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보다 입상이 어렵다는 오렌문학상. 그 권위 있는 상을 수상하신 작가님들의 창작글이 엮인 <글루미 릴레이>의 바통을 너무 뒤늦게 그러쥐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혼자 먹으려고 선반 안에 몰래 감춰둔 쫀드기를 걸고 솔직히 말하자면 출간했을 당시부터 꼭 읽고 싶었던 책이었습니다. 늘 조잡하기만 한 제 글에 참으로 일관되이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주신 진아 작가님, 고운로 그 아이 작가님, 뽀득여사(이수정) 작가님과 브런치마을에서 인플루언서 격인 작가님들이 위대한 협업을 하셨다길래 과연 어떤 책이 나왔을까 너무 궁금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불현듯 마음이 절 꾸짖더군요. 전 아직 글에 대한 내공과 수양이 부족하다고요. 그래서 학교 도서관에 <글루미 릴레이>를 희망 도서로 여러 권 신청한 후 비장한 각오와 손을 잡고 홀연히 브런치마을을 떠났습니다. 때마침 기획했던 브런치 연재를 마친 타이밍이기도 해서 더 많은 책을 읽고 싶었고 브런치에서 선보인 글과는 다른 문체의 글도 써보고 싶은 과욕이 생겼습니다. 동무 같았던 브런치와 단절하고 진짜 현실의 동무들과의 오가는 발길도 끊은 채 오로지 책속에 파묻혀 지냈습니다.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떠났던 몇 개월의 고행 기간 동안 사상과 관념은 이리저리 자라나 이젠 헝클어지고 덥수룩해졌습니다. 차차 깔끔하게 다듬어나가며 브런치 연재도 시작해야겠습니다.(기획안은 다 짜놓은 상태입니다. 오랜만에 글을 쓰려니 두려울 뿐입니다.)
미루고 미루었던 <글루미 릴레이>를 이제야 읽고 미숙하게나마 간단한 코멘트를 남깁니다. 서평 속 문장의 길이는 글에 대한 개인적인 선호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저 그때그때 흘러나오는 마음의 소리를 간신히 붙잡아서 글자로 옮겨놓은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인지 별도의 퇴고 과정을 거치지 않아 문장과 의미가 상당히 조악스럽습니다.
혹 제가 언급한 작가님께서 니 깟게 뭔데 감히 내 글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평가질이야, 하는 반응을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요.) 그저 존경하는 부모님의 삶을 관찰한 후 삐뚤빼뚤한 글씨로 끄적인 초등학생의 일기쯤으로 치부해 주십시오.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작가님들의 글에 대한 짤막한 서평과 가장 인상 깊었던 글귀를 남기는 방식으로 얼개를 짰습니다.
-상실의 기억이 스민 마당을 벗어나 작가님이 창조한,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여의주를 품고 높이 높이 승천하시길. 흐릿해지는 기억과는 대조적으로, 오랜 시간 벼리고 정제되어 선명해져 가는 정체성과 꼭 조우하시길.
단 하나의 나의 여의주를 만들 것이다. 그것을 품고 날아오르리라. 즐겁게, 순수하게, 그리고 매정하게.
-'오늘만 특가'라는 사소한 장면에서 '순간'의 의미를 되새기는 작가님의 원숙한 통찰력. 그래 삶이 별 거 있어? 매일매일 찾아오는 오늘을 특별한 가격으로 누리는 것이지. 암 그렇고 말고.
오늘 가면 내일 살 수 없어요.
-'가족'이라는 말의 의미가 완벽해지기 위해선 반드시 '사랑하는'이라는 관형어의 수식이 필요하다. 견디고 버티며 글을 쓰는 작가님의 이야기는 제 마음에 희망의 불씨를 지폈습니다. 방금 전 아들들한테 화를 냈는데 가서 뽀뽀라도 해줘야겠습니다.
이제는 그 흉터를 들여다보며 아파하지 않는다. 나는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가족과 떨어져 홀로 외할머니댁에 맡겨진 소녀에겐 가혹하리만큼 슬픈 동화. 세진이란 인물의 등장부터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가별이 되어선 안된다고, 넌 아직 별이 되기엔 이르다고. 읽어가는 내내 황순원의 <소나기>가 떠올랐다. 폭우와 죽음... 남겨진 자의 상처... 별이 된 세진이가 이 별, 저 별과 어깨동무하며 즐거운 소꿉놀이로 밤하늘을 밝히 수놓길.
깜깜한 하늘에 호박처럼 샛노란 작은 별 하나가 반짝인다.
-글의 서두를 장식한 <데미안> 속 인용구를 보자마자, 무릎을 탁 쳤다.(나는 새해의 포문을 늘 데미안으로 연다) '이거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는 걸?' 하는 생각에 한 자 한 자 정성 들여 활자를 새겼다. 작가님의 글 속엔 내가 했던 고민과, 상황, 감정들이 비슷하게 녹아 있었다. 뒤늦게 꿈의 독립을 꿈꾸는 아재가 아이러니하게도 인생을 찐으로 살고자 하는 청춘에게 위로를 받았다.
