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음악 듣다가 해본 고찰

by 이리안




https://youtu.be/zzF0Nsm3nE0?si=RpZkqdPs3Qk1W0X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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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다 나가버린 좁은 방에서 둘이 쪼그리고 앉아 노래를 불렀다. 마이크도 조명도 악보도 없이 그저 무심하게 툭 툭 떨어지는 빗방울만이 배경음이었다. 윤이 기타줄을 튕길 때면 공기 중의 습도가 조금씩 낮아지는 것 같았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움직이는 기다란 손가락을 보다가 민은 가끔 가사를 까먹곤 했다. 에이 거기는 2절이고 민아, 장난스레 던지는 윤의 핀잔이 좋아서 마냥 웃음만 헤헤 났다. 그르게. 나 가수 못하겠다. 역시 그냥 평생 너랑만 노래할래. 발라당 드러누우며 그렇게 말하는 민의 목소리에 차마 모른 척하기 어려운 진심이 묻어나서 윤은 속이 뜨거워졌다.


..그러면 안 되지. 소중한 꿈이잖아.


이럴 땐 또 냉정하다니까. 그렇지만 윤은 늘 그랬다. 현실 속에서 낭만을 찾아 민에게 건네주다가도 그 낭만을 손에 쥐어보기도 전에 다시 현실을 가져다 놓는 그런 사람. 언제 그랬냐는 듯이 표정이 다시 딱딱하게 바뀐다. 오래 봤는데도 여전히 알기 어려운 사람. 가까워질 대로 가까워졌는데도 그 커다란 눈망울에 숨겨진 진심은 도통 나눠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사람. 이상해. 보통 애인 옆에만 붙어있겠다고 하면 좋아해야 정상 아니야? 그새 또 입술이 불퉁하게 나온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주는 손길이 눈물 날 정도로 다정해서 민은 그냥 고개를 돌려버렸다. 마주 본 벽지를 타고 스며드는 물기가 눅눅했다. 방금 전 민이 나지막하게 불렀던 멜로디가 기타 울림통을 타고 방 안을 메운다. 덕분에 잃어버린 MP3 첫 곡은 죽을 때까지도 흥얼거리겠다. 하여튼 정말로 이상해. 민은 녹슨 줄에 피부가 맞닿는 잔잔한 소리를 들으며 잠에 드는 날이면 악몽을 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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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윤은 민과 있을 때면 늘 알 수 없는 눈을 했다. 그러다가 마주치면 세상 다정한 얼굴로 웃어주었지만 시선이 도로 떨궈지면 순식간에 다시 찾아오는 그 이상한 눈빛이 민은 불안했다. 무슨 생각 해. 꽉 맞잡은 손을 살짝 흔들며 물으면 그냥 - 하는 싱거운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래서 민도 덩달아 모른 척해 줬다. 함께 있을 때면 둘의 마침표만 하염없이 그려보는 애인을 두고 차마 모진 말을 하지도 못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일부러 우산 없이 데리고 나갔다.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에 삼선 슬리퍼 차림으로 신나게 뛰어나가 보란 듯이 빗물을 뒤집어썼다. 윤의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젖어서 갈라지면 길고양이 같은 눈매와 가지런한 눈썹이 드러나서 민은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게 마냥 좋았다. 눈이 마주치면 윤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평소에는 입꼬리 말아올리며 미소만 짓다가 가끔 이럴 땐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릴 때도 있었는데 그제야 민은 그녀의 행복이 몸소 실감되어 안심하곤 했다. 어떻게든 윤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배수관이 고장 난 곳으로 가서 물이 쏟아지는 타이밍 기다렸다가 맞기도 했고 하수구가 자주 막히는 동네에서 미끄러지며 놀기도 했다. 꼬마들이 전부 사라진 동네 놀이터로 가서 그네도 탔다. 발이 바닥에 스칠 때마다 물방울이 튀었다. 웃음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눈동자가 갇힌 물방울이 튀었다.


