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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적당 Jul 29. 2020

서른, 서른하나, 서른둘

이상한 여행, 늦은 깨달음


  서른 살 늦여름, 7년 연애하고 그중 3년을 같이 살았던 애인과 헤어졌다. 결혼 준비가 한창이던 때였다. 덕분에 나의 서른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살림을 정리하고 1인분의 삶에 적응하느라 바빴다. 이 무렵 혼밥 시간엔 미드 섹스 앤 더 시티를 봤다. 오랜만에 찾아온 '싱글 라이프'에 들떠 있었다. 운동을 하고, 나를 위해 요리하고, 사람들을 만나 술을 마시고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 서른이 지났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혼자서도 잘 지내는 내가 그저 뿌듯했다.


  그렇게 덤덤하게 유부녀가 될 예정이던 서른한 살을 맞았다.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던 5월의 그 날, 좋아하는 가수의 일본 공연이 있었다. 공연을 보고 싶으니 식을 조금 미루면 안 되냐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던져볼 만큼 많이 좋아했던 터라, 헤어진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덜컥 웃돈을 주고 좋은 자리를 예매했다. 거의 반년이 흘러 예매 사실을 까먹을 즈음, 회사 우편실에서 연락이 왔다. 커다란 봉투 안에 들어있는 손바닥만 한 종이 조각 한 장. 이게 40만 원이라니! 팀장 눈길 따위 아랑곳 않고 사무실 책상 위에 올려두고 인증샷을 찍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컬러 복사한 티켓을 반듯하게 잘라 모니터 옆에 붙여두었다. 별별 유난을 다 떨며 흥겨운 척해보려 했지만, 깨진 결혼식 날짜가 적힌 티켓을 볼수록 기분이 묘하기만 했다. 정말 가는 건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출발 당일에는 밀린 업무를 마무리하느라 밤을 꼬박 새운 채 계획 하나 없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깨어나 보니 벌써 나리타 공항이었다. 대충 화장을 하고 잔뜩 이쁜 척하며 셀카 한 장 찍고 나니 그제야 막막함이 밀려왔다. 2박 3일의 일정에서 공연을 제외하고 남는 시간을 때워야 했다. 당황스러울 만큼 하고 싶은 일이 전혀 없었다.  부리나케 튀어나오느라 충전도 못한 핸드폰은 이미 꺼져 있었다. 별 수 있나, 공항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돼지코와 충전기를 플러그에 끼우고 핸드폰을 켰다. 그러고는 성의 없는 손가락질로 시간 때울 곳을 찾았다.


  당연하게도, 그 날 관광은 완전히 실패했다. 처음에는 나름 호기롭게 이것도 먹고 저것도 해봐야지 생각했지만, 주린 배를 채우자마자 이내 잠이 쏟아졌다. 마침 시부야에 있는 츠타야 서점에 누울 곳이 있다는 글을 발견했고, 남들이 책을 읽는 그곳에서 나는 빈백에 누워 곯아떨어졌다. 제 집 안방인 듯 푹 자고 일어나니 조금 기운이 나는가 싶었지만, 신주쿠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바람에 그나마도 금방 떨어졌다. 줄 서서 먹는다는 유명 맛집의 라멘이고 나발이고 그저 드러눕고만 싶었다. 저녁 7시, 관광을 마치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미련 없이 호텔로 향했다.


꿀잠 명소(?) 츠타야 아파트먼트


  그런데 거기서도 일이 꼬였다. 체크인하는 기계에 여권을 스캔했는데도 계속해서 다음 여권을 넣으라며 화면이 넘어가질 않았다. 길게 늘어선 줄을 뒤로하고 한참을 씨름했지만 마찬가지였다. 뒤통수에 꽂히는 일본인들의 눈총이 따가웠다. 알고 보니 두 명 투숙으로 잘못 예약되어 있었다. 다른 한 명은 어디 있냐고 묻는 직원에게 원래부터 한 명이었다고 설명했지만, 나를 보는 직원의 눈에 동정이 가득했다. 저기요, 무슨 생각 하는진 알겠는데 진짜로 혼자 묵으려고 했거든요? 직원의 도움으로 힘겹게 체크인을 마친 후, 투숙객에게 인당 한 개씩 주는 맥주 두 캔(!)을 들고 터덜터덜 방으로 올라갔다. 설상가상, 종이학 두 마리가 침대 위에 곱게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가운이 두 개, 슬리퍼도 두 개. 울컥했다. 전부 다 내가 쓰지 뭐. 맥주 한 캔은 그날 바로 해치우고 나머지 한 캔은 짐 속에 챙겨 넣었다.