그렇게 꿈의 독립을 선언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곳에 더 이상 엄마, 아빠, 자식은 없었다. 세 명의 어른이 서로의 어깨를 토닥이며 나란히 서 있었다.
-간장 게장에서 존재의 공허함을 이끌어낸 작가의 깊은 사유에 선득한 공감이 일렁이면서 물질자본만 추구하며 형편없이 살았던 나의 과거가 겸연쩍게 고개를 숙였다. 보이는 외형이 아닌 속이 꽉 찬 삶. 그건 오로지 타인의 기대나 관습의 잣대가 아닌 나의 결연한 선택과 확고한 기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어쩌면 고치 안에 웅크리고 있는 익숙함이 실상은 안전한 게 아니라 제일 위험한 상태가 아닐까.
모든 것을 하나씩 벗겨내면 결국 넌 말라버린 게장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흉터는 그것을 떠올릴수록, 대면할수록 생채기가 났던 감각이 스멀스멀 되살아나 불쾌해지기 마련이다.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내밀한 상처. 그 상처는 비슷한 상처를 품고 있는 존재와 만나 서로 보듬을 때 비로소 옅어지는 것이다. 세대를 초월한 포옹이 삶의 근력을 키우는 감동적인 이야기. 착하디 착한 준현이와 상처를 극복한 은영의 싱그러운 로맨스를 기대해 본다.
상처를 딛고 살아낸다는 것이 신의 형벌이 아닌, 또 다른 기회를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가능성의 시간이라 알려 주는 옥자 할머니. 그녀는 그렇게 살아냈다.
-동화는 더 이상 어린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른들을 위한 철학서일지도 모른다. 행복에 대한 왜곡된 기준점을 무분별하게 추종하며 살아가는 어른들에게 어쩌면 아이들의 순수한 서사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앞으로 동화책을 읽을 기회가 생긴다면 난 그 이야기가 숨겨 놓은 인생의 진리를 찾기 위해 골몰할 것이다.
어쩌면 행복이란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사랑하는 것일지도 몰라.
-일단 삼행시의 단계적 확장이라는 독특한 기획을 마련하신 작가님의 센스에 박수. 속도와 성취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기쁨의 사소한 순간을 붙잡자는 현시대적 잠언과 가장이라는 책임감 속에 꿈 많던 지난날을 반추하며 지금의 책무를 견디고 버티는 가장의 내면이 나에게도 고스란히 와닿았다. 이상과 현실의 경계에 서 있는 가장의 속마음은 바로 이러한 것이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작가님의 먹먹한 감정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순간이든 그 순간만의 풍경이 있는 법이고, 놓친 풍경만큼이나 켜켜이 쌓인 풍경도 있는 법이니까.
-가상의 장례식이란 상황을 설정하여 '살아있음'의 의미를 유쾌하게, 때론 묵직하게 전하는 작가님의 엄청난 내공이 느껴졌다. 글을 읽어나가며 나의 죽음을 상상해 봤다. 나는 남겨진 자에게 어떤 의미로 남게 될까, 일말의 회한도 남기지 않고 미련 없이 이 생을 떠날 수 있을까. 작가님의 사유처럼 이 세상에 발붙이고 호흡하는 동안 더욱 사랑하고 슬퍼하며 산 자로서의 몫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내 의식의 한편에 볕뉘로 스며들었다. 언젠가는 다가오고야 말 부모님의 장례를 나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마주하게 될까.
사랑은 살아 있을 때 할 수 있고, 회한이 섞이지 않은 진정한 슬픔 역시 살아 있는 순간에만 그 가치가 유효하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던 겁니다.
-에세이스트인 줄 알았던 진아 작가님의 소설을 마주할 줄이야. 짧은 분량이었지만 진아 작가님 특유의 감성적이고 철학적인 사유가 담겨 있어 외려 적은 분량이 무척 아쉬웠다.(정말입니다... 짧아서 허무했어요..) 작품 속 문장처럼 가장 연약했던 날을 흘려보내고 가장 아팠던 순간을 날려 보내며 나만의 엔딩의 시작을 다짐했다. 진아 작가님의 글이 유독 와닿는 건 어쩌면 같은 INFJ여서일까...(이렇게 또 작가님에게 묻어갑니다..)
오히려 잔인한 끝이 살아갈 힘을 주더라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글이었다. 내가 평상시 그려 온 고운로 그 아이 작가님의 차분한 이미지와는 너무 상반된 작가님의 유머의 역사를 마주한 기분이란... 무엇보다 작가님의 웃음 철학은 시중에 출간된 자기 계발적 에세이들에서는 별로 접하지 못했던 내용들이라 꽤나 신선하고 유의미했다. 암요, 웃음이 최고의 보약이지요. 마치 작가님이 내 앞에서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인 후 너도 제발 좀 웃고 살라면서 어깨를 토닥이는 듯했다.
벼랑 끝에 서 있더라도 웃을 수 있다면 상황은 더 빨리 반전될 수 있지 않을까?