그런 물놀이들이 죄다 질려버리면 윤의 집 베란다에 발 동동 내밀고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퍼먹었다. 많지도 않은 양인데 꼭 마지막 한 입은 서로에게 양보했다. 티격태격하느라 결국 녹아 없어져 버렸지만 입가에 묻은 크림 자국이 웃겨서 마주 보고 깔깔대다가 끝나는 싸움이었다. 별로 깨끗하지도 않은 빗물에 잔뜩 적셔져도 윤의 웃음은 햇빛보다 더 밝았다. 먹구름보다 무지개가 먼저 보였다.



21세기에 내리는 비에는 산성이 많아서 꼭 씻어야 돼. 산성이 뭐야? 몰라, 아무튼 안 좋은 거야. 그래? 20세기에 태어날걸. 아니 그냥 1세기에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산성비, 하수구 물, 세균. 윤은 위험해 보이는 단어를 죄다 갖다 붙이고는 꼼꼼히 씻어야 한다고 우기며 홀딱 젖은 민을 데리고 매번 같이 욕실에 들어갔다. 민은 물이 데워지는 것을 기다리는 그 잠깐의 시간 동안 묘하게 흐르는 긴장감이 마냥 싫지 않았다. 심장이 작게 뛰었다. 민의 손목을 붙들고 끌고 들어와놓고는 어색한 표정 지으며 돌아보는 윤에 덩달아 민망해졌다. 비좁은 욕조에 몸을 구겨서 들어가느라 노곤하게 풀리기는커녕 잔뜩 움츠린 채로 씻어야 했지만 더운 욕실의 공기가 간질간질하게 느껴져서 좋았다. 일부러 눈 마주치고 싶어서 빤히 보았는데 정작 마주치면 눈동자 대신 입술을 쳐다보는 윤의 습관 때문에 먼저 시선을 피하기도 했다. 결국 못 참고 입 맞추어버리는 쪽은 늘 민이었다.



눈과 눈이 마주치는 거 그것 참 신기한 현상 아니야? 작은 구슬 같은데 그 안에 은하수와 별똥별이 떨어지는 그런 구체를 우리가 품고 사는 것도 물론 신기하지만, 네 눈동자와 내 눈동자가 겹치는 순간이 존재한다는 게. 내 우주가 네 우주를 마주칠 때. 나는 그 순간이 세상에서 제일 고요해서 심장 뛰는 소리밖에 들리지가 않아.



간혹가다 비가 잠시 멈추는 날이 있기도 했다. 갑자기 공기가 버석 해지는 그런 날. 거대한 찜기 속에 갇혀있는 것처럼 이글이글 아스팔트조차 끓어오르는 그런 날. 그럴 때에는 구름 한 점 없이 내리쬐는 태양을 온몸으로 맞아내며 널브러져 있는 민을 윤이 일으켜 세웠다. 둘은 작은 입속에 얼음 하나씩 문 채로 선풍기 앞에서 낮잠을 자곤 했는데 7시가 넘어가면 윤은 해가 지는 걸 귀신같이 알고는 벌떡 일어났다. 반짝이는 눈으로 민을 깨우며 오토바이 키를 흔들어 보였다. 우리 오늘은 슬러시 먹어보자. 여기는 또 뭐가 맛있어? 야시장 가봤어? 샤오롱바오가 유명하다던데.


