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그송의 지각과 기억 이론과 그 현대적 전개

메를로퐁티와 들뢰즈의 발전을 중심으로

by 오르 Ohr

20세기 철학의 중요한 전환 가운데 하나는 인간 의식을 단순한 정신적 활동으로 이해하던 전통적 관점에서 벗어나 인간 존재를 시간, 신체, 기억의 흐름 속에서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전환의 중요한 출발점에 있는 철학자가 바로 베르그송(Henri Bergson)이다. 그의 저서 <물질과 기억(Matter and Memory)>은 인간의 지각과 기억을 새로운 방식으로 설명하면서 근대 철학의 정신 중심적 세계관을 넘어서는 철학적 지평을 제시하였다. 베르그송은 인간의 지각이 순수한 정신 활동이 아니라 신체의 행동 가능성과 결합된 과정임을 주장하며, 기억을 단순한 저장 장치가 아니라 현재의 의미를 형성하는 시간적 깊이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사유는 이후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신체 현상학과 들뢰즈(Gilles Deleuze)의 생성 존재론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 글은 먼저 베르그송의 지각과 기억 이론을 정리하고, 그 사유가 메를로퐁티와 들뢰즈의 철학에서 어떻게 계승되고 변형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베르그송의 지각 이론


베르그송은 근대 철학에서 지배적이었던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비판하였다. 데카르트는 인간을 ‘생각하는 정신’으로 정의하며, 세계 인식을 정신의 사유 작용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인간의 지각이 순수한 정신 활동이 아니라 신체의 행동과 밀접하게 연결된 과정이라고 보았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세계는 수많은 이미지(image)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간의 신체 또한 이러한 이미지 가운데 하나이다. 인간의 지각은 세계의 모든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행동을 위해 필요한 이미지를 선택하는 과정이다. 즉 지각은 세계의 객관적 재현이 아니라 행동을 준비하는 선택적 과정이다.


이러한 이해는 인간 의식을 단순히 사유하는 정신으로 파악했던 전통적 철학을 넘어, 인간 존재를 세계 속에서 행동하는 신체적 존재로 이해하도록 만든다.



기억의 구조: 습관적 기억과 순수 기억


베르그송은 인간의 기억을 두 가지 형태로 구분하였다.

첫째는 습관적 기억(habit memory)이다. 이것은 반복된 행동을 통해 신체에 각인된 기억이다. 예를 들어 자전거를 타거나 피아노를 연주하는 능력은 의식적 사고 없이도 수행될 수 있는데, 이러한 기억은 신체 속에 자동 반응의 형태로 저장된다.


둘째는 순수 기억(pure memory)이다. 이것은 과거의 경험이 의식 속에 잠재적으로 보존된 형태이다. 순수 기억은 행동 속에 직접 나타나지 않지만 특정한 계기나 감정적 자극을 통해 현재 속으로 떠오를 수 있다. 오래된 음악을 듣는 순간 과거의 장면과 감정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경험은 이러한 순수 기억의 작용을 보여준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인간의 지각은 단순히 현재의 자극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지각과 과거의 기억이 결합되는 과정이다. 인간은 현재의 상황을 과거의 경험을 통해 해석하며,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의식이 형성된다.



지속(durée)과 시간의 철학


베르그송 철학의 핵심 개념은 지속(durée)이다. 그는 근대 철학이 시간을 공간처럼 나누어 이해했다고 비판하였다. 시계와 달력은 시간을 균일한 단위로 분할하지만 실제 인간의 시간 경험은 이러한 방식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지속은 과거와 현재가 서로 분리되지 않고 서로 스며드는 시간의 흐름이다. 인간의 의식은 순간적으로 고립된 점이 아니라 과거 전체를 포함한 채 현재로 흐르는 과정이다.


따라서 인간 존재는 단순히 현재의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과거 전체를 포함한 채 현재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메를로퐁티의 신체 현상학


베르그송의 이러한 사유는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철학에서 중요한 방식으로 계승되었다.

메를로퐁티는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과 지각 이론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현상학적 관점에서 발전시켰다. 그의 대표 저서 <지각의 현상학(Phenomenology of Perception)>에서 그는 지각을 단순한 의식의 작용이 아니라 신체가 세계 속에서 의미를 형성하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베르그송이 의식의 시간적 흐름을 강조했다면 메를로퐁티는 몸의 공간적 존재 방식을 강조하였다. 인간은 세계를 관찰하는 외부의 정신이 아니라 이미 세계 속에 참여하고 있는 신체적 존재이다.


이러한 관점은 주체와 객체의 이원론을 극복하고 인간 존재를 세계와 얽혀 있는 신체적 존재로 이해하도록 만든다.



들뢰즈의 생성 존재론


베르그송 철학은 또한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철학에서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들뢰즈는 저서 <베르그송주의(Bergsonism)>에서 베르그송 철학을 체계적으로 재해석하였다. 그는 베르그송의 이미지 개념을 존재론적으로 확장하여 세계 자체를 이미지의 운동으로 이해하였다.


들뢰즈에게 세계는 고정된 사물들의 집합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하는 운동의 장이다. 이러한 관점은 그의 영화 철학에서도 나타난다. 들뢰즈는 영화가 베르그송의 철학을 가장 잘 드러내는 예술 형식이라고 보았다. 영화 속에서 이미지들은 정지된 사물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움직이는 운동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사유를 단순한 시간 철학이 아니라 생성과 변화의 존재론으로 확장하였다.


베르그송의 철학은 근대 철학의 정신 중심적 세계관을 넘어 인간 존재를 시간, 기억, 신체의 흐름 속에서 이해하는 새로운 철학적 시각을 제시하였다. 그의 지각 이론은 인간 인식을 단순한 정신 활동이 아니라 신체의 행동 가능성과 결합된 과정으로 설명하였으며, 기억을 과거의 단순한 저장이 아니라 현재의 의미를 형성하는 시간적 깊이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사유는 메를로퐁티의 신체 현상학과 들뢰즈의 생성 존재론으로 이어지면서 20세기 철학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하였다. 메를로퐁티는 베르그송의 사유를 신체 중심의 현상학으로 발전시켰고, 들뢰즈는 그것을 존재 자체의 운동과 생성의 철학으로 확장하였다.


따라서 베르그송의 철학은 단순히 하나의 철학 체계에 머무르지 않고 현대 철학에서 신체, 시간, 생성의 사유를 열어 준 결정적 계기라고 평가할 수 있다.


참고 문헌

Bergson, Henri. Matter and Memory.
Merleau-Ponty, Maurice. Phenomenology of Perception.
Deleuze, Gilles. Bergsonism.
Deleuze, Gilles. Cinema 1: The Movement Image.
Deleuze, Gilles. Cinema 2: The Time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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