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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별 Nov 16. 2023

신성한 이분법

신과 나눈 이야기 중에서

신성한 이분법은 종종 신화나 종교적인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개념으로, 두 가지 상반된 개념이 신성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이분법은 종종 신성하거나 보다 높은 차원의 개념들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다.
 
 예를 들어 선과 악, 도덕적인 가치와 부정적인 행동의 상반된 개념들이  결합되어 나타나는데 이는 인간들에게 도덕적인 선택과 영적인 성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고찰하게끔 만든다.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신성한 모순은 일반적으로 상반된 개념이나 원리가 동시에 존재함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모순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을 이해로 이끌기 위해 이 모순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생각을 자극해서 새로운 시각을 열어줌으로써 이해로 이끄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실상 우리 삶 속의 모든 문제들도 양면성과 모순점을 가진다.
그러나 그 모순이 주는 한계, 장벽을 넘어설 때
우리 안에 의식의 확장과 도약이 일어난다고 본다.     
 


참고로 신성한 이분법에 대해 얘기하는 *‘신과 나눈 이야기’ 중 일부 글을 덧 붙인다.    


      






너희가 우리 우주에서 은혜롭게 살아가려면, 신성한 이분법을 배우고 철저히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신성한 이분법은 명백하게 모순되는 두 진리가 같은 공간에서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너희 행성 사람들은 이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그들은 질서 잡기를 좋아해서, 자신들의 그림에 들어맞지 않는 것이면 무엇이든 자동으로 거부한다. 이런 까닭에, 자신들을 주장하기 시작하는 두 현실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때, 그들은 당장 그 자리에서 그중 하나는 틀린 것, 잘못된 것, 사실이 아닌 것 이라고 가정한다. 사실 그 둘 다가 참일 수 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면, 크나큰 성숙이 필요하다.   

  

하지만 너희가 사는 상대계와 대립하는 절대계에서는, 존재 전체인 하나의 진리가, 상대적인 의미로 보면 이따금 모순처럼 보이는 결과를 낳으리란 건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이것이 신성한 이분법이다. 이것은 인간 체험 중에서 대단히 참된 부분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고서 은혜롭게 살기란 사실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늘상 헛되이 “정의”를 구하거나, 절대 화해하기로 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 사이의 긴장이라는 성질 자체로 인해 바라던 바로 그 결과를 낳는, 대립하는 힘들을 화해시키려고 열심히 애쓰면서, 툴툴거리고 화내고 엎치락뒤치락 한다.

하지만 사실은 바로 그런 긴장들이 상대계를 붙들고 있다.      

그런 긴장의 하나로 선과 악의 긴장이 있지만, 궁극의 현실에서는 선과 악 같은 건 없다. 절대계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사랑이다. 하지만 상대계에서 너희는, 너희가 악이라 부르는 체험을 창조했다. 너희가 그렇게 한 건 매우 건전한 이유에서다. 


너희는 사랑이 존재 전체임을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몸소 체험하길 원했다. 

하지만 뭔가를 체험하려면 그것 말고 다른 것들도 있어야 하기에, 너희는 너희 현실 속에 선과 악의 양극성을 창조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신성한 이분법, 즉 같은 장소에 동시에 존재하는 외관상 모순된 두 가지 진리를 갖는다.     


최고의 복잡성은 최고의 단순성이라는 최고의 ‘신성한 이분법’이 있다.

체계가 복잡할 수록, 그 디자인은 단순하기 마련이다. 사실 그것은 그 단순함으로 지극히 우아하다.    

 

가장 큰 신성한 이분법은 우리가 이제부터 살펴보려는 것이다.


오직 ‘한 존재’, 따라서 오직 ‘한 영혼’ 만이 있다. 그리고 그 ‘한 존재’ 속에 많은 영혼들이 있다. 이분법이 작용하는 방식은 이렇다. 너는 방금 이분법이 영혼들 사이에 분리가 없다는 사실을 네게 설명하도록 만들었다. 영혼이란 모든 물체의 안과 둘레에 존재하는 생명 에너지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모든 물체를 제자리에 “잡아두는” 것이다. “신의 영혼”은 우주를 잡아두고, “사람의 영혼”은 사람의 몸을 잡아둔다.

