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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홉시 Dec 28. 2018

“남들이 가지 말라는 길, 틀린 길 아니더라”

‘내숭 시리즈’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화가로 떠오른 김현정 작가 인터뷰


한복을 입은 젊은 여성이 휴대용 버너에 급히 끊인 라면을 양은냄비 채로 먹고 있다. 그녀의 눈은 명품백을 향해 있는데, 그 위로 스타벅스 커피가 엎질러지기 직전이다. 당황한 그녀의 입에서 외마디 탄식이 흘러나온다. <아차>, 혹은 <OOps>

김현정, < 아차 我差 / OOps>, 한지 위에 수묵담채, 콜라쥬, 160 x 110 cm, 2013


또 다른 작품을 살펴보자. <아차 我差/OOps> 속 인물과 같은 여성이 이번엔 노란색 저고리 한복을 입은 채 놀이공원용 범퍼카를 타고 있다. 근엄한 표정의 그녀가 운전 중인 범퍼카엔 슈퍼카 람보르기니의 엠블럼이 떡하니 새겨져 있다.


김현정,<내숭 : 할부인생> 한지 위에 수묵과 담채, 콜라쥬, 159 x 115 , 2016


위 작품 속 제목처럼 우리들은 대개 <할부인생>에 허덕인다. <아차 我差/OOps>의 여성과 마찬가지로 한끼 식사를 라면으로 때우는 일도 예사다. 하지만 동시에 명품백을, 슈퍼카를 욕망하는 것도 우리의 솔직한 속내다. 이런 모순돼 보이는 우리네 삶에, 위 작품 속 여성이자 화자인 김현정(만 30세·사진) 작가는 말한다. “저 모습을 사랑해야 되지 않을까? 우린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니까.

지난 2017년 포브스(Forbes)가 선정한 ‘아시아에서 영향력 있는 30세 이하 30인’에 꼽힌 김현정 작가는 최근 국내 화단에서 가장 주목받는 존재다.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각종 세태를 풍자와 해학으로 풀어낸 그녀의 작품은 ‘내숭 시리즈’, 혹은 ‘21세기 신풍속도’라는 이름 아래 출품될 때마다 화제를 불러모은다. SNS에서 수만명의 팬을 확보하는 등 ‘한국화의 아이돌’이라는 별명이 붙은 김 작가의 인생 이야기를 아홉시가 살펴봤다.



지난 2013년, 당시 만 25살의 김 작가가 연 첫 개인전 ‘내숭 이야기’는 이틀 만에 출품작 13점이 모두 판매되며 업계 안팎에 돌풍을 일으켰다. 2016년의 ‘내숭놀이공원’ 개인전은 6만7,402명이 관람해 국내 작가 개인전 사상 최다 관람객이란 기록을 세웠다.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에서 최연소 작가로 초청됐고, 2016년엔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도 초대 개인전을 여는 등 김 작가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화가로 손꼽힌다. 
  
세간의 스포트라이트를 처음 받은 김 작가의 작품은 ‘내숭 시리즈’다. 스스로를 모델로 삼은 자화상이기도 한 그녀의 그림은 고상한 한복을 입은 젊은 여성의 고상하지 않은 일상을 풍자와 해학을 담아 그려낸다. 잠깐 그녀의 다른 작품을 더 들여다보면, 온갖 주전부리의 잔해 옆에 한복을 벗어던진 채 속치마만 입은 여성이 몸무게를 재는 작품엔 <내숭:마주한 현실>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내숭: 나를 움직이는 당신>이란 작품에선 그녀가 한복을 입은 채 한 패스트푸드 업체의 배달 오토바이를 몬다. 최근엔 대한민국의 보다 다양한 풍경을 그녀만의 독특한 화풍으로 풀어낸 ‘21세기 신풍속도’로 그 소재와 지평이 넓어지긴 했지만, 그녀의 초기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단어는 ‘내숭’이다.


위 그림부터 <내숭:마주한 현실>, <내숭: 나를 움직이는 당신>, <21세기 신풍속도:정초풍정>


“‘내숭’이 일종의 거짓말이잖아요. 속마음과는 다르게 하는 거짓말. 누구에게 잘 보이고 싶거나 남의 시선이 신경 쓰여 하는 거짓말인데, 그게 꼭 밉지만은 않아요. 그 속이 다 드러나 보이니까. 이 내숭 시리즈를 비롯해 저의 작품은 제 모습을 그린 것이거든요. (이를 통해) ‘나도 이런데, 혹시 너도 그러니?’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나아가 ‘이런 모습을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잖아’라는 공감의 메시지를 던짐으로써 유쾌하게 사회를 풀고 싶었어요. 이 각박한 삶 속에서 제 그림을 보실 때만큼은 ‘어우 웃겨, 발칙해’라고 해주시면 제게 더 행복한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화가로 자리매김했지만 김 작가가 탄탄대로의 길만 걸은 건 물론 아니다. 예술고등학교, 서울대 재학 시절의 극심한 경쟁 속에서 심각한 우울증을 겪었다. 이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화풍이 자리를 잡았다고 김 작가는 말한다.
  
