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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필 Mar 16. 2024

서울에 가면 바람이 든다


  영화 타짜에서 김혜수가 앙칼지게 외쳤듯 나도 이대 나온 여자다. 거기서 모든 사건이 시작되었을까?          

 나는 강릉에서 태어났다. 사람들은 강릉이 시골인 줄 아는데, 맞다. 아닌 줄 알았는데 이제는 맞다고 생각한다. 강릉이라고 다 어촌인 것은 아니지만 내가 태어난 곳은 어촌이다. 마당에서 도로라고 하기에도 겸연쩍은 2차선 길만 건너면 바로 백사장이 펼쳐졌으니까. 어릴 때는 두 가지 꿈을 주로 꾸었다. 샴푸처럼 하얀 거품이 들끓는 파도가 우리 집을 덮치는 꿈과 온몸이 새빨간 북한 공산당이 기관총을 난사하며 쳐들어 오는 꿈. 엎어지면 코 닿을 위치에 있는 바다와 이승복 이야기를 마르고 닳도록 들은 반공교육 덕분이었다.          

 

 우리 집은 가난했었나 보다. 아닌 줄 알았는데 이제는 맞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때 그곳에서는 가난이 평범이었기 때문에 의식을 못했을 뿐이다. 엄마는 모든 음식을 집에서 만들어 주셨다. 달콤한 흑설탕이 줄줄 흐르는 호떡, 뽀얗게 분이 부서지는 찐 감자, 누가 많이 알을 붙여서 떼는지 경쟁하던 삶은 옥수수 등의 흔한 간식부터 진짜 돌 맷돌로 콩을 갈아 만든 콩국수, 감자를 강판에 갈아 노릇노릇하게 구워 낸 감자전, 심지어 팔이 아플 정도로 계란 흰자를 저어서 아주 가끔은 카스텔라나 롤케이크도 만들어 주셨다. 당연히 엄마가 만들 줄 모르거나 만들어 주지 않는 음식은 먹어 보지 못했다. 외식이라는 단어를 그때 우리 가족들이 알고 있었을까.     


 내가 졸업한 국민학교는 한 학년이 두 반밖에 없는 아주 작은 학교였다. 그때는 안목, 초당, 강문에 살면서 왕복 두 시간 이상 걸어서 등교하는 학생들도 많았고 그러다 보니 걸핏하면 학교에 나오지 않는 친구들이 꽤 있었던 것 같다. 방학 때면 솔방울 주워 오기 숙제가 있었고 전교생이 숙제로 낸 솔방울은 겨울 내내 난로의 시뻘건 뱃속을 든든하게 채워 주는 먹잇감이 되었다. 논두렁에 가서 흐느적흐느적 징그럽기가 짝이 없는 개구리알을 떠다가 교실 어항에 담아 두고 올챙이의 뒷다리가 먼저 나오는지 앞다리가 먼저 나오는지 열심히 관찰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시골 국민학교에도 한 학년에 한 명쯤은 큰 학교 아이들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눈에 띄게 똑똑한 학생이 있기 마련이어서 서울대 합격이나 사법고시 합격 플래카드가 종종 초라한 동네 어귀에 화려하게 걸리곤 했다. 그런 시골 똑똑이들에게 부모님과 동네 어른들이 꼭 하시는 말씀이 두 가지 있었으니 첫째는 '공부 잘해 봐야 하나도 소용없다'였고 둘째는 '서울 가면 바람 든다'였다.        

  

 '공부 잘해 봐야 하나도 소용없다'라는 말은 개천에서 용이 많이 났다고 알려진 수십 년 전에도 금수저와 흙수저의 경계가 명확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시골에서 함께 자란 많은 친구들이 지방대에 진학하거나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런 친구들은 차곡차곡 돈을 모으고 혼수를 장만하여 이 사회가 적절하다고 인정하는 시점에 시집 장가가서 자식을 낳고 시댁, 처가와 지지고 볶으며 어느 순간 아파트도 척척 마련하며 살기 마련이었다. 대학 간 자식이 대학을 졸업할 무렵 고졸의 자식은 차를 사고 대학 간 자식이 대학원 졸업할 무렵 고졸의 자식은 집을 샀다.           


