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당퐁당 100편 글쓰기 47화
"어머니, 오늘 꼬미(태명)가 친구들이랑 그림책을 보는데 아기 돼지랑 늑대 목소리를 흉내 내더라고요. 혹시 평소에 연기를 하면서 읽어주시나요?"
"아... 네."
어린이집 선생님의 물음에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지만 수줍게 그렇다고 답했다. 그때 네 살배기 아이를 둔 나는 한창 책육아에 몰두하던 중이었다. 한글을 빨리 깨치게 하기보단 그림책 속 그림을 보고 엄마 목소리를 들으며 이야기에 흠뻑 빠져드는 경험을 안겨주고 싶었다. 사고가 덜 여물어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아이가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쳐볼 수 있도록 말이다.
종일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놀아주는 반복된 하루가 늘어진 엿가락처럼 느껴지던 시절. 베개에 머리만 대면 곧장 곯아떨어지는 부실한 체력임에도 매일밤 꿋꿋이 거르지 않는 습관이 있었다.
아이 옆에 누워 그림책을 읽어주는 일.
목소리 연기를 따로 배운 적은 없지만 학창 시절에 친구들로부터 누군가의 흉내를 잘 낸다는 얘기를 들어보았다. 부족한 자신감 탓에 끼도 배짱도 어중간하다 자평하고 지나가는 칭찬으로 흘려들었을 뿐이지만, 나 역시 또랑또랑한 내 목소리가 싫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돌쟁이 아기가 책을 장난감처럼 열어보고 놀 때부터 나는 오직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성우가 되어보자고 마음먹었다. 어느 날은 아기 돼지와 늑대, 어느 날은 공주와 마녀, 그리고 어떤 날은 드래건과 사냥꾼. 아이가 재밌어한다면 그 어떤 역할이라도 소화할 자신이 있었다.
비록 아이를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동화 속 주인공들의 목소리를 다 다르게 내어보는 일은 의외로 재미와 보람을 안겨주었다. 각양각색 달라지는 목소리에 따라 아이가 반짝이는 눈으로 동화 속 세상으로 깊숙이 빠져드는 게 보였으니까.
그러다 그림책이 지겨워지거나, 책을 읽어줄 기운이 바닥난 날에는 아이가 눈 감고 상상할 수 있도록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서 들려줬다. 이야기 짓기는 가만히 누워서 입만 움직이며 되는 일이니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으려는 엄마의 편리한 수작이긴 했다.
아이가 생애 처음 푹 빠져서 보았던 뽀로로 만화 시리즈. 아이의 생애 첫 장래희망은 뽀로로의 친구, 패티였다. 아이는 패티로 변신해서 뽀로로 친구들이랑 밤새워 놀아보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그럴 땐 차마 동심 가득한 아이에게 2D 만화 속 펭귄이 되는 건 절대 실현불가능한 꿈이라고 알려줄 수 없었다.
정 그렇게 간절하다면 엄마가 소원을 이뤄줄게. 자, 눈을 감아보렴.
"우리 꼬미가 뽀로로, 크롱, 에디, 포비, 루피와 함께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어요. 꼬미는 친구들과 숨바꼭질을 하기로 했지요. 술래가 된 꼬미가 두 눈을 가리고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노래를 불렀어요. 눈을 딱 떴더니, 세상에! 아무도 안 보이는 거예요. 다들 어디로 숨은 걸까요?"
"엄마, 미끄럼틀, 미끄럼틀."
"미끄럼틀 뒤에 누가 숨었다고 할까?"
"크롱, 크롱."
"맞아요. 크롱이 '크롱크롱'소리를 내며 숨어 있었죠. 그리고 미끄럼틀 옆에 키가 큰 소나무 뒤로 포비가 숨어 있었어요. 이런, 북극곰 포비는 덩치가 커서 금방 들켜버렸네요. 자, 이번엔 에디를 찾을 차례예요. 에디는 어디에 숨었을까요?"
아이는 영상이 아닌 머릿속 뽀로로 세상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스케이트를 타고, 열기구를 타고 하늘을 날았다. 그토록 좋아하던 뽀로로 친구들과 함께. 나는 가녀린 루피부터 똑똑하지만 얄미운 에디, 꼬마 자동차 뚜뚜까지 두루 흉내 냈다. 엄마 목소리가 뽀로로 친구들과 똑같다고 손뼉 치며 좋아하는 아이를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어쩌면, 재능이 있을지도?'
불혹이 다 되어 재능이란 것에 대해 고민해 보기 시작했다. 인생 그래프에서 남들 다 하는 기준에 맞춰 사느라 늘 좋아하는 일보다 해야 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정말로 좋아하고 잘하는 일이 무엇인지 발견할 기회가 적었다.
육아를 하다 우연히 찾은 재능. 아이가 엄마에 대한 콩깍지 씐 애정으로 감탄을 남발하는 거란 의심은 추호도 없이 근거 없는 자신감을 키워갔다. 목소리 연기를 본격적으로 배워보고 싶다는 꿈이 아이의 박수와 칭찬을 먹고 무럭무럭 자랐다. 제대로 배워서 언젠가 시각장애인을 위한 오디오북을 녹음하고,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싶다는 꿈. 언제가 됐든 꼭 해보리라는 생각만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찾아보니 "동화구연지도자"라는 자격증이 있었다. 보자마자 무슨 용기가 났는지 따보겠다고 결심했다. 본업과 무관한 분야였지만 이런저런 계산 없이 그냥 시도해보고 싶어졌다. 언젠가 이루게 될 막연한 꿈의 밑그림이라 여겨서였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자격증 시험에 응시자격을 얻기 위해서 <색동어머니동화구연대회>에 참가해야 한단다. 급히 투입된 나는 고작 대회를 이 주 남짓 앞두고 매일 퇴근 후에 멘토 선생님과 단기 속성 훈련을 해야 했다. 어느 분야나 깊이 파고들기 시작하면 연마의 과정이 녹록지 않은 법. 나는 기대보다 발음이 좋지 않았고 말의 속도가 빨랐으며 사투리의 영향으로 어미 끝 처리가 어색했다. 부족함을 깨닫자 재미로만 접근하려던 가벼운 마음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과연 잘할 수 있을까. 당장 돈을 버는 일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피곤함을 무릅쓰고 시간을 투자하는 게 맞는 걸까. 자신감이 떨어지자 애초의 다짐을 무색하게 만드는 자기 합리화가 슬며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다음편에 이어서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