씨는 새벽 5시에 일어났다.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아궁이에 불을 때는 일이었다. 그 불로 삼 남매가 씻을 물을 끓였다. 그리곤 여동생과 오빠의 밥상을 차렸다. 도시락을 싸서 6시 반 첫차를 타고 학교로 향했다. 열다섯 살의 영화 씨가 할 줄 아는 건 계란찜뿐이었다. 일주일 내내 오리 알, 달걀을 번갈아 가며 계란찜만 하자 오빠는 "넌 할 줄 아는 게 그거밖에 없냐" 고 물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물을 길어 오느라 바빴다. 긴 나무 막대 양 끝에 달린 양동이를 어깨에 지고 우물에서 두말 무게에 물을 길어왔다. 하루 네 번, 온 식구들이 쓸 물을 길어오는 건 영화 씨 몫이었다. 주말에는 빨래하느라 바빴다. 빨간 고무다라에 삼 남매의 옷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은 뒤 머리에 이고 개울로 내려갔다. 다른 아줌마들보다 개울에 일찍 도착해 제일 위쪽의 샘물은 차지하면 운이 좋은 날이었다.



엄마는 떠나며 장남에게 1000원짜리 돈다발을 쥐여줬다. 영화 씨가 오빠에게 "돈 좀 줘" 하고 말하면 오빠는 "뭐에 쓸 거야?"하고 쓰임을 물었다. 영화 씨가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일주일 치 차비 1000원뿐이었다. 생리대가 필요했는데 돈 달라고 하기가 창피했다. 말하는 영화 씨 눈가에 눈물이 어렸다. "그때 생리대가 한팩에 450원인가 그랬어. 근데 오빠한테 말하기가 참…. 딸애한테는 그런 게 매달 필요한데 엄마는 나한테는 돈 한 푼 주지도 않고…." 결국 영화 씨는 오빠에게 돈을 탈 때 거짓말을 해야 했다. 생리대 사는데 돈을 다 써 학교까지 걸어간 적도 있었다. 미영 씨는 1~2 주에 한 번씩 학교에서 영화 씨를 불러냈다. 이래저래 돈이 필요하니 오빠에게 받아오라고 했다. 언니를 제일 좋아하고 잘 따랐던 영화 씨는 언니에게 어떻게든 돈을 주고 싶었다. 오빠는 미영 씨가 집엔 안 오고 영화 씨한테 시키는 걸 마뜩잖아했다.


하루는 오빠가 영화 씨에게 강아지 밥으로 쓸 보리쌀을 사 오라고 오천 원을 주었다. 영화 씨는 3일 동안 쌀가게에 들렀지만, 보리쌀이 다 떨어져서 살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언니 미영 씨가 학교에서 영화 씨를 찾아왔다. "급수시험에 쓸 돈이랑, 책도 필요하고, 차비도 필요해" 영화 씨는 가지고 있던 오천 원을 언니에게 전부 주었다. 그날 저녁, 밥 먹는 자리에서 오빠가 말했다. 작은 엄마한테 보리쌀 얻어서 안 사도 되니까 오천 원을 도로 내놓으라고. 영화 씨는 우물쭈물하며 돈이 없다고 말했고 수북이 퍼놨던 오빠의 밥그릇이 영화 씨의 머리로 날아왔다. 영화 씨는 그간 참고 참았던 마음이 분노로 폭발했다. 그녀는 엄마 대신 집안의 가사노동을 떠맡았다. 새벽같이 일찍 일어나 불을 땠고 밥을 차렸다. 그런 그녀의 노고를 알아주지도 않고, 도와주기는커녕 영화 씨가 힘들게 길어온 물을 쇠죽 쑨다며 다 써버리곤 했던 오빠였다. 영화 씨는 그 길로 나가 사랑방에 있는 농약병을 땄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구나 싶었다. 영화 씨를 때린 오빠가 낌새가 이상했는지 뛰쳐나왔고 그날의 사건은 30년 넘게 지난 지금도 영화 씨 가슴속에 응어리로 남았다.



이모는 유년기를 떠올리며 담담히 말했고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쏟아내듯 이야기한 것들은 유년시절 가부장제 아래 마주한 일들이었다. 영화 씨는 어쩐지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잘못한 것 같았다. 그녀가 묵묵히 엄마 대신 가사노동을 도맡아도 기대한 칭찬이나 걱정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그녀가 겪은 일들이 어떤 일인지 조차 잘 모른다. 그저 열다섯이 겪었던 온갖 상처가 오십이 된 어른의 목소리를 통해 차분히 전달되었을 뿐이다. 그녀는 인터뷰 마지막 19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말했다. 


"할아버지는 아들을 하나 더 낳고 싶어 했다구. 낳는데 내가 딸인 거야. 그래가지구 할아버지가 이모가 아들이기를 바라다가 돌아가셨어 죽을 때까지. 네가 아들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들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버지의 사랑은 사랑의 모습을 하고 그녀의 성 자체를 부정했다. 아버지의 바람은 딸이 딸로서 들어줄 수 없었다. 그녀 스스로 얼마나 자신이 여성인 것에 죄책감을 느꼈을까. 그녀는 차분한 어조로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전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자 헤아릴 수 없는 비애와 자기혐오 속에서 살았을 시간이 떠올랐다. 나는 이모에게 이모가 살아온 세월을 존경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모가 남자가 아닌 여자라서 좋다고, 나의 이모인 게 자랑스럽다고 말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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