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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홉시 Apr 17. 2019

한국의 마지막 칼장인 "지금 당장 ‘덕질’을 시작하라"

전통 방식 도검 제작가 한정욱 명인의 전무후무 ‘덕질’ 인생기



지난 2015년 용의자가 18년만에 미국에서 송환되면서 전국민의 관심을 불러모은 ‘이태원 살인사건’. 1심 선고 전 열린 마지막 공판에 범인의 것과 똑같은 미제 나이프를 든 남자가 등장했다. 검찰 측의 마지막 증인으로 나선 그는 재판정에서 칼을 휘두르며 범죄 장면을 재현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그의 증언은 이후 진범 패터슨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마지막 증인’의 정체는 도검 제작 명인 한정욱(사진) 씨. 에 관한 한 그는 국내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운 최고 전문가이자 ‘덕후다. 대한민국 사법기관이 인정할 정도의 ‘덕력(力)’을 갖추기까지, 한 씨는 어느 정도로 칼에 몰입했을까. 장담컨대, 이 글을 읽고 난 후 당신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덕질의 끝을 보게 될 것이다.
 
▼ 대한민국 마지막 칼 장인 한정욱 씨의 작업 모습을 아홉시 영상으로 즐겨보세요.


레이저총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제다이는 왜 광선검만 쓸까?


“어렸을 때부터 칼을 좋아했어요. 그냥 좋아했어요.”

 
한 씨가 어렸을 당시,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하면 소지할 수 있었던 작은 캠핑용 칼. 그게 그가 앞으로 50년 이상 걷게 될 ‘칼의 여정’의 출발점이었다. 그렇게 칼이라는 도구에 처음 재미를 붙인 한 씨는 중학생 때부터 미군용 대검이나 과도를 허리에 매고 캠핑을 다니며 날붙이를 모았다. 수집 뿐 아니라 제작법사용법상처에 관한 지식까지 칼에 대한 모든 것을 흡수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30년 넘게 수집했죠. 관련 자료도 꽤 많았어요. 대학 졸업하고 직장 다니면서도 쭉 관심 대상이었던 거예요. 원래는 정년퇴직 후에 작게 전시판매장을 만들어서 여생을 보낼 계획이었어요. 그런데 이게 당겨진 거죠.”


서울 인사동에 위치한 나이프갤러리 전경. 이곳엔 한 씨가 평생에 걸쳐 모은 6,000여 점의 도검류가 전시돼 있다.


마흔 일곱. 안정된 밥벌이를 포기하기엔 조금 이른 나이에 그는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다만 한 씨가 다른 명예퇴직자들과 달랐던 건, 아주 오랜 기간 준비해 온 제 2의 인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한 씨는 자신의 30년 칼 수집 역사를 서울 인사동의 한 공간에 담아놓고그 곳에 ‘나이프갤러리'란 이름을 붙였다

 
“전 세계적으로 주방칼, 주머니칼부터 4~5m 되는 창까지 수천 개를 모아놓은 전시장은 없어요. 개인이 하는 건. 그런 상황에서 2000년도에 갤러리를 여니까 칼 마니아들이 우스갯소리로 한정욱 씨가 이 땅의 칼의 역사를 새로 쓴다고 하더군요.(웃음) 10년 전 까지만 해도 관람객이 하루에 200명씩 왔거든요. 좀 덜 들어오라고 입장료를 1,000원씩 받았을 정도니까.”
 
한 씨는 미세한 곡선과 날이 전부인 칼을 “단순해서 더 매력적인 물건”이라고 표현한다. 그 증거로 그는 지극히 ‘덕후’스러우면서도 묘하게(?) 설득력 있는 예시를 들었다.
 
“스타워즈에도 광선검이 나오잖아요. 레이저 총이 난무하는 세상에 왜 제다이(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가상 조직)는 광선검만 쓰겠어요?(웃음) 수천년이 흐른 뒤에도 칼은 매력적인 물건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거죠.”
 


한반도의 ‘강철 DNA’ 살리는 마지막 칼 장인


수집품 6,000여점을 모아놓은 전시장만 해도 입이 떡 벌어질 만 한데, 그의 ‘덕질’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칼을 모으고 판매하는 일을 넘어 ‘대한민국 칼의 역사를 복원하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과거에 국가라고 하면 ‘농기구’와 ‘무기’ 두 가지가 없으면 망해요. 즉 우리나라가 5천년의 역사를 갖고 있단 건 제철 산업이 엄청나게 발달했다는 의미죠. 4~5세기 사이에 이 기술들이 일본으로 건너 갔어요. 일본에서 이 기술을 받아들여서 새롭게 만들어낸 문화가 일본도(刀)예요. 우리도 오랫동안 갈고 다듬었는데 조선 후기에 오면서 흐지부지 사라졌죠.”


