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밑의 '광대나물'을 보다

광대나물과 자운영

by 허은숙

"어머나! 꽃이 피었다" 담벼락 아래 분홍빛 전령, 광대나물이 피었습니다.

지난여름에 남쪽으로 쪽문을 내었습니다. 쪽문의 담벼락밑에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습니다. 주차장으로 나가는 문이기에 자주 드나듭니다. 겨울의 끝자락, 차가운 공기가 여전한 담벼락밑에서 뜻밖의 생명을 마주했습니다. 마른풀들 사이로 고개를 내민 '광대나물'입니다. 계절은 아직 겨울의 옷을 벗지 못했는데, 담벼락 아래 햇살이 머무는 곳에는 벌써 봄의 기척이 소란스럽습니다. 거칠고 마른 흙을 뚫고 올라온 광대나물의 작은 꽃송이들 때문입니다. 층층이 쌓인 잎사귀 위에 뾰족하게 솟은 분홍빛 꽃망울을 보고 있자면, 마치 광대가 화려한 옷을 입고 이른 봄의 축제를 서두르는 듯한 모습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집니다.


겨울은 대지의 색을 지우는 계절입니다. 무채색의 풍경에 익숙해진 눈에 광대나물의 진한 분홍색은 낯설면서도 반갑습니다. 그 작은 꽃잎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음 한구석에 묻어두었던 오랜 기억 하나가 슬며시 고개를 듭니다. 바로 논둑 가득 물결치던 '자운영'의 기억입니다. 광대나물의 생김새는 자운영과 참 많이도 닮았습니다. 둘 다 연한 분홍과 보라의 경계에 서 있는 색을 가졌고, 나비의 날개를 닮은 꽃잎을 지녔지요. 광대나물은 척박한 담벼락 아래에서 홀로 당당하게 피어나는 강인함이 보입니다. 자운영은 끝없이 펼쳐진 논밭을 보랏빛 자수로 수놓던 아름다움이 있었습니다.


그 시절, 모내기 전의 논은 온통 자운영의 차지였습니다. 보랏빛 꽃물결 속을 뛰놀던 기억이 납니다. 꽃을 엮어 반지를 만들고 목걸이를 걸어주던 친구 웃음소리가 광대나물의 잎사귀 사이로 들려오는 것만 같습니다. 소주병이든가, 박카스병이든가, 빈병에 물을 가득 담아 꽂아 놓고 바라보던 기억이 납니다.


추억 속의 자운영 밭은, 이십 년 전 경남거제시에 둥지를 튼 딸가족을 생각하게 합니다. 거제시에 발령을 받은 딸은, 거제에 몇 년간 살았지요. 딸가족이 보고 싶을 때, 첫 외손녀가 태어났을 때, 우리는 휴일이면 먼 길 거제를 향해 달렸습니다. 논밭이 자운영꽃으로 덮여있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납니다. 차창밖으로 딸가족을 만나러 가는 기쁨과 연보라ㆍ분홍색으로 물든 논밭 풍경들과 겹쳐지는 그리움이 있습니다. 광대나물을 보며 떠올린 자운영 꽃밭은 이제는 쉽게 보기 힘든 옛날 풍경입니다. 자운영이 대지를 비옥하게 만들고 스스로 거름이 되어 사라지듯, 그 시절의 순수했던 기억들. 지금 나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양분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다시,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봄을 기다립니다.

담벼락 아래 홀로 핀 광대나물은 말합니다. 비록 지금은 차가운 바람이 불고 주변이 황량할지라도, 생명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이죠. 화려했던 자운영 꽃밭의 추억은 가슴속에 소중히 갈무리하고, 이제는 내 눈앞에 찾아온 이 작은 '광대'의 인사를 기쁘게 받아들이려 합니다. 추억은 아름답지만, 그 추억을 다시 꽃 피우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담벼락 아래를 지키는 작은 생명력이니까요.

무수히 피어있는 꽃으로 다화(茶花)를 만듭니다. 아무리 추워도 멈추지 말라는 바람과 함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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