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얼음 세 개의 온도

by 흠흠

제1화 얼음 세 개의 온도



제1부 프롤로그



"안녕하세요, 변호사님!"

김변호사가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오른쪽에서 지효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효의 밝은 인사는 매일 아침 사무실의 무거운 공기를 한 톤 높여놓곤 했다.
지효의 의자 뒤에 걸려있는 이달의 일정표에는 상담예약과 재판일정 등이 드문드문 적혀있었다.

김변호사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칸막이 너머로 이재식 사무장이 돋보기를 코에 걸치고 구부정한 모습으로 키보드를 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재식 사무장은 낮은 목소리로 일어나지도 않고,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인사를 했다.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너무 익숙한 관계.

이 사무장의 책상 바로 맞은편, 손때 묻은 나무 문을 열면 김변호사의 방이었다.


그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기 전, 정면의 상담실 유리문을 한 번 쳐다보았다.

수많은 눈물과 한숨이 머물다 가는 그 방은 오늘 아침에도 정적에 잠겨 있었다.

"오늘은 11시에 이미경씨 상담이 예약되어 있습니다. 기록은 책상 위에 두었습니다"

지효의 말에 김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로 들어갔다.

낡은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고 코트를 옷걸이에 걸었다.

서랍에서 만년필과 메모를 꺼내는 사이, 지효가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미경과 동식이 피고로 기재된 소장은 간단했다.
'부정행위'
김변호사는 기록을 덮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의 가로수가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제2부 미경



​11시가 되고 사무실 문이 열렸다.

소박하고 단정한 인상의 40대 여성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바람을 피우셨다구요.."
"네.."
"남편의 주장을 모두 인정하시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미경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남편과 결혼 한지는 10년이 조금 넘었어요.
아이도 하나 있구요.
그 사람은 참 평온한 사람이었어요.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몸을 담그고 있어도
내가 물속에 있는지조차 잊게 만드는
미지근한 욕조 같은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동식씨는 좀 달랐어요.
같은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늘 제 곁에 있었어요.
저는 따뜻한 아메리카를 좋아해요.
그런데 또 뜨거운 건 잘 못마셔요.
그런데 동식씨가 그걸 기억하더라구요.
팀원들과 같이 점심을 먹고 카페에 가면,
그는 카운터에 이렇게 말을 해요.
'따뜻한 아메리카노 하나에는 얼음을 세개만 넣어 주세요. 너무 뜨겁지 않게'
그러고는,
얼음 세개가 둥둥 떠있는 아메리카노를 줘요.
가벼운 윙크와 함께.

제가 너무 매운 것도 잘 못먹는데,
그는 그것도 기억하더라구요.
순두부찌개를 먹으러 갔던 날,
그가 '순두부찌개 하나는 덜 맵게 해주세요'라고 하는 거에요.
그때 심장이 많이 두근거렸어요.

사무실에서 제가 상사에게 혼났던 날이었요.
제가 울면서 옥상에 올라갔었는데,
그 사람이 어떻게 알았는지 옥상에 올라오더니
저에게 그 상사 욕을 엄청 해주는거에요.
울면서 올라갔는데,
웃으면서 사무실로 내려왔어요.

옥상에서 내려오면서..
저도 모르게 그 사람의 팔짱을 끼고 있더라구요.
차가운 바람이 불었는데, 따뜻했어요.

그날 같이 야근을 했어요. 그 사람이 보고서도 고쳐줬어요.
일을 다 끝내고나서, 그 사람이 제 손을 잡더라구요.
'미경씨 힘내요'
제가 놀라서 그 사람의 얼굴을 쳐다봤는데..


...너무 따스하게 웃고 있더라구요..."

김변호사는 고개를 숙이고 있던 미경을 바라보았다.
"남편이 미경씨의 불륜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미경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
"며칠 전 토요일 아침에 제가 남편과 함께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어요.

'카톡'

제가 그 소리에 핸드폰을 들었어요."

미경은 핸드폰을 김변호사에게 보여줬다.

'미경씨, 어제 밤에는 잘들어 갔어요?'

"옆에 있던 남편이... 그걸 봤어요."
미경의 눈에서 눈물이 한방울 떨어졌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 주시길 바라시나요?"

김변호사는 무심히 핸드폰을 돌려주며 들고 있던 펜을 놓았다.



제3부 결말



첫 기일이었다.
원고 변호사가 변론을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판사가 김변호사를 바라보았다.

"판사님, 피고 미경은 원고의 청구를 전부 인정하고 있고,
원고가 구하는 위자료도 전부 지급할 의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판사는 눈을 크게 뜨며 김변호사를 바라보았다.
"정말인가요?"

재판은 허무할 정도로 금방 종료되었다.
법정을 나선 김변호사는 멈춰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기 사무실을 찾아오는 보통의 의뢰인들이 떠올랐다.

'물론 제가 바람을 피우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잘못한 게 없어요. 다 그 사람 탓이에요.'

악다구니처럼 다투는 사건들 속에서 이미경씨 사건은 드문 사건이었다.

사무실을 나서던 미경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편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고 싶어요. 그렇게 해주세요. 변호사님'

그날 이후에도,
비슷한 사건들은 계속 들어왔다.
하지만, 그날의 그 말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제4부 에필로그



어렸을 적 김변호사 살았던 집 입구에 있는 어둑어둑한 골목길.

김변호사의 옆집에 살던 지혜가

아이 둘과 함께 캐리어를 끌고 아버지 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