한 씨는 정강원을 '옛날 포항 제철소'라고 표현했다. 이곳에서 제철과 칼 제작의 전 과정이 이뤄진다.


사라져 버린 한반도의 ‘강철 DNA’를 복원하는 일. 한 씨는 이 역사적 소명에 여생을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갤러리를 연 이듬해에 전통 방식으로 쇠를 내리는 제철소 ‘정강원(精鋼院)’을 경기도 양주에 세운 이유가 이 때문이다.

 
“지금 대장간에 가면 자기가 원하는 크기의 강철들을 숱하게 구할 수 있어요. 사다 쓰면 돼, 돈만 있으면. 그런데 그렇게 만든 칼을 우리 전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한국에서 칼을 제대로 만드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우린 철판 사다 써’ 이럴 순 없잖아요. 그래서 예전에 갖고 있던 자료를 찾고, 주변 학자들 도움을 받아서 제철소를 시작한 거예요.”
 


아무도 안 하니까 내가 한다


칼. 인류 역사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 준 ‘도구’이자 수많은 이를 희생시킨 ‘무기’이기도 한, 글자 그대로 ‘양날의 검’. 한 씨의 인생에도 칼은 즐거움을 가져다 준 취미이고 직업이자고난의 길로 들어서게 한 양날의 검같은 존재다.

 
 “쇠를 내리는 것조차도 10번 정도 시행착오가 있었어요. 5천만 원에서 1억 원 정도를 날린 거예요. 제철소 유지비만 해도 1년에 1억 원씩 들어요. 그걸 17~18년 끌고 왔으니까 돈을 많이 까먹었죠. 게다가 저희는 이틀에 한 번, 세 시간씩만 작업해요. 안 그러면 사람이 죽어요. 실내 온도가 높고 작업 강도도 세니까. 막노동이죠. 이런 막노동이 없어요.”


불 앞에서 철과 씨름하다 보면 몇분도 안돼 땀이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흐른다. 여름에는 실내 온도가 55도까지 치솟는다.


스스로 ‘막노동’이라 표현할 정도로 힘들고 어려운데다 돈도 안 되는 일. 그래서일까. 전통 방식으로 쇠를 내려 칼을 제작하는 장인은 한 씨를 포함해 대한민국에 단 두 명뿐이다. 그 가운데서도 사철(모래 모양으로 강이나 바다 밑에 퇴적된 철광석)을 채취해 정련하고 완성품으로 만드는 기술을 다루는 사람은 한씨가 유일하다.

 
“그렇게 힘든데 왜 하냐고 많이들 물어봐요. 난 미쳐서 한다’ 그래요. ‘한 사람도 안 하니까 나라도 해야겠다내가 살아있는 동안 해야겠다.’ 어쨌든 저는 칼을 뽑았잖아요. 뽑았으니 갈 때까지 가는 거예요. 제가 망치질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지금 이렇게 정련하는 건 제가 처음이고 마지막이에요우리나라에 존재 안 해.” 


단단하고 질 좋은 칼을 만들기 위해서는 직접 망치질을 해야 한다. 한 씨는 자신이 망치를 들 수 있는 기간이 몇 년 남지 않았다고 말한다.


당신이 지금 당장 ‘덕질’을 시작해야 하는 이유


‘전통 칼 제작 장인’, ‘나이프갤러리 대표’, ‘도검 전문가’. 칼과 인생을 함께한 한씨를 수식할 만한 단어는 많다. 그러나 ‘대한민국 최고의 칼 덕후’ 만큼 그의 한평생을 함축할 수 있는 수식어가 또 있을까. 한 씨 역시 인간은 모두가 말년에 덕후가 돼야 한다는 ‘덕질’ 예찬론자다.

 
“서른부터 직장생활을 한다고 하면 은퇴까지 20년 가량 걸리잖아요? 그 기간 동안 준비를 해야 해요자기가 좋아하는 걸 할 준비. 그래서 은퇴할 때 ‘덕후가 돼있어야 해요. 제가 하는 검술 모임이 있는데 30대부터 50대까지 와요. 수익도 생기고 세대를 아우르는 교류도 생기고. 긴 세월을 했을 때 ‘선수’가 될 수 있는 것 하나만 있으면 돼요. 나이 60줄에 ‘선생님 오셨습니까’ 그것만 해도 어디에요. 말년이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글·인포그래픽·영상편집= 아홉시 김현주 기자 joo@bzup.kr
사진·영상 촬영= 아홉시 백상진·김경범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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