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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봉씨 Jan 05. 2021

반갑습니다, 조중석씨.

내 일이라고 생각하면 죽어도 안되니, 차라리 클라이언트로 모시겠어요.


Prologue.


먹는 것보다 요리를 만드는 과정을 더 좋아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초대해 함께 먹는 것을 가장 좋아하지만, 일상이 바빠지면 바로 내팽개쳤던 것이 바로 '잘 챙겨 먹는 것'이었다.  급한 일이 있거나 일에 흐름이 끊어질라 치면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한다고 끼니는 바로 거르고 아침은 늘 빈속에 진한 커피로 시작했다. 저녁은.. 제대로 먹었다기보단 그날의 분노와 피곤함을 치킨 같은 것(흐흠)에 싸 먹었던 것 같다.


매일 마시던 술을 조금만 덜 마셔도, 치킨 대신 냉장고 재료로 볶음밥만 만들어 먹어도 그다음 날 얼마나 가볍게 일어나 지는지 물론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왜 그렇게 안됐을까, 그때는.


(돌아보니 현명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내 생활의 기준은 거의 대부분 내 기준이 아닌 일과 상황, 일에 관련된 사람들에 의해 돌아갔었기에 '나를 위한 시간'이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도당최 엉덩이가 움직여지지는 않았다.


 '아니 지금 내가 이거 할 때가 아닌데'
머리로 이해하고 엉덩이 떼면 바로 나한테 하던 소리.


따지고 보면 요리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요, 산책코스는 늘 집 앞 마트에, 새로 나온 먹거리 제품은 안 먹을지언정 우선 사는 것부터 체험하고 쟁여두는 분이 나를 위해서는 한 끼 차려먹으면서 잔소리 참도 많았다 정말.


그런데, 아무튼 예전보다 집에서의 생활이 길어지면서 어찌어찌 요리해 먹는 시간이 늘어나고 보니 기분이 썩 괜찮다. 일해야 하니까 아무거나 빨리 먹을 수 있는 거 밀어 넣던 때랑 다름은 물론이요, 하루 중에 먹는 시간이 더 길어졌는데 몸은 더 가벼워지고 있다. 이게 최고 반전이다. 


성격이 이상해서 아직 나한테는 덜 친절한 나이므로, 그냥 이 기분 좋은 걸 오래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해보다가 그냥 하루 세 끼를 클라이언트로 모셔보기로 했다. 그래야 한 끼라도 챙기고, 준비하고, 마감도 지키고 리포트도 쓸 것 같아서. (이 부분에서 웃지 맙시다. 저는 눈물이 나네요)



프로젝트 조중석



1. 조중석은 조식/중식/석식의 앞 글자 들이다.

2. 하루에 적어도 한 끼는 나를 위해 챙겨 먹자는 취지인데, 만들어 먹자는 거다. 편의점 도시락 데워먹고, 냉동식품 녹인 다음 덜어 먹자는 건 아니다. 

3. 2주 정도 해보니 끼니마다 인증샷이 남았고, 내일은 뭘 먹을지 고민하면서 오늘 남은 냉장고의 재료들을 정리하게 돼서 좋다.

4. 정리를 하니 우선 버려지는 식재료가 확연히 줄어 좋고 냉장고 문 붙잡고 '뭐를~먹을까항~' 이런 혼잣말이 줄어서 좋다.

5. 전날 남은 식재료 중심으로 다음날 메뉴를 계획하고 계획한 메뉴에서 추가 고민을 굳이 하지 않고 지켜서 먹으려고 노력하니 불필요한 고민이 줄어들어서 이것 또한 좋다.

6. 불필요한 식재료 더이상 안 사게 된다. 필요하면 다시 나가서 사면 된다. 그런데 요리하다 보면 그거 없다고 안 되는 적도 없다.

7.  기타

 - 요즘 하도 브이로그 하나쯤은 뚝딱 찍는 세상인 것 같아서 나 그것도 해봤는데 나는 아직 아닌 것 같다. 이리 저리 찍느라 영상미도 버리고 밥맛도 버렸다. (다들 어떻게 그렇게 예쁘게 하시는건지 경이롭습니다)

  - 그냥.. 재택근무가 덜 심심하다. 일이 늘어서.

12월 말부터 만나본 조중석들.



나를 위해 한 끼 정도는 공들여 먹기. 보여주기 위한 요리하지 않기.


가장 잘 지키고 싶은 두 가지. 내 마음이 또 언제 변할지 모르니까.

요리만큼이나 그간 놓쳐왔던 나를 아껴주는 시간을 더 많이 쓰고 싶어 시작하는 마음도 있으니 말 그대로 어떤 이유로든 못하게 될 때까지만이라도 해보자는 마음이다.


그리고 언젠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같이 해보고 싶다.

좋은 습관이라는 게 새로 들이기도 너무 어렵고 혼자 만들어가는 건 더더더 어려우니까.


아무튼, 

반갑습니다 조중석씨. 

잘 부탁해요.




체크리스트
채 썬 양배추
아보카도 과숙 중
냉동해둔 떡국떡
유통기한 임박 어묵 한 봉지

_1/2 냉장고
조: 요구르트(사과+견과류)
중: 아보카도 닭가슴살 샌드위치
석: 국물떡볶이

_1/3 예상 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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