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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Ohr Dec 15. 2021

데이비드 흄의 자연주의 방법론과 계시종교

철학자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

흄은 이신론자인가, 무신론자인가?


흄은 이성으로 이성의 높은 콧대를 꺾으려는 프로젝트를 가졌다. 이것이 흄의 경험주의이다. 탁월한 이성적 추론으로 이성의 한계를 드러냈고, 결국은 인과율을 부정하고, 물리법칙을 부정하고, 과학을 부정하는 철저한 회의론으로 귀결했다. 이것은 이성을 주시했던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와는 달리, 이성도 확실하지 않고 '경험과 관찰'을 통해서만 인정할 수 있다고 하며 흄은 더 철저한 회의론을 주장했다.


모든 탐구와 논쟁의 원대한 프로젝트는 바로 이성을 통해 이성을 허무는 것이다.

데이비드 흄 <인간지성에 관한 탐구> 1748년


흄을 무신론자들의 영웅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흄은 데카르트의 신증명을 반박했을 뿐 아니라, '기적에 대하여' "기적은 자연법칙을 위반하는 것"이며 "기적은 입증할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의심하는 나는 확실하며,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진정한 학문의 기반이라고 보았다. 데카르트는 인간은 물적 존재가 아니라 생각하는 존재이며 정신적인 존재라고 보았다. 데카르트는 인간에게는 '본유관념(innate idea)'이 있다고 보았지만, 로크-버클리-흄과 같은 경험주의자는 데카르트의 본유관념을 부인했다. 본유관념이란 신 관념, 옳고 그름의 도덕적 관념, 수학적 관념을 말한다. 데카르트는 이 모든 것이 존재하는 것은 신이 존재하며, 신이 인간을 속이지 않는 전제 위에서 합리주의 철학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흄은 이러한 데카르트의 신개념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데카르트가 주장한 코기토(cogito)인 자아도 부정한다. 흄에 따르면 자아란 '관념의 다발'일 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신의 창조설을 반대한, 흄의 진화사상


흄의 경험주의에 따르면, 신의 실체도 없고, 도덕의 실체도 없고, 인간의 자아도 허구이며, 기적도 증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흄은 당시에 영국을 지배하던 신의 창조설을 반대했다. 그는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자처한 적은 없지만, 스코틀랜드에 위치한 에딘버러 대학과 글래스고우 대학의 교수직에 지원했을 때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교수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일도 하고 문필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흄에 따르면, 도덕은 신으로부터 부여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념(강한 감정)에서 생긴다고 본다. 좋은 기분을 주는 것은 진화되고, 나쁜 기분을 주는 것은 사라지게 된다. 흄은 시장경제가 도덕을 더욱 발전시킨다고 주장했다. 흄은 '사유재산제도'가 사회적 진화에서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사람이 타인의 재산을 탈취하지 않고 물물교환을 했더니 두 사람 다 편해지는 경험을 했다. 그래서 진화적으로 사유재산을 존중하게 된 것이라고 보고 정부는 이러한 정의를 보호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데카르트와 달리, 흄은 경험론자로서 '신'과 같은 본유관념을 부정했기 때문에, 사회의 법과 도덕이 전지전능한 신이 설계한 것이라는 합리주의 사상에 반대했다. 사회의 법과 도덕은 사회의 관습의 산물이라고 흄은 보았다. 이런 면에서 사람들은 흄을 무신론자로 평가해 왔다. 사실 흄의 진화적인 사고는 생물학자 찰스 다윈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흄은 신의 설계자 이론(the Design Argument)를 부정했고, 기적에 대하여 비판했다. 그의 저서 <인간지성에 관한 탐구(An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10장 '기적에 대하여'에서 기적을 비판한다. 그가 기적을 비판하는 맥락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 아니라, 미신과 광신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기적은 자연법칙을 위반한 것이다."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증거보다 기적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증거가 훨씬 더 강하다."


1748년, 데이비드 흄  <인간지성에 관한 탐구(An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10장 '기적에 대하여'


이런 흄의 기적에 대한 비판은, 기적의 불가능성을 증명한 것은 아니다. 기적의 가능성을 입증하는 것이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증거보다 약하다는 말이지, 특정한 일(기적)이 일어날 수 없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흄이 경계한 것은 광신과 미신으로 인한 사회 혼란이었다. 다른 경험주의자들과 같이, 흄도 종교의 불관용의 문제를 지적하며 관용을 주장했다.


"광신은 인간 사회에 가장 잔혹한 혼돈을 초래한다" 데이비드 흄



이신론자,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흄은 종교를 진실이라고 생각할 증거가 없을 뿐이지 별다른 부정적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 종교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주장할 방법도 없다. 다만 데카르트처럼 신에 대한 가설을 흄은 필요로 하지 않았고, 다만 '관찰과 경험'을 학문의 방법으로 사용했다. 한편 당시 유행한 이신론(Deism)자도 아니었다. 이신론자는 '이 세상이 신의 지적 설계의 산물'이라고 주장했지만, 흄은 창조주(Creator)를 시계제작자(Watchmaker)에 비유하는 것을 부적절하다고 보았다. 시계제작자는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시계 제작자이지만, 창조주 신은 우리의 경험 밖에 있다. 신은 우리의 능력으로 알 수 없다고 흄은 보았다. 결국 사상과 가설에 의지해서 신의 존재를 상정한다고 흄은 보았다. 종교에 대하여 그가 죽은 뒤에 출간하도록 당부했던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에서 계시종교, 자연종교, 온건한 회의주의를 각각 데미아(Demea), 클레안테스(Cleanthes), 필로(Philo)라는 인물을 내세워서 대변하고 있다.