 가끔 있는 시골의 똑똑이들은 서울의 대학에 진학을 하면서 등록금과 자취방을 마련하느라 일단 집안을 한 번 거덜 낸다. 개천 바닥에서 살고 있던 시골 부모님들은 당신들의 자식이 용이 되는 줄 알고 소 팔고 논 팔며, 팔 게 아무것도 없으면 빚을 내며 허리가 휘도록 뒷바라지를 한다.  그런데 정말 큰 비극은 시골 부모가 온 힘을 다해 보내 주는 어마어마한 돈이 자식들 입장에서는 서울에서 살아가기에 늘 터무니없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앞집 옆집 뒷집의 누구누구는 고등학교만 졸업하고도 잘만 사는데 하는 푸념이 시골 부모님 입에서 나오면, 내 친구 누구누구는 아르바이트할 필요도 없고 부모님이 유학도 보내 주는데 하는 푸념이 서울 간 자식 입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해도 '비빌 언덕'이 없는 시골 출신들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기본이라고 학교에서 배운 의식주, 특히 '주'를 서울에서 마련하기 위해 일생을 바쳐야 한다. 그러다가 결혼을 하고 아이라도 낳으면 팍팍한 살림살이에 시골에 계신 부모님의 은혜를 갚는 일은 영원히 뒷전으로 밀리기 마련이다. 그렇게 '공부 잘해 봐야 하나도 소용없다'는 말의 반증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고 그 말을 뒷받침하는 증거만 하나씩 하나씩 추가되기 때문에 그 말은 화석처럼 하나의 정설로 점점 굳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시골 어른들의 말처럼 공부 잘해 봤자 하나도 소용없었던 나는 이십 대 후반에 낙오자가 되어 차마 고향으로는 돌아가지 못하고 강원도의 한 도시로 흘러갔다. 학원 강의를 시작했으며 평생 마실 술을 대학교 때 다 마신 탓에 근면성실하며 악착같이 성공을 꿈꾸는 학원 원장으로 환골탈태하여 웬만한 사람의 연봉을 매달 벌게 되었다. 서울에서 보고 동경하던 삶에 다가갈 수 있다는 야망을 되찾게 되었으며 그 야망에 심취한 나머지 하루 한 끼만 먹으며 365일 일을 했다.  

    

 생명줄이었던 하루 한 끼는 학원 근처에 있었던 오복식당이라는 작은 백반집이 전담했다. 다소 뚱한 아주머니와 몹시 뚱한 아저씨 부부가 운영하던 작은 식당이었다.       

 "원장님, 김치찌개도 한 번 잡숴 보세요. 맨날 된장찌개하고 돌솥비빔밥만 드시지 말고."     

아주머니와 나는 몇 년째 얼굴을 보면서도 그리 많은 말을 나누는 사이가 아니었다. 아주머니는 식당 주인답지 않게 무뚝뚝했고 나는 말하지 않는 순간이 소중한 말을 많이 해야 하는 학원 원장이었기 때문이다. 아주머니는 옥수수나 떡 같은 주전부리가 있을 때는 테이블 귀퉁이에 슬쩍 놓아주시는 걸로, 가끔은 가족들이 먹으려고 한 반찬을 특별히 내어 주시는 걸로 애정을 표현하셨다. 나 역시 꼬박꼬박 현금으로 계산하고 종종 단체 손님을 몰고 갔을 뿐 아니라 새 학원 선생님이 오시면 밥을 사 주며 이 동네에서는 이 집이 제일 낫다는 말로 단골을 확보해 드림으로써 애정을 갚았다.      

               

 내가 밥을 먹는 시간은 오후 다섯 시가 가까워서였다. 그 시간의 식당에는 열 번 중 아홉 번은 손님이 없었으니 요즘 말로 하면 브레이크 타임이었다. 오복식당 아주머니도 가끔은 온돌방 테이블 옆에 누워 계시다가 내가 가면 안 자고 있었던 것처럼 벌떡 일어나 된장찌개를 끓여 주셨다. 죄송한 마음이 들었지만 학원에서 저녁부터 밤까지 에너지를 뽑아내려면 딱 한 끼 먹는 밥을 최대한 수업에 임박해서 먹어야 했다. 아주머니가 물컵을 놓고 주방으로 들어가시기 전 “돌솥비빔밥 주세요.”라고 내가 말하지 않는 한 당연히 나의 메뉴는 된장찌개, 이심전심의 불문율이었다.           