“어렸을 때부터 미술 공부를 했는데, 굉장히 경쟁이 심했죠. 특히 대학생 시절엔 서로가 서로를 배신하는 일상에서 상처를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제 그림의 시작은 이 우울증의 치료 목적이었어요. 처음에 그림의 대상이 된 것도 제가 미워하는 사람이었고요. 그 사람들에게 ‘제 모델이 돼 달라’고 할 수 없으니, 저를 모델로 삼아서 그린 것 뿐이죠. 그런데, 이 작업을 계속하면서 드는 생각이 ‘(미워하는) 친구가 나랑 너무 닮아서 미워했던 게 아닐까’ 였어요. ‘그 친구를 미워하는 게 결국 나를 미워하는 거구나. 그럼 사랑을 해줘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이런 식으로 인정을 하게 되니까 더 이상 누구를 미워하지 않게 되고 뭔가 더 좋은 점을 찾아내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제 그림이 ‘자화상’이 됐고, ‘내숭 시리즈’가 탄생하게 됐어요.” 
  
▶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화가 김현정 작가가 내숭 시리즈를 그리는 모습을 아래(영상에서 확인해 보세요.   


김 작가의 그림은 한국화의 ‘수묵담채’와 서양화의 ‘콜라주’ 기법이 섞여 있다. 전체적으론 수묵 담채 형식으로 그림을 그리되, 한복 부분은 한복 특유의 서걱거리는 느낌을 구현하기 위해 한지를 직접 붙이는(콜라주) 식이다. 이 같은 기법의 특이성보다 더 눈길을 끄는 건 역시나 스토리다. 김 작가가 그림으로 담아낸 우리네 일상은 보는 순간 ‘픽’ 웃음이 나올 정도로 유쾌하고, 발칙하다. 
  

“아이디어는 곳곳에서 나오는데요. 일상에서 ‘아, 이거 재밌다’라는 것도 있지만 한계가 있죠. 보통은 팀원들과 재미있는 생각이 날 때까지 쥐어짭니다.(웃음) 혹은 ‘소셜 드로잉’(social drawing)이라고 제가 조어를 한 건데요. 온라인에서 네티즌 분들과 함께 브레인스토밍을 해 아이디어를 구하기도 하죠.” 
  
2011년 대한민국여성미술대전과 세계평화미술대전에서 각각 한국화 부문 금상과 최우수상을 받으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김 작가. 이후 ‘10년 뒤 한국을 빛낸 100인’(동아일보), ‘다름다운 사람들 최우수상’(JTBC), ‘아시아에서 영향력 있는 30세 이하 30인(Forbes 30 under 30 in Asia·포브스)’ 등에 잇따라 입상·선정되며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화가 대열에 합류했다.    



“정말 많은 상을 받았어요. 그때마다 정말 감사하죠. 그런데 그런 상이 인생을 바꾸진 않는다고 생각해요. 다만 ‘남들이 하지 말라’는 길을 내가 가고 있는데, 이 길이 틀리지는 않았구나’ 하는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정도죠. 그 이상에 대해 우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20대의 나이에 자기가 속한 분야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 흔하지 않은 일을 해낸 김 작가가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는 건 ‘성실’이다. 실제 김 작가는 현재도 주 7일 근무로 성실이라는 단어를 온몸으로 실천하는 중이다. 천재적 영감이나 재주 등이 주로 회자되는 예술의 영역에서 성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김 작가의 말은 그래서 새겨들을 만하다. 
  
“그림 그리는 게 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또 제가 공장인데, 공장이 가동을 멈춰버리면 수익이 안 나기 때문에 저는 멈출 수 없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천재가 아니기 때문에 게으를 수 없다고 생각해요. 사실 자신을 다듬어나가는 데 주어진 시간은 생각보다 길어요. 이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다보면 그 시간이 쌓이고 쌓여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단단하게 성장할 수 있는 것 같고요.”   


글/인포그래픽= 아홉시 유병온 기자 on@bzup.kr 
영상/사진 촬영/제작= 아홉시 백상진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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