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즈음 일기
부쩍 초파리가 많아졌다. 눈앞에 알짱대는 형체, 귀에서 앵앵 대는 울음을 견딜 수 없어 초파리 트랩을 샀다. 그 죽음이 안타깝다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글로 적으니 약간은 기분이 이상하다.) 저 많은 것들이 집안을 활보하고 다녔던 것이 충격이다가 전부였다.
추석 연휴 집에 다녀왔다. 모르는 새 대여섯 명의 이웃과 지인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사람이 연초에 죽었고 저 사람이 여름에 죽었고 또 다른 사람은 불과 며칠 전에 죽어 사회복지사가 발견했고 또 어떤 사람은 친구를 죽였다는 죽고 죽이고 또 죽은 이야기.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뭐 이리 많이 죽었냐고 넌더리가 난다는 듯 말했다.(그 말을 뱉은 즉시 후회했다.)
어쨌든 가장 충격적인 것은 나의 친척이라는 작자가 술기운에 오랜 친구를 죽였다는 사실이었다. 친구를 죽이고 교도소에 수감이 된 그를 두고 어떻게 하면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냐며 혀를 끌끌 찼다. 옆에 있던 나의 오빠는 원래 사람 쉽게 죽어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때 우리 세 식구는 하나로마트에서 사 온 삼겹살을 굽고 있었다. 익어가는 돼지의 살과 비계를 보며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다 문득 자취방 주방 한편에 죽어있는 초파리들이 떠올랐다.
파리목숨만큼 가벼이 여겨지는 타인의 죽음, 그들의 죽음이 내게 시사하는 바는 가벼우면서도 조금 무겁다. 나는 죽음을 고대한다.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러 끊임없이 갈망하는 것은 죽음뿐이다. 내 아버지에게 죽음으로써 복수하고 나에게는 삶이 끝났다는 선물을 안기고 싶다. 죽은 이웃과 죽임 당한 그 누군가처럼 내가 죽었을 때에도 내 오빠의 태도가 그들의 목숨과 같이, 하물며 내가 죽인 초파리의 목숨과 같이 가볍기를 희망한다.
불행이 기본값인 세상에 왜 가장 사랑하는 것을 내놓는지, 어째서 끝까지 책임과 소명을 다하지 않는지. 나는 할 수 있는 한 부모를 원망하다 끝내 죽음에 이르겠구나 생각했다. 비겁하지만 아직 죽지 못한 나는 이따위의 말로 하루의 끝을 정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