     

너희가 영혼이라 부르기로 한 것이 바로 구별되는 단위로 합쳐져서 물체를 붙들고 있는 이 에너지 덩어리다. 우리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많은 수의 너희가 된 내 부분들이다. 따라서 우리라는 오직 하나만이 있으면서 많은 우리가 있다는, 신성한 이분법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신과 나눈 이야기~ 미국의 닐 도널드 월쉬가 쓴 책 이름이면서 영화 제목이다. 저자가 신과 나눈 대화록으로 이뤄진 그의 책은 1995년에 미국에서 발간되었고,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에 137주간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          


https://youtu.be/SGD5W5aUWrY?si=I4QvjojVBa91vm6_






우리는 인간의 길을 걷고 있는 신이다.


때문에 우리의 영혼은 '신의 길'과 '인간의 길'을 모두 걷고 있다.

때로는 신의 길을 따라 걷다가 때로는 인간의 길을 따라 걷는다.

상황에 따라 다시 신의 길을 따르고 상황이 변하면 다시 인간의 길을 걷는다.

어떤 것도 잘못되거나 틀린 것은 없다.     

그 두가지 길 모두 신이 우리에게 허락한 길이며 신을 향한 길이므로

모든 영혼이 제 갈길을 가게 하라.


개개의 영혼은 지금이라는 순간마다 자신의 더없이 고귀한 목적에 맞고,

가장 빨리 자신을 기억해내는 데 적합한 상황과 조건을 창조한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걷는 업보의 길을 판단하려 들지마라.     

우리는 타인 영혼의 계산서 속에서 무엇이 성공이고 무엇이 실패인지 알지 못하니,

남들의 성공을 질투하지도 말고, 남들의 실패를 동정하지도 마라.

어떤 것을 재난이라 부르지도 말며, 기쁜 일이라고 하지도 마라.

그것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판단하거나 목격할 때까지는.

그러나 우리는 이런 판단조차 내리지 말아야 한다.


언제나 남에게 충고하지 말며,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충고하게끔 내버려둬라.     

세상에는 어떤 희생자도 없고 어떤 악당도 없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선택으로 내가 희생되는 일도 없다.

어떤 면에서 보면 내가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들 전부를 나 자신이 창조해냈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창조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선택한 것이다.


저절로, 그리고 그 자체로 고통스러운 건 아무것도 없다.

고통은 잘못된 생각의 결과다. 그것은 생각의 오류이다.

고통은 내가 어떤 것에 관해 내린 판단 때문에 생긴다.

그 판단을 제거해보라. 그러면 고통이 사라진다.     


신의 세계에는 "해야 한다"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 는 건 없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라.

당신을 반영하는것, 당신 자신의 변형으로서 당신을 재표출해주는 일을 하라.

유감스럽게 느끼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

그러나 심판하지도 비난하지도 마라.     


왜냐하면 당신은 그런 일이 왜 일어나는지도,

어떤 식으로 끝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비난하는 것이 언제고 나를 비난할 것이며,

내가 심판하는 것이 언제고 나를 심판하리라는 것을.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것들을 축복하라.

그 모든 것이 다 신의 창조이고,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창조이기에.


신은 한번도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라"거나 "하지 마라"는 걸 설정한 적이 없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가 받은 최고의 선물, 즉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고 그 결과를 체험해 볼 기회와,

우리가 '참된 자신'의 모습과 닮은 꼴에 비추어 자신을 새롭게 창조할 기회와,

또 자신의 가능성에 기반을 두고 더욱더 고귀한 자신을 만들어줄 공간이란

선물을 빼앗는 것이 되리라.     


어떤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이 "그르다"는 것은

내가 그것들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

그것들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나 자신을 금하는 것이다.

나를 금하는 건 자신을 제한하는 것이며,

자신을 제한하는 건 '참된 자신'이라는 실체를 부정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 실체를 창조하고 체험할 기회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내가 나 자신의 규칙을 제정하고, 바로 내가 그 지침들을 설정한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잘해왔고, 지금 얼마나 잘해나가는지 판단하는 사람도 나다.

왜냐하면 나야말로 '자신이 참으로 누구이고 무엇인지'와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고자 하는지'를 판단해온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야말로 자신이 얼마나 잘해가는지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나 이외에 어느 누구도 나를 심판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것은 완벽의 일환이자 완성의 과정일 뿐이니

모든것과 모든이에게서 완벽을 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의 길을 걷고 있는 신이기에

매 순간 우리가 선택하는 체험중에 어떤것이 작동하는지 

어떤 것이 작동하지 않는지 잘 관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우리가 되고자 하는 자신이 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효율의 문제이다.

그런 효율의 관점에서 우리의 체험을 관찰했을때 

어떠한 선택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지 판단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관찰의 결과에 맞게 우리의 경로를 수정해 나간다면

우리는 우리가 가고자 하는 그곳에 더 빨리 도달하게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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