 오복식당 아주머니의 된장찌개는 강릉 엄마가 끓여 주던 된장찌개와 흡사했다. 두부, 감자, 호박을 많이 넣었고 농도가 좀 걸쭉해서 숟가락으로 호로록 떠먹기보다는 따끈한 밥에 한 숟갈 얹어서 쓱쓱 비빈 다음 떠먹어야 짜지 않은 그런 된장찌개. 기네스북에 된장찌개 연속으로 끓이기 종목이 있다면 분명히 세계기록보유자가 되었을 정도로 엄마는 매일 저녁 된장찌개만 끓여주셨다. 동그란 밥상 위에서 일곱 개의 숟가락이 연신 뚝배기에서 된장찌개 국물을 퍼 날랐는데 그중 네 개의 작은 숟가락은 국물만 열심히 떠 갔기 때문에 언제나 뚝배기에는 건더기만 남곤 했다. 그 남은 건더기에 물을 조금 더 부어 끓이면 누군가의 아침 국물이 되었다.    

 

 김치찌개? 식당에서 밥을 사 먹는 나이가 되었을 때, 메뉴에 된장찌개가 있는데 굳이 김치찌개를 시킬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메뉴에 된장찌개가 없는 식당은 없었으니까 외골수로 된장찌개만 먹게 된 것일 뿐 김치찌개를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릴 적 외식이라는 단어가 그러했듯 어른이 된 내게 김치찌개는 아예 존재감이 없는 단어였다.          

 아무도 모르게 된장찌개 끓이기 종목에서 세계 신기록을 나날이 경신했던 엄마에게 최근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 요즘도 맨날 된장찌개 끓여 먹어?"

 "야야, 이제 된장찌개라면 지긋지긋해. 요새는 거의 안 먹어. 돼지고기 좀 넣고 김치찌개 끓여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데!"

 "그런데 옛날에는 왜 맨날 된장찌개만 끓여 줬어? 김치찌개는 왜 한 번도 안 끓여 줬어?"

 "돈이 없으니까 그랬지. 된장찌개는 돈이 안 들잖아. 감자, 호박, 고추, 파 같은 거 밭에 가면 다 있고 된장 고추장도 해마다 담갔으니까. 두부만 사면 됐는데 저녁때 시장 가면 떨이로 좀 뭉개진 거 싸게 팔았거든. 어차피 뱃속으로 들어가는 건데 좀 뭉개지면 어때. 그런데 김치를 담그려면 양념만 해도 돈이 얼마나 드냐. 그걸 아까워서 어떻게 찌개로 끓여 먹어? 또 김치찌개에는 돼지고기도 한 점 썰어 넣어야 하는데, 너희 네 명 키울 때는 일주일에 오징어 한 손 사다가 데쳐 먹을 돈도 없었어."       

         

 그러고 보니 학교 다닐 때 사복 마지막 세대였던 나는 계절마다 늘 바지 하나로 살았던 게 기억났다. 어쩌다 음식 국물이라도 흘리면 저녁때 급하게 바지를 빨아 겨울에는 온돌방에 펴서 말렸고 여름에는 선풍기 위에 씌워 놓고 말려서 다음 날 학교에 입고 갔는데 덜 말라 축축한 것을 입고 간 적도 있었다. 또 아빠는 나보다 일곱 살 어린 막내가 다행히 공부를 못해서 서울로 대학을 못 갈 것이 확실해지자 비로소 자가용을 사셨다.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한참 늦은 것이었고 그전까지 빼빼로처럼 말랐던 아빠는 한겨울에도 눈사람 같은 솜옷을 위아래로 장착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셨다.              


  또 내 기억 속에서 온 가족이 처음으로 외식을 한 건 나의 고등학교 졸업식 날이었다. 엄마, 아빠, 나, 남동생 이렇게 넷이서 고기 뷔페에 갔는데 요즘 말로 하면 무한리필 집이었다. 그래도 소고기였다. 비싼 소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다니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나보다 두 살 많은 오빠 졸업식 때는 외식을 한 기억이 없다. 오빠는 지방의 전문대를 갔고 나는 서울의 이화여대를 갔기 때문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집안 걱정을 심하게 하는 기특한 장남이 등록금이 공짜인 대학에 진학하여 덜 쪼들리게 되어서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강릉을 떠날 때까지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최근에 엄마가 멸치볶음이나 콩자반, 동그랑땡, 더덕무침처럼 내가 강릉 살 때는 생전 안 해 줬던 반찬들을 보내 주실 때에도 엄마가 입맛이 변했구나, 옛날에 도시락 쌀 때 감자볶음과 김치만 싸 주지 말고 이런 것 좀 해 주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반찬의 신메뉴를 탄생시키고 된장찌개와의 이별을 고하게 한 것은 입맛의 변화가 아니라 이제야 생긴 경제적 여유였던 것이다.       

