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기 사관후보생에 지원한 000입니다!”
https://youtu.be/dbXa26RwURE
calla - wave to earth
2025년 8월 26일.
프랑스를 떠나기 전 날 밤이었다.
이제 짐은 얼추 정리가 다 된 상태였고 내일 집을 떠나 가져갈 짐 가방과 휑해진 가구들이 눈에 들어온다. 10년간 쓴 침대도 오늘이 지나면 안녕이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10여 년 전 프랑스에 발을 내디딜 때만 해도 앞으로 나의 삶은 쭉 이곳에 머물지 않을까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야망이 넘치는 나는 프랑스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학년 차석으로 졸업하였으나, 운명의 가로막음인지 나는 진학의 실패하고 그저 평범한 고등학교를 갔었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생이 되었을 무렵, 나는 다시금 사관생도라는 꿈을 품기 시작했다. 사실은 중학생 때부터 늘 염원하였는데 막상 고등학생이 되니 진로를 정해야 했고, 머리가 아닌 마음이 시키는 일을 하고 싶었다. 이를 위해 사관학교를 진학하기 위해 준비하기 시작했다.
성적은 썩 괜찮았는데… 다리가 문제였다. 어려서 다친 발목의 수술 자국이 너무 커 조종 특기를 받을 수 없다는 걸 알고 깊은 좌절에 사로잡혔던 순간이 기억난다.
대학에 진학했다. 고등학생 때 이과였지만 특이하게 대학교는 문과로 갔다. 사실 이과를 간 이유 또한 조종사의 꿈을 이루기 위함뿐이었으니 어쩌면 이치에 맞는 결정이었다. 그렇게 파리 대학교를 졸업하고 석사를 했다.
모든 것이 무난했으며 모두가 부러워했다.
소위 말하는 좋은 학교, 좋은 스펙에 또래 나이에는 경험하기 어려운 의전부터 국제회의 통역까지 나는 이미 어려서 통역사로 꽤 괜찮은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하게 나의 삶은 행복하지 못했다. 일하는 것은 무척 재미있었다. 늘 인정받고 어려운 일을 척척해내는 내가 스스로도 뿌듯했다. 그런데 마음 한편은 늘 그러지 못했다. 어쩌면 그 응어리를 외면하고 싶어 더 열심히 일했나 싶다. 낮에는 대학원 수업과 연구를, 밤에는 자기 전까지 과외를 했다. 통역 준비도 하고 운동도 하며 사실 지금 돌이켜보면 꽤나 바쁘게 살았다.
항상 불편한 마음, 무거운 마음이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원하는 거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화두를 끊임없이 던졌다. 그러나 그 화두는 마치 뫼비우스의 띠 속 부메랑처럼 무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행복하지 못했다.
나름 자산도 있었다. 나의 대학 졸업장은 어디서든 먹어주는 꽤나 그럴싸하고 근사한 타이틀이자 보험이었기 때문이다. 어딜 가든 좋은 곳에서 좋은 것을 먹었다. 소위 말하는 멋진 인생을 살고 있었으나, 나의 속은 썩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i felt like my life was stuck in a rut
이 말을 혼자 되뇌는 날이 많아졌다. 파리에서의 무한 굴레 삶은 이제 나에게 더 이상 어떠한 종류의 즐거움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저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었고 하루빨리 세상으로 향하고 싶었다. 의미 있는 일,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물론 지금 하는 일이 무의미하며 가치가 부재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러나 무엇인가 좀 더 실질적으로 세상에 기여하고 싶었다. 근사한 무도회장에서 즐기는 샴페인도 좋았지만 나는 그 이상의 것을 원했다. 특별하고 화려한 일보다는 도전적이고 모험이 넘치는 그런 삶 말이다.
침대에 누워 멍하니 인스타 스크롤을 내리다 다시금 나의 과거의 염원을 발견했다.
통역장교.
나는 통역사였다. 아니 지금도 통역사다. 과거의 진한 꿈이 군인이었다. 언젠간 통역장교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늘 품고 있었던 과거의 생각이 떠올랐다. 나의 깊은 염원을 외면하려 기계처럼 일만 하다 결국 마주하지 못한 아니 어쩌면 용기가 없어 바라보지 않으려 했던 그 자리. 국군 고위급 곁에서 그들의 말을 전달해 주며 서로서로가 통하게 만들어 주는 일을 하는 사람들. 각종 행사와 연합훈련에서 가교 역할을 수행하며 작전과 연합훈련의 성공적인 진행을 도우는 이들.