장난해?


  그 후는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시간이 훌쩍 갔다. 줄을 서고, 공연을 보고, 뒤풀이를 하고, 한숨 자고 일어나 호텔에 딸린 작은 온천에 갔다가, 늦은 점심을 먹고 다시 비행기를 탔다. 그렇게 일상으로 돌아왔다.


 내가 일본에 간 게 맞나? 정말 그 공연을 본 건가? 가기 전에도 그랬지만 다녀온 후에도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숱한 공연을 봐왔지만 이렇게까지 생생하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직접 찍은 동영상을 봐도 그랬다. 주변이 환해지는 듯한 내 가수의 웃는 얼굴이나 찡그린 미간, 고음을 내지를 때 뚜렷이 보이던 목 울대 등등 조각난 기억만 선명했다. 남이 찍은 사진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그때의 감정이 흐릿했다. 머릿속에 안개가 끼어있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던 기분이 가장 뚜렷하다니! 거진 2백만 원을 들여 다녀왔는데 허탈했다. 가수는 여전히 좋았다. 가수가 아니라 내 마음의 문제였다. 이유를 몰라서 더 답답했다.


  그렇게 또 반년의 시간이 흐른 어젯밤, 갑작스레 뭔가 쓰고 싶어졌다. 서른 살의 그 사건 이후 단 한 번도 내 마음을 정리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거슬렸다. 처음에는 이렇게 길게 쓰게 될 줄 모르고 핸드폰으로 끄적거리다가 세 문단이 넘어가면서부터 아예 노트북을 켜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생각나는 대로, 손이 가는 대로 쓰다 보니 5월의 이상한 여행이 주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내내 발버둥 치고 있었다. 나를 지키고 싶었다. 운동도, 요리도, 과하게 웃고 떠드는 것도 겨우 그깟 일에 무너지고 싶지 않은 자존심의 발로였다. 5월의 여행은 몸부림의 정점이었다.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던 그 날, 혼자 있으면 찾아올 적막, 그걸 뒤덮을 배신감과 모멸감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사정을 아는 누군가를 만날 기분도 아니었다. 그들의 얼굴에 조금이라도 걱정하는 기색이 보이면 비참할 것 같았다. 그렇게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일본으로 떠나 처음 본 사람들과 웃고 떠들었지만, 마음이 굳어서 움직이질 않았다. 몸뚱이 하나 멀쩡해 보이게 굴리는 것도 버거워서 무언가를 제대로 느낄 겨를이 없었던 거였다.


 이제 '정말로' 끝났구나. 이제야 길고 긴 터널에서 빠져나왔구나. 글을 쓰며 알게 되었다. 얼었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과정이었다. 허락하지 않았는데, 알아차리지도 못하게. Rebirth. 10cm의 이 노래를 듣고 펑펑 울던 때가 있었다. 평생 진심으로 웃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가, 기분 좋게 술을 마신 스물넷 어느 밤, 요즘 좀 즐겁네,라고 불현듯 중얼거리고 뒤늦게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순간의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 마음을 보면 누구든 행복하겠지


  서른둘을 앞둔 지금에야 알게 되다니. 항상 생각하지만 나는 너무 늦되다. 힘에 부치면 마음을 닫아버리는데 그걸 깨닫지 못한다. 머리와 몸을 분리해서 기계처럼 움직이다 뒤늦게 감정이 따라온다. 그래도 덕분에 완전히 망가지진 않았다. 놓친 것들이 많지만 꾸역꾸역 할 일을 했고 그게 나를 보호했다. 그래서 올해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서른 하나의 나에게 작년부터 고생 많았다고 말하고 싶었나 보다. 굳이 기록을 남기겠다고 기를 쓰고 끙끙거린 걸 보니.  


  다가올 서른둘의 나에게는, 그동안 잘 버텼으니 이제 그만 힘을 빼고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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