   

 물론 부잣집 친구들도 있긴 했다. 전교생이 두 반인 국민학교에서 내 기억으로 부잣집 딸은 세 명이었다. 한 명은 생선 비린내가 가득했던 곳에서 지금은 생뚱맞게 커피 거리로 유명해진 안목에 여관 건물을 갖고 있던 집의 딸, 한 명은 역시 안목에서 어선을 여러 척 가진 선주 집의 딸, 마지막으로는 허난설헌 생가와 순두부로 유명해진 초당에 살면서 초등학교 시절 우리 반에서 유일하게 자가용이 있던, 나중에 알았는데 아빠가 도의원을 지냈던 집의 딸.            


 내가 부러워했다고 기억하는 부잣집의 모습은 내가 놀러 갔을 때 안목에 여관 건물을 가진 친구의 아빠가 직접 사과를 깎아 주셨던 것이다. 그것도 부자라서 부러워했다기보다는 뭐랄까, 우리 아빠는 부엌에도 절대 안 들어가시고 우리에게 살갑게 대한 적이 한 번도 없으셨으며 우리 엄마는 겨울밤이면 무를 깎아 주곤 했는데 그 친구 아빠는 손수 딸의 친구들에게 사과를 깎아 주시면서 ‘네가 그 공부 잘한다는 진필이구나’라고 사근사근하게 말을 걸어 주셨기 때문에, 드라마에 나오는 서울 아빠 같은 모습이 신기하고 낯설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세 명을 꼼짝 못 하게 하는 힘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동경은 없었다. 그 힘이란 바로 공부를 가장 잘하는 것이었다. 그 시절에는 그랬다. 공부를 잘하면 친구들과 선생님들한테 인정받을 수 있었고 반장도 될 수 있던 시절이었으므로 내가 그 세 명과 친하게 지내면서 얄팍한 우월감을 가졌을지언정 열등감을 가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행운이었던 것이다. 요즘이라면, 서울이었다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일 테니까.


 그렇게 강릉에서 십구 년을 산 나는 대학교 입학식에는 부모님이 참석할 필요가 없다고 해서 2월 마지막 주에 혼자 짐을 싸 가지고 서울로 갔다. 부모님은 아는 택시 기사님께 부탁해 택시의 뒷좌석에 알량한 짐과 함께 나를 실었다. 그렇게 언니가 자취를 하고 있던 신림동 반지하 방으로 나는 옮겨졌다. 신림동 집은 방 두 개짜리 반지하 연립주택이었는데 굉장한 언덕길을 올라가서 있었다. 원래 주인으로부터 세를 얻은 1차 세입자는 숙명여대 피아노과를 다니는 어떤 언니였고 2차로 방 하나를 나의 언니가 세 얻어 있었는데 그 방에 3차로 새치기하여 슬그머니 끼어드는 불청객처럼 내가 들어간 것이었다.                 

     

 서울 와서 많은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지만 가장 먼저 안 것은 내가 가난하다는 것이었다. 막연했던 그 인식을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하게 된 계기, 그래서 시골 어른들 말씀처럼 서울 가서 바람이 든 인물 명단에 내 이름을 올리게 된 계기는 매 순간 있었다.  

        

 '서울 가면 바람 든다'라는 말은 서울로 간 시골 출신들 입장에서는 '희망을 갖는다'나 '욕망을 갖는다'로 치환할 수 있다. 내가 자랄 때 강릉에서는 설령 돈이 많다 해도 남다르게 무언가를 할 기회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백화점이 없으니 샤넬이나 구찌도 없었고 아무리 비싼 식당이 있다 해도 서울 사람들이 보면 우스울 정도였고 어차피 한 학급에 자가용을 타고 등교하는 아이도 한 명 정도밖에 없었기 때문에 '차이'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서울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대학교 1학년 때 일곱 살, 아홉 살 형제의 독서 과외를 한 적이 있다. 그 형제의 어머니께서 우리 과 선배여서 굳이 과 후배 중에서 과외 선생님을 찾은 덕분이었는데 그 형제의 집이 바로 대치동에 있었다. 그때는 그 동네가 지금처럼 유명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내가 그 유명함을 몰랐던 것일 수도 있다. 내가 들어가 본 최초의 서울 아파트였는데 시골집에 비해 빈 공간이 적고 오밀조밀하여 답답한 느낌이 들었으나 얼마나 깨끗하고 고급스럽던지 그 답답함은 금세 잊혔다.        