윤은 민보다도 이 근방에 대해 빠삭했다. 한국에 있을 때 조금씩 공부해뒀다는데 그중에서도 홍콩 야시장과 길거리 음식이 그렇게 맛있다면서 윤을 이끌었다. 면허가 없는 민은 친구에게 오토바이를 빌려왔고 운전은 윤이 했다. 얇은 허리를 끌어안고 밤바람을 가만히 맞으며 달리는 순간에는 도시의 불빛보다 별들이 더 눈에 잘 들어와서 괜히 코 끝이 찡했다. 나부끼는 자그만 뒤통수가 세상에서 제일 든든했다. 화려한 네온사인들을 뒤로하고 그대로 밤하늘에 파묻히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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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을 처음 만났던 날, 뒤를 따라 들어간 서늘한 방 안에는 기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몸통에 흠집이 잔뜩 나고 칠이 벗겨진 늙은 기타가. 윤은 능숙하게 그걸 안아들었다. 튜닝기 없이 줄을 하나씩 튕기며 조율을 하더니 민을 바라본다. 그 순간 민은 가슴속 어딘가가 꽉 메워지는 느낌을 받았었다. 묵묵히 저만을 쳐다보는 새까만 눈동자가 밤 하늘에 우두커니 떠있는 달처럼 보여서. 서 있기조차 버겁게 무겁기도 하고, 어쩌면 후 하고 불자마자 날아갈 것 같기도 한 그런, 차마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그 기분에 눈시울이 빨개진 채로 입을 열었다. 큰 무대에 선 것도 아닌데 목소리가 유난히 떨렸다. 심장소리에 목소리가 묻혀서 귓가가 시끄러웠다. 윤은 아무 말 없이 그에 맞춰 기타줄을 튕겼다. 부드럽고 따뜻한 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차가운 노래방 기계가 아닌 사람의 온기가. 열기가 담긴 음표들이 춤을 추며 떠다녔다.


싸구려 현실에만 치이던 민에게는 지나치게도 드라마틱한 첫 만남이었으므로, 아마 그 순간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꿈이라는 것은 감히 였다. 꿈을 감히, 감히 꿈을. 무엇보다 민은 꿈을 꾸는 법조차 몰랐기에. 파인애플 통조림만 먹으며 자란 아이가 실제로 파인애플의 모습을 보았을 때 알아보지 못하는 것처럼 그냥 그랬다. 민은 알 수 없었다. 꿈이라는 것은 어떻게 생기는 것이며 어쩌다 갈망하게 되는 것인지.


그리고 그날 난생처음으로 윤은 꿈을 꿨다. 컴컴한 양계장 같은 낡은 주택 4층의 어느 방이 아닌 맑고 시원한 공기가 활개치는 곳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내뱉는 모든 음절마다 갈망이 담겼다. 구멍 난 줄도 모르고 마구 채워 넣던 가짜 온정들이 떠올라서 서러웠다. 실은 알코올 향기 풍기는 사람들의 음주 가무 따위 지긋지긋했다고, 관객 하나 없는 노래방에서 목이 터져라 불러도 반주가 끝나면 다시 찾아오는 정적이 허무했다고, 민은 결국 인정해버렸다. 간간이 민의 눈을 맞추며 그의 목소리를 따라 연주하는 윤 때문에 깨달아버렸다. 윤아. 있잖아. 나 노래가 하고 싶나봐. 정적 대신 환호가 찾아오는 그런 곳에서 달빛보다 환한 조명을 받고 싶어, 사실은.


갓 걸음을 뗀 새끼 기린처럼 민은 꿈꾸는 법을 몰라 비틀거렸었다. 넘어지면 때로는 죽을 만큼 서글퍼지겠지만 넘어진 김에 앉아 별을 볼 수도 있으니까 민아,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윤이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건넸던 그 말은 민이 처음으로 배웠던 나아가는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윤. 그리운 얼굴 하나 없다던 윤. 대체 너는 어떻게 살아있는 거야. 어느 날 갑자기 두 발이 붕 떠서 영영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불안감에 떨어본 적 없는 거야? 이 거대한 우주에서 나의 무게가 너무 가벼운 것만 같아서 부끄러울 때가 없는 거야?


