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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Gray Feb 13. 2020

61. 상대는 유튜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Week 34) 육아 아웃소싱의 역습


육아와 스마트폰.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렇듯 시작은 정당화될 수 있을 법했다. 카페나 음식점에서, 혹은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는 중에 심하게 떼쓰거나 울음을 멈추지 않는 아이를 달래는 데 이만한 게 없기 때문이다. 단지 나 하나 편하자는 게 아니라 공공장소에서 타인에 대한 피해를 줄인다는 목적이 더해지니 못 이긴 척 스마트폰을 꺼내게 되고, 아이가 좋아할 만한 영상을 틀어주면 부지불식간에 상황은 종료된다. 마법 같은 첫 경험은 늘 달콤하기만 하다.


하지만 문제는 계속되는 정당화가 정당화되지 못한 순간 찾아온다. 스마트폰을 다룰 줄 아는 사람답게 아이 역시 점점 스마트하게 진화한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 경우에는 '스마트(smart)'보다는 '클레버(clever)'라는 단어가 더 적합하지만, 어쨌든 전에는 대체로 얌전한 아이였건만 공공장소에만 가면 곧잘 칭얼대었고, 책을 보거나 그림을 그리며 잘 놀다가도 옆 자리 아이가 스마트폰을 보는 모습을 보게 되면 떼를 쓰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필요할 때 편하게 써먹었던 육아 아웃소싱의 역습이요, 핵심 업무를 남의 손에 맡긴 데 따른 혹독한 대가였다.






아웃소싱(outsourcing), 쉽게 말해 내가 하는 대신 무언가를 남에게 맡긴다는 뜻이다. 비용 절감이든 성과 개선이든 상관없이 내가 직접 수행하는 것보다 남에게 맡길 때 보다 높은 효율을 기대할 수 있는 분야라면 대개 아웃소싱의 대상으로 고려해볼 법하다.



하지만 그에 앞서 반드시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면, 핵심 업무와 이를 수행하기 위한 역량은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핵심이라는 분야는 가치를 창출하는 근원이 무엇인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에 그게 무엇인지는 스스로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가령 전통적인 자산운용사이라면 최소한 투자 메커니즘을 구축하는 업무는 남에게 맡겨서는 안 되겠지만 투자 시스템의 경우 직접(in-house) 개발하기보다 외부 업체의 패키지를 구매해 사용하는 일이 보다 효율적일 수 있다. 반면 같은 자산운용사라도 로보 어드바이저(Robo-advisor)에 기반한 알고리듬(algorithm) 투자를 추구한다면 투자 시스템 구축이야말로 핵심 역량에 해당하므로 반드시 직접 수행해 나가며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지속해야만 한다. 만약 이를 간과하고 핵심 역량을 남의 손에 맡겨버린다면 초기에는 그럭저럭 효과를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훗날 사소한 불씨 하나에도 존립 자체가 불투명해지는 위험에 처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아웃소싱의 효과는 기업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기대할 수 있다. 가령 맞벌이 부부들이 주말에 외출하는 동안 가사 대행업체를 통해 청소, 빨래 등 집안일을 맡기는 것 역시 일종의 아웃소싱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직접 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불필요한 부부싸움을 줄이고 주말을 평온하게 보낼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서면 일주일에 몇만 원 정도는 충분히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 김치를 사 먹거나 외식을 자주 하는 것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육아의 단계로 진입한 뒤에는 교육이라는 큰 산이 부모 앞에 등장하는데, 대개는 학원이라는 터널을 돌파구로 활용한다. 마찬가지로, 물론 부모가 직접 가르칠 수도 있겠지만 그럴만한 시간이 없거나 능력이 부족한 분야가 존재하기에 학원이라는 외부 기관에 아웃소싱을 하게 된다. 교육이라는 분야가 아이에게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교육 능력이 부모가 가진 핵심 역량은 아니기 때문에 모종의 거래는 성립된다.


어찌 보면 처음 아이의 손에 스마트폰을 쥐어준 것도 일종의 아웃소싱에 해당하였다. 우는 아이를 상대로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이고, 일단 맡기기만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해결되니 효율성 측면만 보자면 이만큼 대단한 것도 드물 것이다.


하지만 그 횟수와 의존도가 점점 증가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그 무대는 점차 집 밖에서 안으로, 수단은 스마트폰에서 TV로 확대되기 십상이다. 급기야는 퇴근 후나 집안일에 지쳐 피곤함을 이기지 못한 순간 못 이긴 척 먼저 손을 내밀기도 하니 처음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문제가 양산되고 만다. 애당초 한 번도 노출된 적이 없었다면 모를까, 한번 그 맛을 본 뒤에는 아이 역시 강한 중독성에 빠져들고, 부모는 그제야 깨닫는다. 스마트폰은 단순한 응급처치 도구를 넘어서 어느새 아이의 놀이 상대, 최고의 친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이의 가장 친한 친구가 꼭 부모일 수는 없겠지만, 부지불식간에 아이와의 놀이라는 핵심 업무를 아웃소싱하고만 꼴이니 스마트폰을 금지시키는 것은 곧 최고의 친구 역할을 부모가 되찾아와야 함을 의미한다. 스마트폰을 못 보게 하면 "그럼 난 뭐해?"를 연발하는 아이. 절반 정도는 같이 놀아달라는 말이겠지만, 나머지 절반은 아마도 자신 없으면 포기하고 돌려달라는 말로 들리기에 간담이 서늘해진다.