   

 형제의 아버지는 검사라고 했는데 직접 뵌 적이 없어 검사가 얼마나 대단한 직업인지 실감은 못했지만 그것보다 그 형제가 얼마나 똘똘하고 말끔한지 나를 아무리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깍듯하게 대해도 늘 왕자님을 시중드는 시녀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과외를 가면 형제의 어머니께서는 언제나 나를 '후배님'이라고 불렀지만 동질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형제가 갖고 있는 학용품이나 장난감, 책가방, 운동화들 중 어느 것 하나 내가 시골에서 가졌던 것과 비슷한 것이 없었다. 얼굴은 또 얼마나 하얗던지. 또 이마를 덮은 앞머리는 어릴 적 나와 내 친구들과 달리 한 번도 땀에 젖어 있지 않았다. 형제의 어머니께서는 내가 지방 출신으로 자취를 한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과일이나 떡, 샌드위치 등 먹을 것을 항상 준비해 주셨는데 음식 자체가 낯선 것일 때가 많았고 음식을 그렇게 예쁘게 담을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으며 포크와 접시, 쟁반이 늘 같은 무늬의 세트로 놓여있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먹기가 아까울 지경이었다. 나도 그렇게 키워졌더라면, 이미 글렀으니  내 자식만큼은 그렇게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그것이 바로 시골 어른들께서 말씀하시는 '서울 가면 바람 드는‘ 증상인 것이라면 나는 단단히 바람이 들었던 것이 맞다.        


 과외를 했던 형제가 왕자님이었다면 우리 과에는 별명이 '부산 공주님'인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의 아빠가 부산에서 굉장한 부자인데 딸이 공부를 곧잘 해서 이화여대에 합격하자 너무 기쁜 나머지 아파트를 사서 가정부 아줌마를 붙여 주었다는 전설에 휩싸인 공주님. 우리 공주님은 심지어 착하기까지 해서 지방에서 올라와 허름한 자취방을 전전하며 제대로 된 음식이라고는 학교 식당밥이 전부였던 몇몇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가 밥을 먹여 주고 재워 주는 은혜를 베푸는 일이 잦았다.               


 또 우리 과에는 강남에 사니까 당연히 강남 스타일인 아이들도 있었다. 입학하고 나서 서로 친해지기 전에 교실을 두리번두리번할 때 보면 은은한 서광이 비치는 듯한 친구들이 있었다. 한 듯 만 듯 세련된 화장에, 그때는 몰랐지만 좋은 옷을 입고 가방을 들고 다녔고, 가장 놀라운 것은 자기 차를 몰고 와 학교 근처 유료 주차장에 매일 차를 세워 두는 아이도 있었다는 것이다. 강릉집에는 아직 자가용이 없던 때였는데 한 학기 주차비가 한 학기 등록금에 육박한다는,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전설에 휩싸인 친구들. 그 친구들은 태도마저 상냥하고 친절하고 예의가 발라 그들을 부러워하는 아이들에게 어떤 도덕적 우월감조차도 허락하지 않았고, 지금 내 딸이 서울에서 공부하는 것을 보면 공부 실력도 그 친구들이 시골 출산들보다 더 좋았을 것이다. 또 재벌가의 딸이나 손녀, 부모나 조부모가 장차관이거나 대기업의 임원, 의사나 법조인 같은 전문직인 아이들이 백사장의 모래알만큼은 아니더라도 흰쌀밥에 섞인 콩만큼은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강원도에서 학원을 운영할 때 우연히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시는 여고 선배님을 만난 적이 있다. 내 딸은 미취학 상태였지만 선배님 아들은 대학생이었으니 그분과 나의 나이 차이는 많았으나 명문대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다만 나의 명문대는 미래에 내 딸과 만나게 될지 아닐지 불확실한 연인 같은 존재였다면 선배님의 아들은 명문대 중의 명문대인 서울대에 이미 재학 중이었다.