마치 4차 산업시대라는 거대한 기계들의 기세에 눌려 결국 엔진 점화 등을 꺼야 했던 3차 산업시대 증기기관 같았던 나의 마음이 다시금 요동치기 시작했다. 통역장교라는 길과 그 모습은 꺼져버린 엔진을 재가동시키기 위해 충분한 석탄과 같았다. 내가 진정으로 원한 도전적이고 모험이 가득한. 결정적으로 의미와 가치가 충분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나의 일상 속 모든 신경은 온통 통역장교로 향했다. 기사, 글, SNS, 유튜브, 통역장교에 대한 모든 것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제는 읽어보지 않은 정보가 없을 정도로 찾아보고 음미하고 상상했다.
하나 둘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루한 쳇바퀴를 잊기 위해 모았던 레고들을 정리했다. 무언가의 홀린 듯 말이다.
일을 정리했다. 클라이언트들에게 귀국 소식을 통보했다. 나는 더 이상 파리에서 살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이자, 지금까지 이어왔던 삶의 종지부였다.
그렇게 토익 시험을 보고 통역장교를 갈 준비를 했다. 아슬아슬하게 출국 일주일 전 955점을 달성하고 기본 요건을 충족했다.
그렇게 다시 2025년 8월 26일. 나는 마침내 애증이 가득한 이 나라를 떠날 준비가 되었다. 언젠간 이 나라를 떠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이따금 할 적이 있었으나, 그 순간이 내 예상보다 더 빨리 도달했다는 사실에 약간 우습기도 했다. 부모님은 서운한 기력을 이따금 내비치셨다. 그럴 만도 할 것이 태어난 날부터 무려 26년을 단 한순간도 떨어져 지낸 적이 없으니 당연할 것이다. 나에게도 아직은 가족과 떨어져 지낸다는 것이 낯설고 깊게 다가오지 않는데, 나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자라온 모습을 본 하나뿐인 아들이니 어머니와 아버지는 오죽하실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씩 방을 치우는 나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모습이 많이 기억난다. 그럴 때면 나의 선택이 인지적 편향적 오류인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을 이따금 했지만, 결론적으로 내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할 시간이 도래한 것일 뿐이라며 마음을 다 잡았다.
나에게는 사소한 습관이 하나 있다. 어딘가를 갈 때면 반복해서 듣는 노래를 하나 정한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는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특정 노래를 들을 때면 당시 공간의 향기, 분위기 온도 그리고 기분이 다시금 생각난다. 그렇기에 한 곡을 정해두고, 그 순간이 그리울 때면 다시금 나만의 노래 저장고 속 먼지 쌓인 곡을 꺼내 들어 순간을 회상한다.
당시 짐을 정리하며 문득 꽂혀 듣던 웨이브 투 어스의 칼라. 사실 당시에는 아무것도 안 하고 방을 치우는 게 워낙 지루한 일이었기에 아이패드로 무작위로 곡들을 재생하다 얻어걸린 곡이었다. 영어 가사였고 방을 치우며 들으니 가사에 집중하지도 않고 그저 “음 꽤 좋네? 약간 작별 인사 같다”라는 마음으로 무한 재생했었다. 나의 떠나는 날 노래는 이 노래였다. 파리가 이제 잘 가라고 수고했다고 마치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만 같은 기분을 준 노래였다.
그렇게 나는 다음 날 텅 빈 방을 뒤로한 채 옅은 미소를 머금고 집을 나섰다. 텅 빈 가구만 남은 방을 보자니, 지난 10년의 추억을 두고 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치 지난 시간들은 모두 여기에 남겨두고 새로이 떠나는 느낌이었다. 정말 필요한 옷 몇 가지와 물건 몇 개만을 챙기고 방을 나섰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나 보다. 나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2025년 11월 8일, 나는 오산 공군 작전 사령부에 있다. 10월 18일 해병대 시험을 시작으로 육군, 해군 그리고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는 그 유명한 공군 통역장교 선발 평가가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4군 시험 중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는 공군 통역장교 선발 시험은 그 이름처럼 악명 높았으며, 고도의 전문성을 필요로 했다. 늘 사진 속에서만 보던 공군 기지와 통역장교들이 나를 맞이했다. 추운 가을 날씨와 우중충한 하늘. 연이은 평가들로 인해 지칠 대로 지친 응시자들을 태운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공군기지였다. 공군의 모든 작전을 총괄 및 담당하는 작전 사령부와 한반도 내 주둔하고 있는 주한미군 소속 제7 공군이 함께 사용하는 기지기에 규모 자체도 상당했었다.
