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언니의 꿈을 좇아!
내 꿈을 돌아보게 한 용기 한 스푼의 말
1991년 6월 1일
우리 가족은 시베리아 같았던 철원 와수리에서
따뜻한 봄의 도시 '춘천(春川)'으로 이사를 왔다.
그것도 봄의 끝자락, 여름의 시작인 그날..
어쩌면 봄의 고장으로
봄의 끝자락에 왔기 때문일까..?
난 언제나 끝과 같은 마음으로 불안했고, 위태로웠으며 안정되지 못한 나날을 보냈다.
부모님도 언니도 할머니까지 모두 내 곁에 있었지만
고작 7살밖에 안 된 나는
마음 한 편으로 매우 방황하고 있었다.
낯선 환경, 낯선 생활, 낯선 사람들.. 모든 것이 불안했다.
아빠께서는 당시 버스를 타고 춘천에서 철원으로 매일같이 출퇴근을 하셨기에
거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엄마께서도 아파트 관리사무소 직원으로 근무 중이셔서
낮동안은 함께 있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언니마저 초등학교에 가고 나면 남겨진 건 나와 할머니 둘 뿐.
17평 남짓한 집에서
편찮으신 할머니와 단 둘이 오전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어린 나에게 너무나도 길고 지루한 일이었다.
할머니께서는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서 보내셨는데
그런 상황에서 할머니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7살 꼬마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방바닥에 엎드려 책장 가득 꽂힌 책을 꺼내어 읽는 것이었다.
내가 조용히 책을 읽고 있으면 할머니께서는 이따금씩 내 이름을 부르셨고,
그럴 때면 나는 "네~!" 하고 큰 소리로 대답하며 할머니께서 계신 안방으로 달려갔다.
할머니께서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애가 내 손녀딸인데, 조용하니 책 읽는 것을 좋아해요." 라며 자랑하곤 하셨다.
그러면 사람들은 나에게 착하다거나 예쁘다거나 하는 칭찬을 해주었다.
그때 알게 되었다.
책을 읽으면 어른들에게 칭찬을 받는 수 있다는 것을.
사실 이전까지는 뭐든 다 잘 해내는 만능 언니의 아래에서
내가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지배했기 때문에
'나는 잘하는 것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나도 잘하는 것이 생겼고, 그로 인해 칭찬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왠지 뿌듯하고 기뻤다.
그때부터 종류에 상관없이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그것도 많이.
말 그대로 다독(多讀)이었다.
오죽했으면 아빠께서는 나에게
책 그만 읽고 공부 좀 하라고 말씀하실 정도였다.
남의 글을 계속해서 읽다 보니 나도 내 글이 쓰고 싶어졌다.
당시에 한창 유행하던 팬픽(연예인들을 등장인물로 하여 쓴 연애소설 따위)을 시작으로 짧은 소설을 썼다.
시도 쓰고, 길지 않았지만 산문도 썼다.
고등학교 재학 중에는 백일장에 나가 여러 번 수상을 하기도 했지만
이런 나의 재능, 꿈과는 전혀 달리
오로지 나에게 주어진 성적에 맞게 대학을 진학해야만 했고
나의 꿈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고 난 뒤 나는 단 한 줄도 내 글을, 내 이야기를 적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둘 낳아 키우던 어느 날,
거의 친자매나 다름없이 지내는 동생이 갑자기 물었다.
"언니, 언니는 꿈이 뭐야?"
그 말을 들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입에서
"나는 내 글을 쓰는 게 꿈이야."라는 대답을 했다.
나도 놀랐다.
내 꿈이 글을 쓰는 것이었구나.
그동안 글을 쓰지는 않았지만, 나는 글을 쓰고 싶었던 거구나.
내 얘기를 들은 동생이 말했다.
"언니, 내가 예전부터 느꼈는데 언니가 글을 참 잘 쓴다고 생각했어. 언니는 잘할 수 있어.
언니, 언니의 꿈을 좇아!"
'꿈을 좇는다'라...
과연 애 둘인 내가 그래도 되는 걸까?
라는 의심조차 들지 않았다.
드라마나 영화 속 슬픈 장면을 마주할 때 눈물 버튼이 눌려 펑펑 눈물을 쏟듯
동생이 던진 이 한마디로 인해 마치 꿈 버튼이 눌려져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솟아올랐다.
나는 정말 내 꿈을 좇아가고 싶어졌다. 글이 쓰고 싶어졌다.
남편이 나에게 뜬금없다고 이야기하면 어쩌지?
글 쓰는 모습 한 번 제대로 보인 적 없었는데 갑작스럽다며 당황하면 어떻게 하지?
몇 날 며칠의 고민 끝에 남편에게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고,
예상과는 달리 남편은 흔쾌히 그러라고 해주었다.
억겁 같았던 그 며칠의 시간 동안
이런저런 고민들로 인해, 목구멍까지 올라오던 이야기를 꾹꾹 눌러 삼켰었는데
힘겹게 용기를 내어 진심으로 말해서였을까...?
통했다.
그동안 글을 쓰지 않고 지냈던 시간이 단순하게 그냥 흘려보낸 시간이 아니라
글을 쓰기 위한 준비단계였음을...
글감을 찾기 위해 취했던 다양한 경험의 씨앗들이었음을...
결코 그 시간들이 헛되지 않도록
앞으로 진심을 다해 내 이야기를 써 내려갈 것이다.
동생이 눌러준 내 꿈 버튼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