         

 "아들이 대학생이 되고 나서 너무 이상해졌어. 우리 부부야 뭐 공부 공부 안 했어. 우리 부부도 공부를 썩 잘하지 못해서 둘 다 지방대 사범대 나왔지만 웬만큼 산다고 생각해 왔고 또 교사 월급으로 뒷바라지에 펑펑 쓸 돈도 없었거든. 그런데 큰 애는 자기가 워낙 욕심이 많아서 놀지도 않고 잠도 안 자고 공부하면서 서울대, 서울대 노래를 했었어. 그렇게 바라던 서울대에 갔는데 뭐가 문제인 건지.... 얼마 전에는 유학을 보내달라고 하는데 곧 대학 갈 동생이 둘씩이나 있는데 그게 가능한 일이야? 그래서 졸업하고 네가 돈을 벌어서 가랬더니 화를 내더라고. 세상에, 동생들은 공부를 아주 잘하는 것도 아니니 굳이 서울로 대학 보낼 필요 없다는 말까지 하는 거야. 그래서 애 아빠가 처음으로 큰 애한테 화를 냈어. 네가 장남이고 서울대까지 다니면 동생들 뒷바라지할 생각을 해야지, 동생들 공부시킬 돈으로 너 유학 갈 생각이나 한다고.... 그랬더니 요새는 휴학하고 군대 가겠다고 성화네. 학교에 다니기가 싫대. 자기가 그렇게 원했던 학굔데 말이야. 사람들은 아들이 서울대 가서 좋겠다고 하지만 우리 부부는 요새 큰 아이 때문에 불안 불안해."         


 그 아들도 나처럼 서울에 가서 바람이 든 것이다. 유학을 다녀오면 자신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고 주변의 공주님, 왕자님 같은 친구들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험이 없는 부모는 그런 경험을 하는 아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서울대에 간 것만 해도 시골에서는 과거에 장원 급제한 것만큼 대단한 일이건만 더 이상 무엇이 또 필요하다는 말이냐. 이제 네가 동생들을 건사하고 집안을 일으켜 세울 일만 남았느니라. 그러니 서울대에서 이미 일으켜 세워져 있는 집안의 친구들을 수두룩하게 본 아들의 소외감과 무력감은 더욱 깊어지는 법이다.                     


 그럼에도 나는 부모님께 늘 고마웠다. 여고 때 내게 처음으로 쫄면 맛을 알게 해 주었던 단짝 친구가 과학고를 조기 졸업하는 연년생 남동생과 같은 해에 대학을 가는 바람에 지방대에 장학생으로 가는 것을 보면서 비록 언니 자취방에 끼어들어 가는 것이지만 서울로 대학을 보내 주는 부모님이 너무 고마웠다. 어렸지만 군무원인 아빠 월급으로 할머니, 외할머니를 부양하고 네 명의 자식을 키우며 그중에 두 딸을 서울의 사립대학에 보내면서도 빚 한 푼 지지 않는 부모님의 삶이 얼마나 헐벗고 고단한 것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정적으로 외로웠던 것도 사실이다. 나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이런이런 것을 보고 그런그런 것을 느꼈으며 그래서 저런저런 목표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부모님이 전혀 이해해주지 못한다는 것은 어느 나이까지는 굉장히 외로운 일이었다. 아빠가 중앙대 국문과 교수인 과 친구가 4년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중앙대 국문과에 아빠의 권유로 미련 없이 등을 돌렸고 아빠와 오랜 의논 끝에 아빠처럼 교수가 되려고 한다는 말을 들을 때면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나는 자식을 낳는다면 내가 과외를 했던 그 형제들처럼, 우리 과에 있었던 그 부산 공주님처럼 키우겠다는 결심이 단단해졌다. 돈은 물론 가진 능력도 쥐뿔도 없으면서 그런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으니 바람이 든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가 만약 공부를 잘하지 못해 서울에, 이화여대에 가지 않았다면 바람이 들지 않았을까? 아니면 나라는 사람은 어디에 있었어도 바람이 들었을 사람일까? 서울에 가서 바람이 들었을 때 내 안에서 끓어오르던 욕망, 절망, 간절함, 초조함의 덩어리들이 부풀고 부풀어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위태로웠던 것이 아직 생생히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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