부모 스스로 스마트폰보다 아이와 더 즐겁게 놀아줄 수 있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지만, 경쟁 상대는 다름 아닌 유튜브(Youtube) 아니겠는가? 게임, 아이돌, 각종 랭킹 등 가십성 내용부터 과학, 역사, 예술 상식까지 셀 수 없이 다양한 분야의 크리에이터들이 저마다의 채널을 열어 유혹해대니 아이의 마음을 되돌리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부모보다 아이의 취향을 더 잘 꿰뚫어 보는 알고리듬으로 무장하지 않았던가. 과연 뒤늦게나마 핵심 역량을 되찾아 그들로부터 떼어 놓을 수 있을지, 아니면 힘으로 짓눌러 무작정 못 보게 해야 할지. 그도 아니면 적당한 선에서 현실과 타협하여 시간제로 운영하는 것이 답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사이에도 유튜브는 아이의 귓가에 쉼 없이 속삭여댄다.


'얼른 돌아와. 심심하잖아?'


보드게임, 레고, 그림, 직소퍼즐, 숨바꼭질, 테니스. 내가 가진 컨텐츠 역시 적진 않지만 무한에 가깝게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상대에 비하면 양적 질적 측면 모두 초라한 게 사실이다. 결국 적당히 타협하는 수밖에 없을까? 나만이 가진, 혹은 가질 수 있는 핵심 역량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연일 계속된 우중충한 날씨 속 모처럼 화창했던 어느 날. 작은 실마리는 의외로 장소에서 발견되었다. 특별할 것 하나 없이, 김밥 몇 줄 싸들고 동네 공원을 한 바퀴 산책하던 중 아이는 마냥 걷는 게 지루했는지 어릴 적 이야기를 해달라 졸라댔다. 어릴 적 이야기라니, 마땅히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없어 간단히 운만 띄웠다.


"아빠가 어렸을 때 이사를 참 자주 다녀서, 2학년 때인가 고일 국민학교에서 고명 국민학교로 전학을 갔는데..."

아이는 깔깔대며 웃었다. 국민학교라니, 너무 옛날 사람 같다고.


"왜냐면, 그때 상일동에서 명일동으로 이사를 갔거든. 그러고 보니 그 동네 이름은 죄다 비슷비슷하네? 상일동 하일동 강일동 명일동..."

또 웃는다. 옛날 사람들은 이름도 너무 대충대충 지은 것 같다며.


"아 맞다. 그 옆에 길동이라는 동네에도 잠깐 살았는데, 생각해보니 길동도 좀 이상하긴 하네? 길이 없는 동네도 있나?"

이번에는 애써 감춘 실소가 새어 나온다. 아빠표 아재 개그는 도통 재미가 없다나.


"그러다가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4월에 또 이사를 갔는데, 이번에 이사 간 동네는 이름이 둔촌이네? 뭔가, 둔하고 촌스럽지? 학교가 멀어져서 전학을 갈까 말까 고민이 많이 되었어 그때. 매일 30분씩 버스를 타야 했거든. 그래도 고민 끝에 전에 다니던 학교에 남기로 결정했는데, 왜 그랬게? 아빠는 오래된 학교가 좋았거든. 원래 다니던 학교는 100년이 넘었는데 새로 이사 간 동네의 학교는 고작 7년밖에 되질 않아서..."

이 말엔 눈을 맞추며 공감해준다. 자기도 오래된 학교가 좋다며, 서울에서 다니던 마포초등학교는 역사가 100년이 넘어서 너무 자랑스럽다고. 반면 지금 미국에서 다니는 학교는 10년밖에 되지 않았다고.


"그래서 결국 전학을 안 가고 학교를 다니며 새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는데..."


그다지 재밌을 것 없는 대화 속에 이어지는 아빠의 어릴 적 이야기. 하지만 뭐 그리 재밌다고 깔깔대며 웃어주니 나 역시 신이나 끊임없이 떠들었다. 중학교 친구가 슈퍼에서 몰래 껌을 훔쳐 같이 경찰서에 간 이야기, 한겨울 눈길에 미끄러진 차에 발가락을 밟힐뻔한 이야기, 그때 받은 돈으로 친구들과 분식집에 떡볶이 사 먹으러 간 이야기, 깡패한테 돈 뜯긴 이야기, 할머니께 돈 달라고 말하기가 어려워 몰래 단과반 수업을 도강했던 이야기까지.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시덥잖은 이야기건만 아이의 눈빛은 어느새 구독과 좋아요를 눌러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느 거장의 말처럼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일까? 여타 크리에이터들이 감히 넘보지 못할, 부모라는 특수관계에서 비롯되는 우월적 지위와 그로 인해 받기 쉬운 아이의 관심. 자신의 컨텐츠를 봐달라며 자극적인 썸네일(Thumbnail)을 적어놓고는 소리 지르며 애원하는 유튜버와는 달리 부모의 경우 작은 관심과 노력만으로도 아이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니, 골리앗을 무너뜨릴 작은 돌멩이들은 가히 도처에 널려있었다. 다만 그걸 주워 들려는 노력이 부족했을 뿐.


핵심 역량?

우리 관계다. 가족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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