씩 웃으며 시원하게 올라가는 입꼬리와는 다르게 유독 서글퍼 보이는 눈매와 마주치는 순간, 아마도 그 순간에 민은 윤에게 반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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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되려 살고 싶어져야 하지 않나. 간당간당한 내 삶의 끈을 더 꽉 잡게 되지 않나. 근데 나는 너랑 있을 때면 왜 매번 죽고 싶어지는지 모르겠어. 이대로 우주가 내려앉아서 지구를 덮쳤으면 좋겠는 거 있지. 바다가 거꾸로 솟구치고 눈이 멀 정도로 환한 혜성들이 쏟아져내렸음 싶어. 매일매일을 여름 속에 살면서 독한 감기에 시달리고 싶어. 누워서 서로의 눈만 바라보고 잠들고 싶어. 우산 없이 달려나간 장마의 한복판에서 피부 사이로 빗물이 완전히 스며들었으면 좋겠어. 우리의 여름은 서로를 껴안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추운 여름이었으면 좋겠어. 그래서 태양이 있는 힘껏 따갑게 째려봤으면 좋겠어. 아이스크림 뚜껑을 열면 1초 만에 녹아버리는 그런 공기 속에서 서서히 질식하고 싶어. 네 손을 잡아야만 확인되는 내 존재처럼 너도 똑같이 그랬음 좋겠어. 그렇게 손잡고 어딘가로 퐁당 뛰어들고도 싶어. 돌멩이를 연못에 던질 때 일어나는 파동처럼 우리 둘의 무게도 딱 그 정도로만 가벼웠으면 좋겠어. 갈수록 식어가는 우주 속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질량이 너무 버겁지만은 않게. 그러니까 난 너랑 있을 때면 꽤나 자주 죽고 싶어. 느낌표는 너무 긴 것 같아. 구부리면 물음표. 엔딩만 남겨두면 마침표.



민과 있을 때면 긴 꿈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꿈이란 것은 본디 분명 깨어질 것을 알고도 꾸는 것. 그럼에도 영원히 깨지 않기를 바라게 되는 모순적인 현상. 의식과 무의식의 집합체. 내키는 대로 행동해도 현실의 나에게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점이 지나친 안도감을 주는 공간이라서 마음껏 웃고 울고 살고 죽어도 되는 그런. 민은 제게 자꾸만 손을 뻗는다. 내가 깨어났을 때에도 옆에 있을 거야? 묻고 싶었다. 만일 물었다면 1초 만에 당연히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올 것을 알기에 구태여 묻진 않았다. 그렇지만 뻗어진 손을 잡는 것은 너무나도 쉬워서 윤은 오늘도 꿈속으로 향했다.


그제서야 윤은 자신의 사랑이 이기적임을 인정했다. 잠든 민의 잠잠한 눈꺼풀을 보며 그런 생각이나 했다. 오늘 밤이 마지막이라면 어떨까. 이대로 자신도 깊은 잠에 빠진다면.


민 때문에 아주 오랜만에 기타를 잡아봤다. 다행히도 서늘한 쇠줄이 손가락에 닿는 순간 잊었던 감각이 순식간에 되돌아왔다. 금방 다시 감을 잡았다. 스스로 끊어냈던 것이 무색하게 온몸에 음표가 휘감기는 느낌이 들었다. 내친김에 노래도 흥얼거렸다. 분명 제 목소리인데 지나치게 낯설었다. 원하는 때에 원하는 소리를 내본 것이 얼마 만이지.


민이 자신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미련은 없어졌다. 너를 매일 보고 싶어. 매일 안고 싶고 매일 입 맞추고 싶고 매일 부르고 싶어. 근데 그러다간 닳아버릴 것 같아. 다음날, 그다음 날, 또 그다음 날, 그러다가 언젠가는 마지막 날이 찾아올 텐데. 윤은 민의 손을 부드럽게 쓸었다. 닿아있는 마른 손가락이 벌써 그리운 건 기분탓이라며 시선을 돌렸다. 열어놓은 창문 밖으로는 풀벌레가 울었고 유흥가를 지나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저급하고 한없이 가볍기만 한 영양가 없는 대화들. 담배 연기는 늘 여름 밤 공기와 한 몸처럼 자연스레 뒤섞여서 열어놓은 창문 틈새로 스며들어온다. 시야를 꽉 채우는 커다란 달을 보며 윤은 오랜만에 소원을 빌었다. 헐어버린 사랑을 이미 경험한 그녀는 그저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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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


"어."


“있잖아”


“어.”


"너는 뭘 할 때 가장 행복해."