흄은 무신론자라기보다는 불가지론자이다. 불가지론은 신의 존재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반면, 무신론은 신은 부정한다. 흄은 데카르트가 공부했던 예수회 학교 라플레슈에서 공부했으며, 프랑스 사람들도 흄을 '영국의 볼테르'라고 부르며 좋아했다.


질문1: '무한히 선하시고, 지혜롭고, 권능이 있고, 완전한 신을 추론할 만한 충분한 증거가 이 세상에 진짜 있는가?' '명백히 신은 존재한다(beyond doubt)'


질문2: 신의 본성에 대하여 어떤 이성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지?'결정할 수 없다(undecided)'


'돌바크의 만찬' 일화


흄은 영국에서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고 욕을 먹었는데, 프랑스 파리에서는 믿는다고 조롱을 당했다. 줄리안 바지니 <데이비드 흄>

흄이 파리에 체류할 때 돌바크 남작의 저택에서 열린 만찬에서 유명한 사건이 발생했다. 저택 주인인 돌바크 남작은 열렬한 무신론자였고, 거기에 참석한 흄을 제외한 총 18명 중에 15명이 무신론자였고, 3명은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고 한다. 흄은 "자신은 무신론자를 믿지 않는다"고 했고, 남작은 "여기 무신론자 15명을 한꺼번에 만나게 해드렸으니 잘됐군요."라며, 18세기가 끝나기 전에 유럽의 기독교가 폐지될 것이라고 했다.


흄은 회의론자였지 스스로 무신론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흄은 무신론은 지나치게 독단적인 입장이라고 보았다. 어떻게 신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가? 흄은 이신론자와 거리를 두었고, 오늘날의 무신론자와도 상당히 다른 입장이다.


현대의 무신론은 '존재하는 것은 자연계뿐이다'라는 입장을 가졌다. 흄은 '자연계가 존재하는 전부'라는 입장이 아니다. 다만 자연계는 존재하는 전부가 아니라 우리가 아는 전부라며, 자연철학이나 자연과학에도 한계가 있음을 분명히 인정했다. 이런 면에서 흄은 진정한 자연주의자이다. 유신론이나 무신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근거가 희박한 독단으로 본 것 같다. 그런 면에서 흄은 형이상학적 불가지론자이다. 불가지론자에게는 신의 존재는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다.  


흄은 무신론자보다도, 신의 속성을 다 아는 것처럼 만용을 부림으로써 신의 신비와 위대함을 훼손하는 것을 더욱 불경하다고 했다. 불경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신을 인간과 유사하게 보는 신인동형론'이었다. 흄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는 '알지 못한다'고 인정하는 불가지론의 입장이다.


훗날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철학 논고>에서 이런 결론을 내렸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라."



흄의 자연주의 방법론과 계시종교


흄은 무신론자가 아니라 형이상학적 불가지론자였다. 불가지론자에게 신의 존재는 여전히 살아 있다. 물론 흄은 데카르트의 이성중심의 합리론이나 기독교의 교리가 '독단'이라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이를 반대하였다. 흄의 경험주의에 따르면, 신의 실체도 없고, 도덕의 실체도 없고, 인간의 자아도 허구이며, 기적도 증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종교적 파문을 피하려했는지, "신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관찰하거나 지각할 수 없는 존재이므로 인간의 이해 범위를 넘어선다"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가 사후에 출간해달라고 요청한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1779)에서 계시종교, 자연종교, 온건한 회의주의를 각각 대표하는 사람인 데미안, 클레안테스, 필로를 등장시켜서 대화를 하는데, 흄의 분신인 회의주의자 필로를 통하여 결론적으로는 믿음의 문제, 신념의 문제라고 말한다. 흄의 철저한 회의주의는 오히려 인간의 이성을 무너뜨리고 믿음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결론이다. (회의주의의 시조는 피론인데, 흄이 이를 연상하여서 회의주의자로 필로라는 비슷한 이름을 사용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사실 흄은 신의 실체, 자아의 실체, 인과법칙 등을 부인하면서 이것은 습관의 문제, 신념의 문제라고 하였다. 흄의 회의주의는 종교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른 종교를 세우고 있다. 그가 무너뜨리고자 했던 것은 이성과 교리의 독단이었고, 종교적 관용의 정신을 통하여 건강한 사회를 추구했던 것이다. 흄은 과학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라고 한다. 그가 자연주의적 방법론을 철학에 도입했기 때문에 당연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흄을 '철학자의 철학자'라고 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회의주의 방법을 철저하게 밀어부친 사람이기 때문이다.


흄은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의 결말에서 회의주의자 필로를 통하여 이렇게 말한다.


철학적 회의론이야말로 진정한 기독교에 이르는 유일하게 적절한 길이다. 이는 이성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켜서 우리를 계시(revelation)로 향하도록 몰아갈 것이며, 우리는 오직 계시를 통해서만 우리는 신을 바로 예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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