-제목만 보고 지레짐작으로 L이 헤어진 연인인 줄 알았다. 내가 L씨라서 그런가... 옷 사이즈를 인격화하여 따지듯 그린 일상의 소소한 장면마다 절로 웃음이 터졌다. 내가 추구하는 글의 방향과 비슷한 결을 느꼈달까. 나는 가독성이 좋고 재미가 녹아 있는 글을 접할 때마다 왠지 뜻하지 않은 사은품을 받은 듯 기분이 좋아진다. 해조음 작가님의 글이 딱 그랬다. 내가 닮고 싶은 결이다. 아참, 새로 만든 친구인 XL과 진한 우정을 이어나가길... 집착을 버리고 가벼워진 작가님의 인생을 응원합니다.
L, 좀 전에 화내서 미안. 넌 그냥 가던 길 가. 잡지 않을게
-현대인들은 변검에 익숙하다. 상황에 따라 순간적으로 솨솨솩 가면이나 얼굴색을 그리 힘들이지 않고 바꾼다. 그러니 감정이 얼굴에 온전히 드러나는 나로선 거짓된 세계가 마련한 오디션에서 번번이 낙방하며 살아왔을 수 밖에... 결혼을 꿈꾸는 청춘들이여. 부디 상대방의 얼굴을 두르고 있는 게 민낯 같은 진심인지, 교묘한 속임수의 가면인지 잘 분별했으면 한다.
사랑은 때로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아이들이 자는 틈에 거행한 남편분과의 야반도주. 나도 따라 하고 싶었다... 아이들이 생기자마자 꺼져버린 나의 청춘의 시간들. 하지만 아이들이 생겼기 때문에 함께 쌓을 수 있는 환상적인 추억과 기록. 이제 작가님의 자녀들도 성인이니 엄마 모드에서 벗어나 짜릿한 일탈을 맘껏 즐기시길.
서른다섯 살 '그 밤의 그녀'는 지금 어디 있을까. 영영 사라진 걸까? 언젠가 어디선가 그 끼가 다시 튀어나올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어머니의 지난 삶과 작가님의 과거가 평행한 선로를 따라 내달립니다. 아직 종착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종착역의 이름이 행복일지, 불행일지도 감이 안 잡힙니다. 다만 작가님은 지금 겨우 방바닥에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찬란한 영광 속에 머물러 있던 언어 감각을 다시 끄집어내어 후우, 하고 먼지를 털어내고 깨끗이 닦아낼 시간입니다.
언젠가 써야지, 다시 글을 써야지 하는 나의 방바닥 생각들은 엄마의 방바닥 노래와 다르지 않았다.
-뽀득여사 작가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떠오르는 수식어가 있다. 바로 '모두를 위한 심리학 입문서.' 이 글도 어김없이 뽀득작가님 특유의 문체가 도드라져 브런치에서 봐왔던 다른 글들과 큰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바로 뽀득작가님만의 아이덴티티가 아닐까 싶다. 동화와 에세이의 경계 지점에서 뽀득작가님은 친절하게 인간의 감정을 편안한 길로 안내한다. 사람의 다채로운 감정을 능수능란한 솜씨로 예쁘장하게 빚어내는 뽀득작가님의 노련미에 다시 한번 동감의 스티커를 붙이고 싶다. 아니 진작에 붙였다. 누구 스티커 좀 남은 사람??
멜랑콜리는 프리즘이군요. 빛에 따라 다양하게 퍼지는. 그래서 더욱 빠져들게 되나 봐요.
-세상을 버리고 신을 선택한 돌아온 탕자, 그리고 다시 세상으로 나온 둘째. 돌아온 탕자 이야기는 신의 절대적 사랑의 의미를 일깨운다. 나 역시 청춘의 꿈에게 24년간 사기를 쳐온 전과범이었다. 다시 돌아와 꿈과의 약속을 겨우 지키긴 했지만 또 언제 다시 약속을 어기고 꽁무니를 내뺄지 모를 노릇이다. 펄펄 끓어오르던 용광로 같던 불길은 기세가 많이 꺾였지만 천천히 약불로 데펴 가며 꿈이 완전히 끓어오를 그 언젠가의 순간만을 기다리는 요즘이다.
... 하지만 루즈했다. 불타오를 청춘의 시간이 이렇게 루즈할 수가 없었다. 뭘 해도 흥이 나지 않는... 폭삭 다 늙어버린 거 같은 루즈함...
18명의 작가님이 써내려간 페이지 안에 갇혀 몰입할 수 있었던 시간이 정말로 즐거웠습니다. 이쯤에서 어쭙잖은 서평을 마칩니다. 해마다 실천하는 일년에 책 100권 읽기 프로젝트. 제 독서 리스트의 한켠에 <글루미 선데이>, 아니 <글루미 릴레이>가 자리함에 왠지 마음이 넉넉해집니다. 작가님들의 깊은 통찰력과 세련된 필력을 한 수 배우고 갑니다.
이상으로 다시 브런치마을에 돌아온 탕자, 이현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