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골즈워디, ⟨Snow Shadow⟩, 1985

by ByJoYo
Andy Goldsworthy, ⟨Snow Shadow⟩, Brough, Cambria, 13th Jan. 1985


다시 앤디 골즈워디.

빗 속에 누웠던 ⟨Rain Shadow> 반년 뒤,

이번에는 눈이 내리는

캄브리아의 숲 속에 누웠다.


작가의 기록에 따르면 매우 추웠고,

이미 쌓인 눈은 치워 넓은 공터를 만들었다.

두 번째 시도만에 이 ‘그림자’를

남기는 데 성공했다.


⟨Rain Shadow>처럼 눈이 녹으면,

혹은 오히려 더 내린다면

그림자 또한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이다.


일회적이고 소유 불가능하며,

따로 이 사진과 같이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면

개념(concept)으로만 존재할 예술.


어쩌면 이 작품의 진짜 주제는

그림자 자체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눕는다’는 행위이며,

그림자란 그 행위가 남긴

아주 한시적인 자취에 불과하다.


‘환경미술 environmental art’은

많은 경우

‘행위예술 performance art’이기도 하다.

그리고 퍼포먼스 아트는 대개

사진이나 비디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행위의 순간이 지나고

누군가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 예술의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사라지기 마련이어서,

그리고 내 생각에는

그렇게 사라지는 게 마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그 일이 있었다”는 증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행위가

예술로서 존재할 수 없는,

또는 기억될 수 없는 아이러니.

순간을 지향하지만

영원히 기억받고 싶은 욕망.


⟨Snow Shahow>

예술작품으로 관리해야 한다면

그 물리적 형태는

‘코닥크롬 64’로 찍은

35밀리 슬라이드 필름이 될 것이다.

크기는 필름의 사이즈인

24cm × 36cm.


나아가 어쩌면,

사진이라는 예술은 행위예술과

종이 한 장 차이인지도 모른다.

렌즈 앞에서는 아무리 ‘자연스러운’

표정과 포즈라고 해도 결국 어느 정도는

연기(performance)일 수밖에 없으며,

카메라를 들고 움직이는 작가는

다른 시각매체보다 피사체와 풍경에

보다 물리적이고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일종의 퍼포먼스를 펼치는 것 아닌가.


더욱이 사진이라는 틀에 담기는 대상은

다큐멘터리건 인물이든 풍경이든

언제나 순간적이며, 찰나의 사건들이다.

사진으로 남지 않는다면 사라질

모종의 사실들, 혹은 진실들.


사진은 언제나,

“그때-그것이-존재했음”의 증거다.

마치 여기에서 보이는,

비어있으나 그가 존재했음을 알리는

앤디 골즈워디의 ‘그림자’,

그리고 그것의 ‘사진-기록물’처럼.



사진은 앤디 골즈워디의 디지털 카탈로그 참고:

https://www.goldsworthy.cc.gla.ac.uk/image/?id=ag_03164&t=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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