난생처음 받아보는 질문에 윤은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살짝 찌푸린 눈썹 사이에 미세하게 생긴 주름이 웃겨서 민은 잠자코 그런 윤을 보며 기다렸다. 난 그냥 이런 순간이 행복한데, 하고 속으로 혼잣말했다.



"나느은.."


"응"


"너 목소리 들릴 때."



...뭐야 그게.



"너가 소리 내는 모든 순간을 볼 때."


"...."


"이 시끄러운 세상의 온갖 잡음 속에서도 너만 들릴 때."



그러니까 민아, 나는 네 꿈 응원해. 1호 팬이야. 영원히. 알았지? 기죽지 마 어디 가서도. 비록 내가 지금 이렇게 음, 좀 별로인 사람이래두 어쨌든 팬이니까. 가수는 관객이 있어야 연주를 하고 노래를 하잖아. 훗날 너를 응원하는 사람이 아주아주 많아진다고 해도 그 사람들 다 죽고 없어진다 해도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네 목소리가 멎어버린다고 해도 나는 남아있을 거니까. 넌 그거 하나만 기억하면서 살면 돼. 그래야 내가 행복해.




꿈. 그놈의 꿈. 그리고 윤. 언제나 민의 꿈을 제 꿈처럼 외우고 다니던 윤. 그 사랑이 가끔은 너무도 커다래서 민이 차마 업고 살기에는 숨 막히도록 버거운 순간이 있었다. 노래 부르는 나를 빤히 쳐다볼 때, 네 눈동자에 비치는 내 눈동자가 너무 반짝여서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게 될 때, 네 상처보다 내 상처를 더 먼저 확인할 때, 그리고 바로 지금 같은 순간에, 민은 도둑질을 할 때보다 더 심한 부채에 시달리는 기분을 느꼈다. 왜, 왜 그렇게 내 행복에 필사적인 거야. 빚만 지는 사랑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귓가가 먹먹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제 숨소리조차도. 나 때문에. 내가 결국 너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봐. 사실은 내가 훨씬 더 못난 사람이라서, 꿈도 꿀 자격 없는 사람이었을까 봐.


헬멧 두 개를 매단 채 멈춰있는 오토바이에서 미처 볼륨을 줄이지 못한 라디오가 새어나왔다. 흔한 영화 속 연출처럼 엔딩 크레딧으로 이어질 잔잔한 배경음악이 흐르는 대신 생기 없는 목소리의 캐스터가 기상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올해는 유독 장마가 늦을 것으로 예상되며 - 다가오는 장마 기간에는 더위가 한 풀 꺾일 것으로 예측됩니다 - …


따갑고 건조했던 여름이 끝나가고 있다. 매미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민은 뙤약볕이 쏟아내는 모멸을 한몸에 받아내며 빛나는 얼굴로 뒤 돌았다. 젊은 심장은 애정하는 사람과 살을 부비지 않더라도 마구 펄떡일 수 있다는 걸 여전히 깨닫지 못한 표정이었다. 민은 여전히 꼭 닿아있는 것처럼 굴었다. 열 발자국 남짓 멀리 떨어져있는 윤을 바라보았다. 너무 가까워서 눈동자끼리 금방이라도 부딪힐것처럼. 그치만 그런 일은 이제 일어나지 않아. 우리의 꿈은 좀, 엇갈렸던 것 같다.


너 없으면 나 팬 없어. 나 같은 걸 누가 좋아해. 누가 스스로를 버리면서까지 나를 더 응원해. 그런 사람이 어딨냐고. 미련하게. 나 유명해지면 너 모른 척 할거야. 너도 버리고 여기 이 방도 버리고 이 동네 이 나라 다 버릴 거야. 그러니까 나한테 아무것도 주지 마. 버릴 때 멈칫하게 만들 만한 것들 다 주지 마. 너 마음 너 얼굴 너 목소리 너 손 너 기타 너 가사 그냥 다.


실은 그게 내 진짜 꿈이었나봐.



이래도 여전히 너는 내 꿈을 응원하는 1호 팬으로 남아있을까. 그 해 여름은 먼 훗날 언젠가 무대에 서게 된다면 가장 먼저 떠오를 잔상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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