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는 사람에게』가 그려내는 산책
오늘은 하루 종일 가만히 있었어. 왠지 움직일 수가 없었으므로 내내 누워 있었지. 몸을 뒤집어 겨우 엎드려볼 수는 있었는데, 그리고 나는 어떻게 되었지? 나는 어떻게? 갑자기 이런 물음이 떠올라서 이상했다. 내가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보는 나 자신이 의아해서. 나는 죽은 듯 멈춰 있었고 그러자 끝없이 내리듯 쏟아지는 정경들, 그 정경들 속에는 내가 있었나. 그리고 나는 어떻게 되었지?
「그리고 나는 어떻게 되었지?」中
화자는 어딘가를 정처 없이 거닌다. 걷는다기보다는 오히려 흐르고 부유하는 듯한 느낌으로. 그렇게 거닐면서 거듭 “정처 없는 풍경과 마주”(「영상 밖에서」)한다. 이때 산책은 공간의 이동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배회하는 동안 화자의 의식은 시간을 따라서도 이리저리 움직인다. 산책을 하며 변주하는 장면과 스스로를 발견하고 “어느새 유년 시절 내가 머물렀던 동선을 거닐”(「영상 밖에서」)게 되는 식이다.
공간과 시간 속을 정처 없이 흐르는 산책. 이러한 산책은 “움직일 수가 없었으므로 내내 누워 있”(「그리고 나는 어떻게 되었지?」)는 상태에서도 가능하다. 화자는 가만히 멈춰 있는 상태에서도 “끝없이 내리듯 쏟아지는 정경들”(「그리고 나는 어떻게 되었지?」)을 바라보고 그 속에 스스로는 어떻게 되었는가를 질문한다. 수많은 장면을 지나고, 먼 과거와 미래를 흐르면서.
산책은 단순히 공간을 배회하는 몸의 움직임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시간을 배회하는 의식의 움직임이 몸의 움직임만큼이나 산책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그리고 그에 더 초점을 둔다면 산책은 방 안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행위가 된다. 먼 과거의 장면은 물론이고, 그때와는 다른 선택을 내렸다면 펼쳐졌을, 존재하지 않았던 장면까지도 거닐 수 있다.
내가 했던 산책들을 떠올려보면 정말 그렇다. 그곳에서 나는 거의 매일 저녁을 먹고 나서 1시간가량을 산책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에게 산책은 절실했던 것 같다. 산책하는 동안 내가 마주한 것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기보다 옛날의 장면들이었으니까. 내게 필요했던 건 옛날의 장면들을 곱씹는 시간들이었다.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은 채 외따로이 놓여 있다는 외로움과 지금 여기를 벗어나고 싶다는 불만감은 과거의 장면들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외롭지 않았던 기억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 장면을 배회하는 일은 늘 후회에 잠기게 했는데, 그러면 나는 실제와는 다른 과거와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장면을 매번 새로이 그려내느라 다시 후회를 느껴야 했다. 반복되는 산책 속에서 후회는 평소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해지기만 했는데, 여태까지 느껴왔던 후회는 진짜 후회가 아니었구나 싶기도 했다.
다행히도 후회는 자책에서 그치지 않고, 앞선 후회와 불만감과 함께, 다른 방식으로 살고 싶다는 욕구로 이어졌고.
산책은 변화를 수반한다. 화자는 겨울밤을 산책하는 동안 “겨울 밤공기를 스치는 얼굴들”을 떠올리고 “내가 그 얼굴이 되어봐도” 혹은 “얼굴로 파생된 얼굴이 되어봐도” 좋겠다고 생각하며, “아니라면 내가 밤공기를 자처하면서 밤공기의 퍼져나감이라고 밤공기의 흩어짐이라고 밤공기의 아스라함이라고 내 몸을 피해서 나아갈 거라고”(「이윽고 겨울밤」) 다짐하기도 한다.
이 시집에 수록되지는 않았지만 「그날의 빛 날씨」를 보면, “그날의 빛 날씨” 속에서 산책하는 화자는 “동물을 하고 식물을 하며 구름을 그렇게 해본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 “낙천적인 동물이 되어서 / 술렁이면서 / 흔들리면서”(「그날의 빛 날씨」) 나오게 된다.
다른 무엇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얼마나 큰 변화의 조짐일까. 그런 마음을 품었다는 것 자체로 변화는 시작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산책 중에 시작된 그런 변화를 나는 응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