오전부터 진행된 평가는 오후 5시 종료되었다. 부대에서 제공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대한민국을 지키는 가장 높은 힘”이라는 공군의 슬로건이 눈에 들어왔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새벽부터 이어진 평가에 모두 지친 기색이었다. 저마다 각기 다른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거나 지그시 눈을 감고 쉬는 사람들, 평가 뒤 긴장이 풀리며 아드레날린이 서서히 떨어지는 느낌을 음미하듯 안도와 걱정이 뒤섞인 한숨을 내쉬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 속 나. 모두 석양이 지는 오산의 일몰에 몸을 실었다.
나 또한 지그시 앉았다. 모두 끝났다는 안도감에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모두들 많이 지쳐 보여 이내 그 생각을 빠르게 접고 나 또한 마지막 평가의 끝을 음미하기로 결정했다.
파리를 떠나기 정한 순간부터, 한국에 도착한 순간. 처음으로 서울로 올라가 통역 학원을 찾아 강남을 헤매던 여름날. 과연 합격할 수 있을까 스스로 의심하고 다독이고 고독 속 홀로 눈물을 흘리기도 웃기도 하던 날들, 몇 번의 이사를 하며 임관만을 바라보며 버티던 지난 두 달의 시간, 첫 평가시험부터 공군 시험까지 무수히 많은 순간들이 주마등과 같이 눈앞을 지나갔다. 그러다 문뜩 버스 안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에 귀를 기울였다. 어디선가 많이 듣던 익숙한 곡이었고, 후렴에 도달해서야 이 곡의 제목을 알 수 있었다.
calla였다.
노을이 지는 오산의 해 질 녘 풍경을 바라보며 파리를 떠나기 전 날 들었던 노래 칼라가 나오고 있었다. 운명의 장난인지 아니 정말 우연인지 혹은 내가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인지. 버스 엔진 소리에 약간 감춰져 흘러나오는 칼라의 멜로디에 나는 다시금 인생이 영화를 모방한 것이 아닌 영화가 인생을 모방하는 것이구나를 깨달았다.
지난 2달간의 여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9월 2일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이국적이지만 나에게는 고향이라는 서울 땅 그리고 강남역 근처 골목에서 통역장교 학원을 찾아 헤매며 모든 것을 신기해하던 순간. 통역에 자신만만한 나를 겸손을 넘어 약간의 좌절을 선사해 준 첫 통역장교 수업. 서울에 캐리어를 끌고 올라와 몇 번의 이사를 하며 웃고 울었던 나날들. 걱정이 눈앞에 아른거리며 남몰래 눈물을 훔치던 밤. 지원서를 모두 정리하여 발송하던 그날의 벅차오름. 통역장교 첫 평가 해병대 통역장교 평가 날 긴장 속에 한숨만 내쉬던 그날부터 공군 시험까지 모든 날들이 말이다. 다양한 군상을 만나 긴장하기도, 웃기도, 화내기도, 좌절하기도, 설레기도, 반가워하기도, 미워하기도 했던. 육군부터 공군의 설명회를 들으며 나의 조직은 어디가 좋을까 서로 웃고 상의하던 순간. 해병대 장교 합격 소식에 기뻐한 순간. 병무청 때문에 고생고생하며 마음 졸이던 순간까지. 모든 순간들이 눈앞을 지나쳐가며 벅차오름인지 안도감인지, 도저히 출처를 알 수 없는 눈물만이 흐르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노래 가사의 의미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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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
누군가는 당신의 시간이 곧 끝날 거라 말하죠.
하지만 칼라, 당신은 언제나 이겨낼 수 있어요.
칼라,
누군가는 당신의 시간이 곧 시들 거라 말하죠
하지만 칼라,
당신은 언제나 다시 피어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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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의 뜻을 이해하고 나니, 이상하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덜컹거리는 지하철에 앉아 이 노래를 하염없이 들었다. 집에 도착해 소파에 앉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나왔다. 기쁨의 눈물인지, 안도감 속에 비롯되어 흐르는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구태여 그 의미를 묻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혼자 하염없이 울었다.
두근거림과 설렘 속, 한국에서의 첫가을은 그렇게 끝이 나고 있었다.
2025년 11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